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64화
칸은 유서를 받아들었지만 읽지는 않았다.
대신 베르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자결하였지?”
“심장을 찔렀어요.”
“그렇군.”
칸은 틸로반의 유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빈첸이 이 상황을 어찌 바라보는지 궁금해졌다.
“빈첸. 너는 어찌 보느냐?”
“그 정도로 명예를 아는 자였다면 제게 위해를 가하려 이런 짓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베르사의 눈꼬리가 살짝 휘었다.
이번에는 베르사가 빈첸에게 물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이지?”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자결 당했거나, 하나는 가짜로 자결했거나.”
두 가지 가정을 세우는 것은 율리안이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빈첸은 알 수 있었다.
“저는 가짜 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제 가문의 장로원에 소속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제 가문의 장로가, 제 가문 안에서 타인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르사가 가볍게 웃었다.
“이 아이를 데리고 잠시 현장에 들러도 될까요?”
“부인의 소관이오.”
“잠시 빌리겠습니다.”
베르사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너라.”
빈첸은 칸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 베르사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장로원은 아덴카 가문 내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동관문을 여러 차례 이용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
장로원은 어지간한 규모의 가문 만큼이나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저곳이 틸로반이 머물던 곳이다.”
빈첸은 베르사와 함께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조용하군요.”
자살이든 타살이든.
어쨌든 장로 하나가 죽었는데 건물 안은 상당히 조용했다.
‘한 사람의 죽음 정도로 호들갑을 떨 곳은 아니라는 뜻인가.’
틸로반 장로가 기거하던 곳은 3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방 앞에 섰다.
“너무 놀라지는 말거라.”
빈첸은 아직 열넷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열넷에 사람의 시신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아무리 무가(武家)의 사람이라고 해도.
“걱정 마십시오.”
베르사가 문을 열었다.
베르사의 명령 때문인지, 현장은 아직 온전히 보존된 상태였다.
베르사는 곁눈질로 빈첸의 상태를 살폈다.
‘볼수록 참 신기하구나.’
마치 인간의 시신을 여러 번 본 아이 같았다.
익숙해지다 못해 권태로운 수준의 눈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빈첸의 태도는 무인으로 지극히 바람직스럽기는 했으나, 보여주기 쉽지 않은 태도였다.
“어떻게 보느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찌른 듯하군요.”
빈첸은 시신 앞에 섰다.
시신을 보자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가짜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덴카 장로의 명예조차 모르는 자인데, 솜씨가 지나치게 깔끔합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듯한 흔적입니다.”
빈첸은 자결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자신의 심장을 찔러 죽은 사람의 시신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강단 있는 무인들도…… 이처럼 깔끔하지 못했다. 하물며 틸로반 같이 명예롭지 못한 자가 이런 검흔을 보여줄 리 없지.’
검의 흔적은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아무리 떠나고 싶었던 사람이어도, 제아무리 죽기를 갈망했던 사람이어도, 검의 흔적에는 망설임이 남는다.
그것은 빈첸 스스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려 했던 데이븐조차도, 마지막 순간에는 삶을 갈망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깨닫는 것이 있다.
틸로반 장로의 검에는 ‘마지막의 마지막’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느냐?”
베르사의 눈으로 보기에 이것은 명백히 틸로반의 시신이었다.
“시간을 잠시만 허락하여 주십시오.”
빈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물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어떻게 다 알겠느냐?’
-하도 당당하게 말하길래 다 아는 줄 알았죠.
율리안의 황당해하는 진심이 빈첸에게 정확히 전해졌다.
‘뭘 새삼스럽게 황당해하느냐?’
-아니,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당당했어요?
‘내가 영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으면 네가 진작에 말렸겠지. 안 말린 거 보니까 뭔가 생각이 있었던 거 아니냐?’
-끄응. 뭔가 짜증 나.
‘말해봐라.’
-흑마법에 저런 계통의 마법이 있어요.
‘역시 넌 알 줄 알았다.’
-…….
사실 율리안은 저 시신이 가짜인 줄은 몰랐다.
그에게는 뛰어난 이론과 지식이 있었지만, 빈첸만큼은 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율리안 스스로 ‘저것은 가짜다’라고 판단할 눈은 없었다.
그러나 빈첸이 ‘저것은 가짜다’라고 정의해 주는 순간,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제시할 수는 있었다.
그것이 율리안과 빈첸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흑마법에 이러한 계통의 속임수가 있습니다.”
“흑마법? 아덴카의 장로가 흑마법에 손을 댔단 말이냐?”
순간,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마나 전체가 웅웅- 울렸다.
베르사의 의지와 공명하여 마나가 진동했다.
빈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과연…… 거인이라 불렸던 여인답구나.’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그 격은 과거에 못지않은 듯했다.
“어머니께서는 흑마법의 흔적을 읽지 못하셨습니까?”
“읽지 못했다.”
무인들은 그 실력의 고하와는 관계없이 대체로 흑마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아예 다른 영역의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무인들이 마법 이론을 모르고, 마법사들인 심상 이론을 모르는 것과 같았다.
“어머니께서 흑마법을 전혀 공부하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최소한의 냄새는 남기 마련입니다.”
보통의 흑마법은 더러운 냄새를 남긴다.
다른 것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구동하는 마법이어서 그렇다.
“어머니께서 느끼시지 못할 정도라면 상당히 고도화된 흑마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틸로반 장로는 뛰어난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속일 수 있을 정도의 흑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생명을 소모하여야만 했을 것입니다.”
“확신하느냐?”
“예.”
베르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빈첸에게 ‘흑마법의 흔적을 전혀 읽지 못했다’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사실은 아니었다.
베르사는 빈첸과 같은 것을 보았고,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내 짐작이 맞구나.’
베르사가 본 빈첸은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기감과 상황을 읽어내는 눈이 탁월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눈을 가졌다.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알았느냐?”
빈첸 대신 율리안이 크게 긴장했다.
-어머니는 지금 형님을 시험하고 계신 거예요. 지금 어머니한테 중요한 건, 저까짓 시체 따위가 아니란 뜻이에요.
저번에 베르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는 했으나, 율리안은 여전히 베르사가 두려웠다.
-절대 거짓말은 안 돼요. 거짓이 아니면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빈첸은 율리안의 말을 무시한 채 대답했다.
“보입니다.”
“보인다?”
베르사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좋은 대답이구나.”
단순히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이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빈첸은 자신의 ‘직관’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좋은 것을 타고났으니, 노력으로 완성하여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확신의 근거가 또 있느냐?”
“물론입니다.”
빈첸은 베르사에게 반쯤 사실을 털어놓았다.
“저는 심상을 익히지 않은 순수한 마나를 체내에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수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합니다. 남들은 저를 읽을 수 없는데, 저는 남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
“별로 의아해하지 않으시는군요.”
현대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런데 베르사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했다.
마치 빈첸 말고도 이러한 사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구나.”
“믿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이 흑마법의 명칭도 알겠느냐?”
빈첸이 물었다.
‘얼른. 흑마법의 명칭이 뭐야?’
-시신 복기술일 거예요. 본인의 피와 살을 제물로 바치고 술식의 재료가 되는 제물들을…….
“시신 복기술입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율리안은, 할 수만 있다면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이 시대의 무인들은 흑마법 같은 걸 공부 안 한다고요! 괜히 공부했다는 소문이 알려지면 안 좋아요.
사실 빈첸으로서는 의아한 부분이었다.
흑마법을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왜 공부는 하지 않는단 말인가.
‘적에 대한 공부나 이해 없이, 어떻게 적을 무너뜨린단 말이냐?’
-시대가 그렇다고요…….
율리안은 베르사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베르사에게 거짓을 말하는 순간 간파당한다.
그것은 율리안에게 있어서 끔찍한 일이었다.
율리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어떻게 설명을 해야 깔끔할지, 그가 아는 모든 지식과 논리를 동원했다.
그러나 빈첸은 그런 고뇌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말이냐?”
“자주 받는 편입니다. 그분께서는 흑마법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주시더군요.”
과거, 빈첸과의 첫 만남을 통해 계시를 받는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계시가 자주 지속되는 줄은 몰랐다.
흥미가 일었다.
“지금도 계시가 들리느냐? 들린다면 신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냐?”
빈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화의 맥락상 어색한 침묵이었다.
‘뭐해, 얼른 계시 내려줘라.’
-하아…….
빈첸은 율리안이 베르사 앞에서 굳지 않기를 바랐다.
두려움을 한 번 극복했으니, 두 번도 극복할 수 있다.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세 번이 네 번이 되면,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시신 복기술에 대해서 알려줄게요.
“마침 시신 복기술에 대한 계시를 내려주셨습니다.”
빈첸은 율리안에게 들은 대로 시신 복기술에 대해 설명했고, 베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사의 ‘진실을 판별하는 눈’으로 본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
“이토록 자세한 계시가 내린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린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앞으로도 함구하거라. 알려져서 이로울 것이 없으니.”
그 말은 곧 베르사도 비밀에 부쳐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감사합니다.”
빈첸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제안했다.
“어머니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틸로반의 목을 베겠습니다.”
“네가?”
베르사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가 본신의 힘을 소모하여 시신 복기술을 펼쳤다 해도 아덴카의 장로였다.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어머니께서 계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르사까지 속이기 위한 가짜 시신을 만들었다.
어지간한 생명력 소모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거의 산송장 상태에 가까울 것이었다.
“저는 그가 혼자만의 힘으로 이런 도박을 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련의 사건으로 보면 그랬다.
그자는 함정에 함정에 함정을 팠고, 지나치리만큼 신중했다.
그러한 자가 믿는 것도 없이 이런 도박을 했을 리는 없다.
“분명 조력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있었다?”
‘있었다’는 과거형이었다.
베르사는 빈첸과의 대화가 진심으로 즐거웠다.
베르사가 보고 있는 것들을, 빈첸이 모두 보고 있었다.
겨우 열넷에 불과한 이 아이가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버려졌겠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명예롭지도 않고, 더 이상 아덴카의 장로가 아니어서 이용가치가 없는데, 흑마법 사용의 전적이 있어 데리고 있기 부담스러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베르사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래서?”
“틸로반 장로는 조력자를 굳게 믿고 때를 보았을 것입니다.”
산송장 같은 상태로 아덴카의 경비를 뚫고 도망칠 수는 없다.
“그렇다는 말은.”
“그는 아직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숨어 있습니다.”
신중한 자는 더 신중한 자의 덫에 걸리기 마련이다.
틸로반의 꼴이 딱 그랬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빈첸은 하나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현대 무인들은 느끼지 못하는 기운.’
감추려 하고 있으나 500년 전의 시대를 살았던 빈첸에게는 더없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기운.
심상이론의 도움 없이, 스스로 운용하는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바로 이곳.
바닥 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