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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63화 (63/184)

환생의 정석 63화

‘적인가?’

빈첸은 순간 당황했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세르쿤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세르쿤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당신이 세르쿤 집사?”

“맞습니다, 헤르카 경.”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헤르카였다.

빈첸과 레이븐은 생도였고, 붉은 요새의 총책임자에게 경례했다.

헤르카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녀의 오른손에 무엇인가가 올려져 있었다.

‘뭐지?’

작은 상자였다.

“케이크가 요즘 제철이래서.”

“케이크에 제철이 있습니까?”

“어. 있어.”

헤르카는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와 상자를 건네주었다.

“나중에 먹어. 엄청 맛있다. 아, 그리고 빈첸. 세르쿤 집사가 잘라온 머리 좀 보여줄래?”

“여기 있습니다.”

빈첸이 마법가공된 천을 내밀었다.

천 안에는 시꺼멓게 변해버린 고블린의 머리와 세르쿤이 잘라온 머리가 담겨 있었다.

“아는 얼굴인가요?”

“당연히 모르는 얼굴이지.”

헤르카는 킥킥 웃다가 천을 다시 감싸서 빈첸에게 넘겨주었다.

천을 받아든 빈첸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말했잖아. 케이크 먹으러 왔다고.”

“…….”

“아무튼 나는 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제 말이요?”

“가문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말.”

“그 말은, 오늘의 사건에 대하여 헤르카 경께서도 공증해 주신다는 의미입니까?”

“미쳤냐?”

헤르카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난 그런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야.”

손가락으로 세르쿤을 가리켰다.

“세르쿤 집사가 행동으로 공증했으니 나는 빠질 거야. 어우, 상대가 장로원 영감탱이들이라니.”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난 세상에서 걔네가 제일 싫어. 오늘도 봐. 아주 구린내가 진동을 하지?”

“구린내가 진동한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폭탄 테러. 테이머 매수. 변이 고블린. 가짜로 모습을 드러낸 상급 무인. 이 모두를 아우르는 숨겨진 배후. 9급 생도한테 주어진 임무치고 너무 가혹하잖아? 세르쿤 집사는 어떻게 생각해?”

“저에게는 임무를 평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레이븐 공자의 집사일 뿐이니까요.”

헤르카가 빈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장로원 그 늙은이들이 얼마나 약삭빠른 할배들인데 아무것도 몰랐겠어? 잘 파헤쳐봐.”

“장로원에서 꾸민 짓이라는 건가요?”

“그건 나도 모르지. 너한테 직접 임무를 내린 틸로반 알지?”

“예.”

“친선교류회 때 카곤을 수행했던 장로도 기억나?”

“예. 홀리만 장로라고 알고 있습니다.”

허리를 살짝 숙이고 빈첸의 귀에 속삭였다.

“그 둘이 친구다? 참 공교롭다, 그치?”

* * *

바르곤에게 서신 한 통이 전달되었다.

[성실한 바르곤 경, 바르곤 경이 힘들까 봐 내가 빈첸의 임무 완료 인정했어. 빈첸의 임무수행에 대해서는 신경 안 써도 돼. 그럼 수고! 아참, 빈첸은 일이 있어서 아덴카로 복귀시켰다? 나는 총책임자니까 그래도 되지?]

서신을 받아든 바르곤의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헤르카 경……!”

헤르카는 현재 휴가 중이다.

다시 말해, 붉은 요새 총책임자로서의 권한은 일시 정지된 상태다.

그 상태에서 총책임자로서의 권한을 사용했으니, 행정적으로 일이 꼬여 버린다.

경위서를 작성하고 서고에 보관해야 할 뿐만 아니라 행정 관리인들과 조율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르곤의 일이었다.

서신을 든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야근이 싫단 말입니다!”

자세한 건 임무 보고서가 올라와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헤르카 경은 나서서 일하지 않는 타입인데.’

왜 굳이 그곳을 찾아갔을까.

고민이 깊어가던 찰나, 또 다른 서신이 전달되었다.

발신자는 빈첸이었다.

[임무 완료 보고 - 변이 고블린 건에 관하여.]

네 페이지에 달하는 임무 완료 보고서였다.

바르곤의 눈에 애정이 듬뿍 담기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부터 과정과 결과까지. 완벽하다.’

흠잡을 데 없는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만 있으면 경위서를 만드는 데 몇 분 걸리지 않을 듯했다.

‘빈첸이 이렇게 달필이었나?’

기껏 임무는 잘 수행해놓고 보고서를 엉망으로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마법사로서, 엘리트 집단에 속한 바르곤은 무인들의 보고서를 읽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러나 빈첸의 보고서는 남달랐다.

마치 기록의 명가 ‘아스달가’의 자제 같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고서 작성은 율리안의 도움을 받았다.

‘그나저나 흥미롭군.’

바르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내용을 보아하니, 이건 9급 생도에게 지정될 수준의 임무가 아니었다.

빈첸이 아덴카로 복귀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 * *

오랜만에 가문에 복귀한 빈첸은 곧바로 시종장 레일사를 찾았다.

“고마워, 레일사.”

“무엇을 말입니까?”

“스승님을 움직여준 사람이 시종장이라고 들었어.”

“멀린이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레일사는 빈첸을 향해 별다른 호감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데.”

“가주께서는 잠시 부재중이십니다. 늦어도 모레까지는 복귀하실 겁니다.”

“그렇군.”

빈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일사. 부탁이 있는데.”

“사적인 부탁은 거절하겠습니다.”

“흑마법과 관련된 거야. 어쩌면 장로원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

레일사는 평온한 모습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기감을 넓게 퍼뜨려 혹시 엿들은 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따라오십시오.”

빈첸은 레일사를 따라 걸었다.

레일사의 방은 호화스럽지 않았다.

낡은 나무 침대와 옷장이 전부인 작은 방이었다.

“방금 공자님은 위험한 발언을 하셨습니다.”

흑마법과 장로원이 연관되어 있다니.

확실한 증거 없이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

“장로원에서 물고 늘어지면, 공자님께도 피해가 클 것입니다.”

“걱정해 주는 거야?”

“아닙니다. 현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빈첸은 아공간을 열어 머리를 감싼 천을 꺼내 들었다.

“아공간도 다룰 수 있게 되셨군요.”

“시종장이 좋은 스승님을 추천해 주었으니까.”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려던 레일사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이것이 공자님께 임무로 주어졌던 변이고블린의 머리입니까?”

“응.”

빈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내 임무 내용을 알고 있네?’

평소 관심이 없다면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이건 레일사가 굳이 찾아보았다는 얘기다.

“무척이나 특이하군요. 무엇인가가 머리를 비집고 새어 나온 듯한 형태입니다.”

“맞아. 포식이 튀어나왔어.”

“포식이 무엇입니까?”

“흑마법사들이 이계의 권능이라 부르는 것. 생명체와 마나를 잡아먹어. 나도 죽을 뻔했고.”

빈첸은 상의를 벗어 등을 보여주었다.

포션을 사용하여 상처를 회복하기는 했으나, 흉터는 여전했다.

등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레일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렇다면 그 포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라졌다고 가르쳐주더라.”

“누가 말입니까?”

빈첸은 또 다른 천을 꺼냈다.

“여기.”

날카로운 단면이 눈에 들어왔다.

척 보아하니 꽤 단련된 무인의 머리였다.

“세르쿤. 그자의 솜씨겠군요.”

“맞아.”

레일사도 이번 임무가 예삿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과거, 살왕이라 불리던 남자가 직접 움직였다.

그는 레이븐 공자의 안위 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다.

“누군가 변이 고블린에게 흑마법을 불어넣었어. 그리고 함정을 팠지. 공교롭게도 한 장로가 나를 직접 지목해서 임무에 투입시켰거든.”

“그것이 장로의 잘못입니까?”

거기까지 말한 레일사가 다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생각을 깊이 하십시오.”

장로를 저격하는 말은 위험하다.

빈첸은 지지기반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햇병아리 후계자 후보일 뿐이다.

빈첸의 말은, 자칫 잘못하면 장로원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일부러 함정을 판 것이라면 내가 직접 장로의 목을 벨 것이고.”

“…….”

레일사는 아무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저질러 버렸다.

“……그게 아니라면 어쩌실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장로원의 업무능력을 질책해야겠지.”

“…….”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9급 생도에게 그런 임무를 내렸으니까.”

레일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 쪽이든, 명분은 빈첸 공자님에게 있군요.’

그러나 세상은 명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덴카 내에서 장로원의 힘은 막강하다.

칸이 아덴카의 절대적인 무력을 상징한다면, 장로원은 무력을 제외한 모든 것을 대변한다.

‘명분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내게 일어난 폭탄 테러에서 사미온의 기운이 느껴졌어.”

“…….”

레일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와의 만남을 주선하겠습니다.”

그날 밤,

레일사는 빈첸의 방을 찾았다.

“바르십시오.”

그녀의 손에는 포션이 들려 있었다.

“흉터가 나을 것입니다.”

빈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구하기 힘들기로 소문 난 1급 신관의 포션이었다.

* * *

이틀 뒤.

빈첸은 레일사의 주선을 통해 칸과 만날 수 있었다.

빈첸은 바르곤에게 보냈던 똑같은 내용의 임무 보고서를 칸에게 보여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첫 번째 가정입니다. 이번 임무가 계획적으로 저를 함정에 빠뜨린 임무라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느냐?”

그게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면, 칸은 빈첸에게 실망할 것이었다.

“문제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빈첸은 임무를 수행했고, 그 결과 칸과 마주하고 있었다.

“다만, 임무 수행 과정에서 저는 사미온의 힘을 감지하였습니다.”

“…….”

“아덴카의 장로가, 아덴카의 힘으로, 아덴카의 후계자를 검증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덴카의 장로가 사미온의 힘을 빌어와 저를 검증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칸은 만족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두 번째 가정은 무엇이냐?”

“이번 사건과 관련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가정에서는 ‘비겁한 악의’를.

두 번째 가정에서는 ‘무능함’을 짚었다.

“틸로반 장로와 홀리만 장로가 친분이 깊다 하더군요.”

“그건 누가 가르쳐줬지?”

“헤르카 경입니다.”

“그렇군.”

헤르카라는 이름이 나오자 칸은 모든 것을 납득한 듯했다.

빈첸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네 두 가지 가정이 타당성이 있구나.”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느냐?”

지금껏 숨죽이며 듣고 있던 율리안이 아악! 하고 감격한 비명성을 토해냈다.

율리안은 무척 흥분했다.

-저희를 저만큼이나 인정하시는 거라고요!

단순히 보고를 올리고 끝이 아니었다.

나아가, 보고에 대한 판단까지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별거 아니었지만 율리안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머리로는 후자였으면 합니다.”

악의를 가진 것보다는 무능한 것이 낫다.

“어째서지?”

“제 가문의 장로들이 비겁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덴카의 안주인 베르사였다.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가주.”

그녀가 말했다.

“틸로반 장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것은 유서입니다.”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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