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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65화 (65/184)

환생의 정석 65화

베르사는 빈첸의 말을 듣고 기감을 밑으로 향하여 흩뿌려보았다.

‘놀라운 일이군.’

베르사 본인이 느끼지 못하고 있던 것을 빈첸이 이미 느끼고 있었다.

심상이 없는 마나의 효용에 대해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베르사가 말했다.

“내가 이곳에 있기에, 너는 틸로반의 목을 베겠다고 말하였다.”

빈첸의 말을 모두 듣기 전에는 의례적인 말로만 생각했다.

베르사 자신을 높여주고, 빈첸은 빈첸 나름의 포부를 말하는 거라 판단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느냐?”

“한 번의 강맹한 공격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틸로반이 산송장 상태여도, 지금의 빈첸으로서는 항거할 수 없는 괴력을 낼 수 있다.

빈첸은 그렇게 봤다.

“그것을 막아주십시오.”

“그거면 되겠느냐?”

베르사는 더 말하고 싶었다.

‘내가 한 번의 공격을 막아준다고 하여, 네가 아덴카 장로를 벨 수 있겠느냐?’

그렇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빈첸이 분명 스스로 베겠다고 약조하였고, 무인이라면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네 부탁을 들어줄 테니 약속을 지켜 보이거라.”

빈첸은 홍련을 꺼내 들었다.

홍련에는 어느덧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보인다.’

기감으로 느꼈고.

이제는 눈으로 보고 있다.

이 뒤틀린 마나 흐름을.

‘흑마법의 결계.’

네디아가 남겨준 검술은 사미온을 넘어서기 위하여 고안된 검이지만, 모든 이능을 베는 힘을 지녔다.

그녀의 검은 마법을 베었고, 기적을 베었다.

그래서 이능검격이라 불렸다.

‘비교적 조잡한 느낌이군.’

이 또한 현대무학의 폐해이리라.

대다수의 무인들이 ‘심상이론이 배제된’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에 흑마법의 결계 수준이 생각보다는 조악했다.

어차피 현대무인들은 못 느낄 테니까.

그러나 빈첸은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점이 마력 운용의 핵이다.’

하나의 점이 보였다.

그 점이 바로 이능검격의 검로.

점을 찌르려는 순간,

빈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점이 움직여?’

틸로반 장로는 확실히 신중한 자가 맞는 듯했다.

과거와 비교해서는 꽤 허술한 결계이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해놓은 모양이었다.

빈첸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내 검을 내리꽂았다.

‘찌른다.’

멀린이 가르쳐준 검은 정검이다.

화려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검.

그리고 또한 연환검이기도 했다.

뇌력거인의 미전류 특성을 검에 담았다.

베르사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미전류 특성?’

치직-!

푸른색 전류가 방 안 전체를 덮었다.

위력 자체는 강하지 않았으나 범위가 넓었다.

‘멀린 경이 흡족해하겠군.’

빈첸이 결계를 찌르자, 바닥 밑으로 어두운 공간이 생성되었다.

빈첸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머니. 부탁드립니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대검이 쑤욱- 튀어 올라왔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휘어졌다.

빈첸을 향해 채찍처럼 쏘아졌다.

그리고 그 검을, 베르사가 맨손으로 잡아냈다.

‘어머니?’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했던 빈첸도 깜짝 놀랐다.

‘맨손으로?’

딱히 마나를 운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틸로반의 검 따위는 베르사의 손에 생채기조차 낼 수 없는 듯했다.

빈첸은 그 광경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또한 격의 차이인가.’

과연 아덴카를 다스리는 두 번째 왕이었다.

베르사는 그 상태로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검날은 베르사의 손바닥을 파고들지 못했다.

댕겅!

검날은 이내 베르사의 힘에 부러지고 말았다.

베르사는 무심한 듯 부러진 검날을 구석에 던졌다.

그러고서 눈동자를 뒤로 돌려 빈첸을 힐끗 쳐다보았다.

“네 부탁은 들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더 이상의 강맹한 공격은 없을 것이다.

방금의 공격으로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다.

채찍처럼 움직였던 검은 이미 생기를 잃었고, 찢어진 결계 안쪽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힘은 희미했다.

빈첸이 말했다.

“신중한 자는 자신이 준비한 패를 모두 잃었을 때 오히려 깊이 포기하는 법이지요.”

이내, 어둠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틸로반 장로였다.

온몸이 비쩍 곯아 갈비뼈가 훤히 드러났고 머리카락이 거의 없었다.

두 눈이 퀭하여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빈첸이 아닌 베르사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베르사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서 말했다.

“칠 공자가 너를 벤다 하였으니, 나는 너를 베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틸로반 장로의 눈빛에 생기가 조금 깃들었다.

희망을 본 것 같았다.

‘역겹구나. 너 같은 자가 어찌 이 아덴카의 장로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

틸로반이 말했다.

“빈첸. 나를 베어 보아라.”

틸로반은 앙상해진 팔로 얇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 검에는 희미하지만 검기가 서려 있었다.

빈첸은 틸로반과 마주하고 섰다.

“왜 아덴카 장로의 검에서 적황미력의 힘이 느껴집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적황미력이 무엇인지는 아느냐?”

“압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쩌면 현시대의 사미온들보다 더욱 잘 알고 있다.

“제게 폭발 테러를 가했던 자에게서도 적황미력의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그와 같은 기운입니다.”

“적황미력은 특유의 붉은 기운을 가진다. 네 눈에는 나의 기운이 붉은 기운으로 보이느냐?”

“그러니 더욱 역겹습니다.”

차라리 대놓고 적황미력이면 괜찮을 뻔했다.

본질적으로 사미온의 힘인데, 사미온의 힘을 가리고 있다.

“그 힘은 가짜 모조품이니.”

사미온에서 나고 자랐고, 평생 사미온을 극복하기 위해 살았다.

사미온의 기운에 누구보다 예민한 빈첸이다.

빈첸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덴카의 검에 무엇이 부족하여 사미온의 힘을 탐낸단 말입니까?”

그것도 가짜로 만들어진 저 기운을.

‘아슬란이 남겨준 검이 무엇이 부족하여!’

아덴카는 아슬란이 빈첸을 위하여 안배해 준 가문이다.

언젠가 진실을 찾으라는 사명을 남겼다.

빈첸은 멀린 페일커로부터 그 가문의 검을 배웠다.

배워보니 알 수 있었다.

아덴카의 검은 결코 사미온의 검에 뒤지지 않았다.

“귀하는 아덴카의 장로였었습니다만. 이제는 아닐 것이다.”

사미온과 결탁하였고, 흑마법을 사용하였다.

빈첸은 더 이상 틸로반을 존중하지 않았다.

반말로 물었다.

“왜 나를 죽이려 했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나는 네게 적법한 절차를 거쳐 임무를 내렸을 뿐이다.”

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런 걸로 하지.”

사실관계나 논리적인 구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련의 상황은 살왕 세르쿤이 행동으로 공증하였으며, 붉은 요새의 수장 헤르카 경이 관여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는 아덴카의 안주인이 함께하신다. 그들이 나의 행동을 공증할 것이다.”

빈첸은 허리를 살짝 숙였다.

‘설인 걸음.’

가까이 다가가,

정직하게 검을 휘둘렀다.

좌에서 우.

아덴카 정검 기본 1식.

반월 베기.

홍련에 미세한 마나가 실렸다.

그것은 검기는 아니었다.

푸른빛을 내는 어떤 기운이었다.

베르사가 눈을 크게 떴다.

‘적황미력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힘?’

심상이론의 도움 없이 운용하는 마나.

그를 통해 펼치는 아덴카의 검식.

그것이 지금의 저 힘을 만들어냈다.

‘틸로반과는 그 힘의 격이 다르구나.’

물론 마나의 양이나 실전 경험 등에서 빈첸은 틸로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무인들 간의 전쟁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격의 차이다.

그렇기에 아덴카 직계들이 치르는 공식적인 첫 시험이 ‘붉은 악귀’를 토벌하는 것이기도 했고.

빈첸의 검과 틸로반의 검이 맞부딪쳤다.

스윽-

빈첸의 검이 틸로반의 검을 베었다.

용골과 뇌기를 머금은 홍련은, 빈첸의 마나를 더욱 예리하게 바꾸어 주었다.

틸로반의 검은 마치 종이처럼 잘려나갔다.

아덴카 정검 기본 2식.

깊게 찌르기.

‘이것이 아슬란이 남긴 검.’

빈첸이 검을 내질렀다.

빈첸의 동작은 단순했다.

한 번 베었고, 한 번 찔렀다.

‘아덴카의 검은, 사미온의 검에 뒤지지 않는다.’

아슬란이 남긴 검은 그러했다.

그가 아덴카를 통해 빈첸에게 남겨준 힘은 사미온을 대적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검이었다.

푸욱!

틸로반 장로의 심장에 홍련이 꽂혔다.

“우웩!”

틸로반은 피를 토해냈다.

털썩! 쓰러졌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빈첸도 그것에 동의했다.

‘당연히 말이 안 되지.’

틸로반이 아무리 산송장 상태여도.

아무리 흑마법으로 온몸을 혹사시켜놨다고 해도.

겨우 이 정도 공격에 완전히 무너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둔 것처럼 연기하고 있었다.

“내, 내가…… 어, 어찌……!”

빈첸은 틸로반 앞에 섰다.

“어머니께 드린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다, 닥쳐라!”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베르사는 틸로반 장로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게 끝이 아니란다, 빈첸.’

틸로반에게는 분명 속셈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빈첸의 검로가 조금 이상했다.

빈첸에게도 속셈이 있는 듯했다.

‘틸로반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군.’

틸로반의 목이 아니라 그 주변의 무언가를 베었다.

서걱-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베어냈다.

베르사는 빈첸이 또 빈첸만의 특별한 검로로, 어떠한 이능을 베어냈다는 것을 짐작했다.

틸로반이 울컥! 또다시 피를 쏟아냈다.

“젠장!!!”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몸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발 끝.

손 끝.

모두 재가 되어 변해버리기 시작했다.

빈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시신마저 온전히 남기지 못하도록 처리한 모양입니다.”

“방금 무엇을 벤 것이냐?”

“이자와 연결되어 있던 흑마법의 끈을 잘라내었습니다.”

“흑마법의 끈?”

“이자는 신중하기 때문에 최후의 안배를 해놓았으리라 짐작하였습니다.”

베르사는 아까 빈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신중한 자는 자신이 준비한 패를 모두 잃었을 때 오히려 깊이 포기하는 법이지요.

결과적으로 틸로반에게는 ‘흑마법’이라는 하나의 패가 더 있었다.

빈첸은 그걸 알고 있었고.

“아까 했던 말은 틸로반을 방심시키려 했던 말이로구나.”

“예.”

“그렇다면 최후의 안배는 무엇이었겠느냐?”

“이곳에는 어머니께서 계시니…….”

틸로반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 역시 은밀한 도망이었다.

“죽음을 또다시 위장하려 했겠지요. 심장을 찔리고 목이 베인다면, 누구나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아마도 진짜 생명을 담은 핵을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것입니다.”

이 역시 흑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쉽게 당해준 것 같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보이는데.”

핵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핵과 연결된 흐름을 끊어냈다.

“온전한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수준 높은 흑마법사였다면 그 흐름이 보이지 않았겠지만, 틸로반은 그리 수준 높은 흑마법사는 아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 준비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이용당했다고 볼 수밖에요.”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빈첸의 눈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베르사의 손아귀를 향했다.

“아덴카의 장로를 누군가가 이용한 것입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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