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62화
“나의 기척까지도 읽어냈단 말이냐?”
갈대숲 사이로 가면을 쓴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빈첸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가짜? 마법 형상인가?”
“그것까지 알아차렸나?”
빈첸은 남자를 둘러싼 마나가 지나치게 인위적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탐색특성 같은 것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남자는 마법으로 구현한 가짜였다.
“테이머 혼자서 이런 갈대밭을 구성하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빈첸은 남자를 응시했다.
“네가 진짜 함정을 만든 자인가?”
“흐흐, 그렇다.”
빈첸은 한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
‘아덴카 장로원의 시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파악한 것들을 풀어 설명했다.
이것이 아덴카가(家) 차원에서 내린 시험이라면, 그 시험을 통과해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냐.’
마법형상이라 확실하지는 않았으나,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한 적의였다.
만약 상대가 시험관의 역할을 부여받았다면 적의를 가지고 있을 리는 없을 터.
빈첸이 물었다.
“왜 나를 노리지?”
“의뢰가 있었다.”
“의뢰?”
남자는 순순히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너를 죽여주면 1억 루덴을 준다고 하더군.”
빈첸은 피식 웃었다.
“단순한 이유군. 카르발은 네 동료였나?”
“그럴 리가. 그놈은 그저 내가 이용한 말에 불과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이유는?”
“어차피 너는 이곳에서 죽을 테니까.”
“그렇군.”
그 말을 끝으로 빈첸은 손에 들고 있던 천.
그러니까 고블린의 머리를 감쌌던 천을 집어 던졌다.
은은한 마나를 실었다.
가면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남자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뭐 하는 짓이지?”
천의 매듭이 풀리고, 구멍 난 고블린의 머리가 떼굴떼굴 굴러 남자의 발에 닿았다.
“선물이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고블린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 발악 같은, 뭐 그런 건가?”
“기껏 선물을 줬잖아. 좀 기뻐해 주면 좋겠는데.”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막 발악치고는 별 재미가 없군.”
그는 주변의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나뭇가지를 둘러싸고 붉은 기운이 피어올라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레이븐도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검기?’
눈에 보이는 검기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최소 5성 이상의 경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실체’가 아니라 ‘마법 형상’이었다.
본신의 실력을 완벽히 재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준비할 시간은 충분히 주마. 둘이서 함께 덤벼도 좋다.”
나뭇가지에 검기를 두른 괴인이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여유로웠다.
빈첸이 괴인을 향해 홍련을 겨눈 채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다.”
“그래. 마지막이 될 테니 신중히 물어봐.”
“너도 함정에 빠진 주제에, 왜 아무것도 모르지?”
그와 동시에,
그의 왼손에 들려 있던 고블린의 머리에서 질긴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길어졌다.
“윽?”
머리카락이 괴인의 몸을 둘러쌌다.
비명 소리가 점차 사라지며, 괴인의 몸도 없어져 버렸다.
괴인을 둘러쌌던 머리카락이 절로 솟아올라 연기처럼 변해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마치 거대한 유령 같았다.
빈첸은 몸을 돌려 레이븐을 안았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이-
그것은 마치 귀곡성 같았다.
레이븐은 당황한 듯 말했다.
“뭐 하는 짓이냐?”
“눈 감고 가만히 있어.”
이상한 상황과 납득하기 어려운 요구였지만 레이븐의 행동과 대답은 빨랐다.
“어. 알았어.”
빈첸은 마나를 극도로 활성화시켰다.
빈첸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졌다.
레이븐에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소리도 내지 말고. 숨도 쉬지 마.’
‘어. 알았어.’
레이븐은 빈첸의 뒤로 무엇인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눈을 감고 있어 보이지 않았으나 목덜미의 솜털이 오소소- 일어섰다.
‘뭐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끔찍한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불길함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떠도 된다.”
빈첸이 레이븐에게서 떨어졌다.
레이븐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야?”
방금까지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갈대숲은 사라졌다.
남자도 없어졌다.
대신, 수많은 시체와 뼈들이 널려 있었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땅이었다.
‘죽어버린 땅.’
빈첸은 시꺼멓게 변해버린 고블린의 머리를 다시 주워들었다.
“방금 튀어나온 그건 뭐였지?”
“7개의 점을 가진 변이 고블린의 몸에 잠들어 있던 [포식]이다.”
과거에도 이 고블린을 만났었다.
7개의 점을 가진 이 변이 고블린의 육체가 생명을 잃으면, ‘포식의 권능’이 깨어난다.
고블린에게 ‘포식’을 부여한 주체.
“포식? 그게 뭐지?”
“나도 정확한 건 몰라. 다만 흑마법사들은 이계의 권능이라 부르더군.”
먼발치서 지켜보고만 있던 세르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흥미롭군요. 저도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포식이 깨어났고, 마법 형상을 집어삼켰습니다.”
“저도 보았습니다. 시꺼멓고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는 거대한 유령. 그것이 마법형상과 주변의 마법을 먹어치우더군요.”
먹어치웠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포식’과 맞닿은 모든 것들이 포식에게 잡아먹혔다.
마나도.
생명도.
세르쿤은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등 뒤에서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당신의 냄새를 맡는 것 같았습니다.”
세르쿤의 눈이 빈첸의 등에 닿았다.
빈첸의 등은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피부는 썩어 문드러졌고 진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꼴을 하고서도 이렇게 태연하다고?’
세르쿤이 보는 빈첸의 표정은 평온했다.
‘폭발 테러 때문에 몸도 정상이 아닐 텐데.’
그리고 문득,
레이븐에게 눈이 닿았다.
‘[포식]은 위험한 놈이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 것인가.
마물?
마물과는 느낌이 달랐다.
빈첸의 말대로 ‘이계의 권능’이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했다.
“모든 것을 잡아먹는다던 [포식]이 당신을 잡아먹지는 않더군요.”
“놈이 싫어하는 마나를 운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스승 네디아와 함께 수련했던 마나였다.
사미온을 부수기 위하여 창안된 마나.
‘포식’은 그 마나의 냄새를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 밑천을 다 가르쳐 달라는 건가요?”
세르쿤이 피식 웃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가르쳐주십시오. 어째서 그토록 무리했습니까?”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르쿤은 알고 있었다.
‘레이븐 공자 때문이군.’
레이븐을 지키기 위해서.
빈첸은 본인의 최선을 뛰어넘는 수준의 마나를 운용했다.
‘어째서?’
레이븐을 껴안고 보호하려 들지 않았더라면, 훨씬 적은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무리해서 마나를 운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세르쿤 집사님. 이토록 한가로이 구경을 하실 때가 아닌 듯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누군가 고블린에게 포식 술식을 새겨 넣어 함정을 팠습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세르쿤에게 중요한 건 그저 레이븐의 안위였다.
그 외에는 관심 없었다.
“그런데 그자는 아무것도 모르더군요. 오히려 카르발을 함정에 밀어 넣었다고 실실대기까지 했습니다. 그자를 조종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역시 저와는 상관이 없군요.”
“레이븐이 9급 생도로 남는 이상, 상관이 있겠지요.”
세르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레이븐과 빈첸은 9급 생도이고 함께 성장할 것이다.
빈첸이 위험에 빠지면 레이븐도 위험에 빠진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그래서, 빈첸 공자가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포식]을 쫓아야 합니다.”
“어째서죠?”
“가장 맛좋은 먹잇감을 쫓고 있을 테니까요.”
이곳에서 가장 맛좋은 먹잇감은 마법으로 이루어진 마법형상이었다.
무려 검기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마법형상.
“그자의 본체를 먹어치울 겁니다.”
그자는 마법형상이었다.
그자의 본체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고, 포식은 그자를 쫓고 있을 것이다.
“그자는 아무리 최소로 잡아도 5성 이상의 무인입니다. 그렇다는 말은, 그런 무인을 희생시킬 수 있는 수준의 강자. 또한 수준 높은 마법까지도 함께 구현시킬 수 있는 자.”
“…….”
“그자가 저를 노리면, 제 동료인 레이븐도 위험해지겠죠.”
지금 빈첸에게 필요한 건 살왕 세르쿤의 힘이었다.
“레이븐을 그러한 위험에 노출시키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러한 변수를 제거하시겠습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세르쿤이 사라져 있었다.
빈첸도 더 이상 말을 하지는 못했다.
‘또 기절하게 생겼군.’
멀어져가는 의식을 꽉 붙잡았다.
등에 치료포션을 듬뿍 바른 뒤 말했다.
“명상을 좀 해야겠어. 호법을 부탁한다, 레이븐.”
1회차 마력자전.
2회차 마력자전.
끊임없이 마력자전을 시키며 온몸 구석구석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빈첸이 눈을 떴을 때, 세르쿤이 돌아와 있었다.
늘 단정했던 세르쿤의 옷매무새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에 미세한 상처도 있었다.
“포식은 어떻게 됐죠?”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세르쿤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내밀었다.
사람의 머리였다.
레이븐은 움찔 놀랐으나 빈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가면을 쓰고 있던 자의 본체입니다.”
“살려서 데려올 수는 없었습니까?”
이자는 머리가 아니다.
이자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했다.
배후를 찾아내야 하는데 죽어버린 건 좀 아쉬운 일이었다.
“포식을 상대하면서 생포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더군요. 아는 얼굴입니까?”
“모릅니다.”
“그럼 아까 사미온은 왜 언급했죠?”
“테이머를 고용한 다음, 최소 5성 이상의 무인을 희생시키는 이중 함정을 팠습니다.”
그 함정조차 함정이었다.
다시 말해 ‘누군가’는 3중 함정을 팠다.
“이렇게 치밀한 함정을 팔 수 있는 자이면서 제게 원한을 가졌을 만한 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빈첸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친선교류회 당시, 카곤을 수행했던 사미온의 장로 홀리만.
“한 장로가 친선교류회 이후로 경질되었고 온갖 문책을 다 받았습니다. 패배의 책임을 물어서.”
패배는 카곤이 했는데 책임은 홀리만이 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는 그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극복해야 할 사미온이다.
사미온의 치졸함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임무가 직접 지목 임무라는 것입니다. 가문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이 좋겠군요.”
빈첸이 씨익 웃었다.
“저는 이 사건을 아덴카 장로회에 보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보고에 대한 공증인으로 세르쿤 집사님을 지목하겠습니다.”
“귀찮은 일은 거절하겠습니다.”
“그 대답이 공증이지요.”
“……무슨 뜻이죠?”
세르쿤은 레이븐의 안전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세르쿤이 직접 움직여주었다.
“설마 이자의 목을 제가 베었겠습니까? 척 봐도 저보다 훨씬 강한 무인인데.”
상처에는 검의 흔적이 남는다.
절단면은 더없이 깔끔했다.
“제 눈에는 살왕 세르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요.”
다른 말로 하자면,
“살왕이 직접 움직여주어야 할 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엮여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공증하여주셨지요.”
“…….”
“이 정도면 아덴카 차원에서도 꽤 주의 깊게 살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법이잖아? 세르쿤 집사가 한 방 먹었어.”
기감이 예민한 빈첸조차 전혀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