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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66화 (66/184)

환생의 정석 66화

빈첸은 그 자리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호법당.’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자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아덴카의 가법을 수호하며, 질서를 바로잡는 자들.

그들의 기세만으로 빈첸은 움직일 수 없었다.

‘좋구나.’

틸로반을 본 빈첸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아슬란이 남겨준 가문의 장로인데 너무나 실망스러웠었으니까.

그러나 호법당의 무인들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 정확한 수준을 가늠할 수는 없다.’

눈으로 보고 있지 않으면 저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움직임은 절제되어 있었고 은밀했다.

그리고 이미 인지한 다음에는 고요하고 웅혼한 마나가 느껴졌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바다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현장을 정리한 뒤, 베르사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 사라져 버렸다.

베르사가 물었다.

“너는 이 일을 어찌 마무리하면 좋겠느냐?”

이 일을 대외적으로 알려야 할지.

아니면 숨기고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할지.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썩은 것은 도려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숨기면 숨길수록 더욱 은밀해질 것이고, 깊이 숨은 병균은 아덴카를 좀먹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명명백백히 밝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는 것이냐?”

베르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표정이 흡족해 보이지는 않았다.

-혀, 형님.

율리안은 여전히 베르사를 두려워했다.

빈첸은 그런 율리안을 힐난하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는 약한 부분이 있으니까.

-베르사 부인은 아덴카의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시는 분이에요.

‘안다.’

빈첸이 입을 열었다.

“아덴카의 장로가 사특한 무리의 술수에 빠져 아덴카 직계의 생명을 위협했고, 아덴카 장로원 한가운데에서 흑마법을 펼쳤습니다. 이것은 분명 아덴카의 치명적인 수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율리안은 여전히 불안했다.

정치적으로 계산해서, 적절히 숨길 것은 숨겨야 한다.

아덴카의 치부를 밖으로 드러내봤자 그것은 경쟁자들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당장의 불명예를 피하기 위하여 문제를 덮고 넘어간다면, 이후 더 큰 문제가 되어 다가온다.

500년 전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혹했고 야만적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전쟁과 결투가 치러지던 세상이었다.

수많은 가문의 흥망성쇠를 보아왔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라면 실망할 것이다.”

“이번 사건의 배후로 의심되는 사미온을 방심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사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자세히 말해보아라.”

“아덴카 장로의 일탈을 철저하게 규명하여 파헤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미온의 개입은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그들의 가짜 적황미력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해야 합니다.”

“…….”

“아덴카 입장에서 아덴카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명예를 회복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사미온의 흔적을 읽지 못하였습니다. 사미온 입장에서는 방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베르사는 진실을 판별하는 눈으로 빈첸을 살폈다.

“네 모든 말에 확신이 있구나.”

단순히 이론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허상을 좇는 말 같으나, 그 안에 경험에서 기인한 확신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니.”

“…….”

이번에는 빈첸이 입을 다물었다.

‘환생’을 떠올리지는 못했으나 본질적으로 그와 유사한 점을 파악한 것 같았다.

“흥미롭구나.”

베르사가 표정을 풀었다.

그녀는 빈첸이 어떤 대답을 할지 몹시 궁금했었다.

“네 생각은 잘 알았다. 이제부터 너는 다시 붉은 요새의 9급 생도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 말은 즉,

이번 사건에서는 손을 떼라는 의미였다.

“지금의 네가 감당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하다.”

“하나…….”

“너도 그것을 알기에 살왕 세르쿤을 끼워 넣은 것 아니냐?”

“…….”

“아니냐?”

“맞습니다.”

빈첸도 알고 있다.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더 강해져야 해.’

베르사는 빈첸의 감정을 읽어냈다.

강해지고자 하는 집념.

무인으로서의 욕망.

베르사가 피식 웃었다.

“이번 사건의 공로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네게 선물을 주마. 원하는 것이 있느냐?”

단순히 빈첸을 위한 선물은 아니었다.

베르사가 빈첸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안주인인 베르사가 후계구도에 일부러 영향을 끼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늘 중립을 지켜와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킨 베르사의 기반과 명성에 흠집을 낼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것은 내게 내리는 벌이기도 하다.’

아덴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자신도 책임을 져야 했다.

그래서 빈첸에게 직접적인 보상을 내리기로 했다.

베르사가 아덴카의 안주인이 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빈첸은 약간의 두통을 느꼈다.

율리안이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다.

-어, 어머니가 자식에게 선물을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 대단한 데이아 공녀조차도 베르사에게 직접적인 선물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베르사가 직접 선물을 언급했다.

-이건 어마어마한 특전이라고요!

베르사가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꾸나. 그때까지 생각해 보거라.”

그날 저녁.

베르사는 빈첸과 식사자리를 가졌다.

가주 칸은 자리하지 않았고, 베르사와 둘만의 조촐한 식사자리였다.

“생각은 해보았느냐?”

“예.”

“말해 보거라.”

“저는 승급시험의 기회를 원합니다.”

베르사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빈첸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승급시험의 기회?”

의외였다.

“내 재량이나 추천서를 통하여 승급을 시켜달라는 것도 아니고, 겨우 승급시험의 기회를 달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나의 권한을 지나치게 축소하여 생각하는 듯하구나.”

베르사의 말 한 마디면, 9급 생도를 8급 생도로 올리는 것 정도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붉은 요새의 총책임자 헤르카도 칸보다는 베르사를 더 어려워할 정도였으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머니의 권한이 강하기에, 저는 기회만을 청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힘을 등에 업고 승급한 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냐?”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 옳지?”

“승급은 철저하게 상대적인 실력과 엄격한 채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승급은 1년에 두 번 이루어진다.

다음 시험은 6개월 이후이며 승급 인원은 최대 다섯으로 제한된다.

다만 특별한 추천서가 있을 경우, 비정기적인 승급시험의 기회가 주어진다.

빈첸이 원하는 것은 ‘승급’이 아니라 ‘승급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기회’였다.

“제가 어머니의 힘으로 승급하게 되면, 그것은 정당한 승급이 아닙니다. 또한 누군가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겠지요.”

빈첸이 바로 승급하면 올해 승급할 수 있는 생도는 넷으로 줄어들게 된다.

공정한 경쟁 없이, 누군가의 기회를 거저 박탈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베르사는 다시 포크를 집어 들었다.

버터를 발라 노릇노릇하게 구운 버섯구이를 집어 입속에 넣고 오물거렸다.

“저는 정당한 경쟁을 통해 쟁취할 것입니다.”

“네 신념이 무척이나 옳구나.”

베르사는 빈첸과의 식사가 즐거웠다.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내려놓은 뒤,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네 신념은 무척이나 느린 신념이다.”

“…….”

“그러나 또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신념이다.”

가장 멀리 갈 수 있고.

가장 높이 날 수 있다.

빈첸의 방법은 그런 방법이었다.

“나 또한 너와 같은 신념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닌가요?”

“그와 같은 신념을 꿈꾸기에 나는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지금에는 짊어진 것들이 너무 많구나. 이제 나는 멀리 갈 수 있는 신념이 아니라 빨리 갈 수 있는 신념을 택할 나이가 되었지.”

빈첸을 바라보는 베르사의 눈에, 전에는 없던 온기가 조금 배어 있었다.

“네 옳음을 응원하마.”

* * *

그날 밤.

베르사는 칸의 서재를 찾았다.

둘은 부부였으나 여느 부부와 같지는 않았다.

둘의 대화는 무척이나 건조했다.

“부인의 뜻이 무엇인가?”

단순히 빈첸의 신념을 응원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가주 칸은 그렇게 판단했다.

“이번 일에는 사미온이 깊숙이 개입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증거는?”

“없어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다.

증거라고는, 빈첸이 느낀 ‘사미온의 감각’뿐이었다.

“상대를 흔들기에 가장 좋은 계책은, 9의 진실에 1의 거짓을 섞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제 사미온의 대응을 지켜보려 합니다.”

베르사는 마치 ‘모든 것’을 철저히 다 밝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것들을 밝혔다.

그러나 ‘사미온’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희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다고 믿을 것입니다. 더욱 방심할 것이고, 언젠가 허점이 드러날 거예요.”

“…….”

“저는 빈첸이 틸로반의 결계를 부수고 흑마법을 잘라내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약 틸로반이 정말로 완숙한 경지의 흑마법사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9급 생도의 검에 베어질 만큼, 그들의 방법은 조잡했다.

방심하게 되면 더욱 조악해질 것이었다.

“이는 빈첸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부인이 빈첸에게 도움을 얻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가?”

“네. 제가 14년 동안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었죠.”

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칸이 입을 열었다.

“부인이 자식을 칭찬하는 것은 처음 보는군.”

* * *

아덴카에게 초청되어 공식발표에 함께하게 된, 바람소리의 수석기자 마리아는 즐거웠다.

그녀는 마침 베르사와의 단독 인터뷰를 끝내고 나온 참이었다.

‘무려 베르사 부인의 단독 인터뷰도 땄어. 이건 완전 특종이라고!’

아덴카의 중심부.

이곳 본가에는 특별히 허가받은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다.

이곳에 초청받은 김에 할 수 있는 취재는 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 당신은 둘란 신관님 아니신가요?”

그녀는 또 특종의 냄새를 맡았다.

“아덴카에서 흑마법 판별을 위하여 신전에 파견요청을 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둘란 신관님일 줄이야!”

둘란 신관.

그는 이제 대외적으로도 2급 신관이었다.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가이아 신전에서 미는 차세대 대신관 후보들 중 하나였다.

그는 다른 후보들을 압도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가진 자로 유명했다.

둘란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면서도 약간은 불편한 듯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 저,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을 내밀었다.

“바람소리의 마리아 기자입니다.”

“……아! 당신이군요.”

둘란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리아는 그것이 조금 의아했다.

“저를 아시나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심장이 요동쳤다.

‘나, 나 유명인 됐어?’

소식지 기자들 사이에서야 유명해졌다지만, 소식지와 관련 없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알아볼 줄이야.

‘무려 2급 신관이 날 알아본 거야!’

후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빈첸 공자와 친분이 깊다 들었습니다.”

“독점적으로 계약을 맺은 사람이긴 하죠.”

“혹시 인터뷰가 필요합니까?”

신관들은 인터뷰에 잘 응해주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은 특권계층이고,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니까.

이처럼 먼저 인터뷰를 제안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인터뷰를 해주시나요?”

“물론이죠.”

둘란이 빙그레 웃었다.

“빈첸 공자의 친구이면, 저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바, 방금 말씀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겨도 될까요?”

“물론이죠.”

마리아의 손이 바빠졌다.

“다, 다시 한번만 말씀해주세요. 녹음이 필요합니다.”

급한 마음에 말을 꺼낸 마리아는 아차 싶었다.

2급 신관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게 했다.

이건 분명한 무례였다.

‘바, 바보야! 마음만 앞서서는!’

그런데 둘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빈첸 공자의 친구이면, 저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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