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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60화 (60/184)
  • 환생의 정석 60화

    빈첸은 풀숲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예상대로 일반 고블린보다 훨씬 컸다.

    “이게 변이 고블린의 발자국이다.”

    “오, 그렇구만?”

    “풀들의 상태로 보아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그것까지 파악할 수 있는 거야?”

    “기본적으로 마물은 생기를 흡수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거든.”

    다른 풀들에 비해 마물에 밟힌 풀은 금방 죽는다.

    발자국이 남은 곳의 풀들은 노랗게 말라붙어 있었다.

    “이 정도로 바싹 말라비틀어지려면 최소 이틀 이상이 필요하지.”

    이것은 공부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었다.

    율리안은 허- 하고 웃고 말았다.

    -본래 추적술에서는 남은 수분량과 토양의 산성도를 토대로 역산해요. 정확한 계산은 해봐야 알겠지만…… 대략 이틀 정도가 맞을 거예요.

    율리안으로서는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요. 계산한 건 아니죠?

    ‘그냥 감.’

    -하아.

    자료수집과 정확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결과값보다, 그냥 감으로 때려 맞추는(?) 빈첸이 너무 효율적이어서 그랬다.

    ‘억울해 마라.’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육감에 의지해 맞추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근 30년 동안 익힌 것이니.’

    빈첸은 계속해서 발자국을 쫓았다.

    레이븐의 눈에 빈첸은 거의 기인이었다.

    그의 눈이 더욱 반짝거렸다.

    “너 진짜 대단한 녀석이구나. 많은 노하우를 가르쳐줘서 고맙다.”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은혜는 잊지 말아야지.’

    사소한 배움도 배움이다.

    그는 그렇게 배웠다.

    ‘진짜로 추적특성 없이 추적이 가능하네?’

    흔적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 * *

    밤이 깊었다.

    어느덧 빈첸과 레이븐은 이름 모를 깊은 산맥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은 산세가 험했고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깨끗한 숙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불침번은 내가 먼저 서도록 하지.”

    “교대 시간은?”

    “4시간 후.”

    “알겠어. 내가 먼저 잘게.”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낭을 꺼낸 뒤 1초 만에 빠져들었다.

    빈첸은 모닥불을 피웠다.

    마법가루를 첨가하여 약한 강도의 안전지대를 확보했다.

    낮은 등급의 마물들은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이 정도 산세라면…… 잘하면 6급 야수종도 서식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율리안은 또 하- 하고 한숨을 쉬고 말했다.

    -6급 야수종 변이 트롤이 몇 번인가 발견된 적이 있어요.

    ‘그러냐?’

    -솔직히 이미 알고 왔죠?

    ‘몰랐다.’

    -에이, 저한테만큼은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나랑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잖아.’

    -그러니까 말이 안 되죠! 무슨 감으로 때려 맞추는데 자꾸 이렇게 정확해! 이건 개사기야!

    ‘정확하면 안 되냐?’

    -그런 건 아니지만요. 어지간해야지. 도대체 추적술은 언제 익힌 거예요?

    현대무인들은 자신의 특성을 갈고닦는 데 시간을 보낸다.

    당연히, 추적과 관련된 특성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추적술을 깊이 공부하는 것보다는, 추적 특성을 진화시키는 데 주력한다.

    그런 부분은 현대 무인들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나 때는 다 익혔어.’

    지금처럼 추적을 전문으로 하는 길잡이가 없었다.

    그때는 모두가 기본적인 추적술을 공부했어야 했다.

    -그때 사람들은 무슨 하루가 48시간쯤 됐대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기는 한데.’

    생각해 보니,

    ‘잠을 별로 못 잔 것 같기는 하구나.’

    -무학을 익히는 것도 빡센데, 거기에 잡다한 기술들까지 익히려면 도대체 얼마나 잠을 안 자야 하는 거예요?

    한 가지가 더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와 지금 달랐던 게 또 있었다.

    ‘그래서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것 같기도 하고.’

    평균 수명도 훨씬 짧았고 요절도 많았다.

    돌이켜보니 빈첸의 말마따나 야만적이고 무식한 시대였던 것 같기는 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아서 이상한 것을 못 느꼈었다.

    -맙소사.

    ‘그래도 일단 살아남으면 극의에 이르곤 했지.’

    그래서 옛날에는 극과 극이 많았다.

    성공하거나, 죽거나.

    지금처럼 중간층이 두텁지 않았다.

    -형님, 형님은 제발 그러면 안 돼요. 그 몸 아껴줘요. 알겠죠?

    ‘생각해 보마.’

    -우리, 꼭 천과(天果) 얻어서 몸도 회복하고요, 조상님, 아니, 초대가주님 유지를 받들어 사미온도 넘어서고요, 꼭 그러기예요. 알겠죠?

    빈첸은 킥, 하고 웃고 말았다.

    율리안의 다급한 감정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 4시간 됐…….

    “이제 내 차례군!”

    -어우, 깜짝이야!

    레이븐은 알림도 없이 정확히 일어났다.

    그는 기계 같은 태도로 빈첸의 앞에 섰고, 빈첸이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아침 해가 떠올라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을 무렵.

    빈첸과 레이븐은 다시금 변이 고블린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빈첸은 나무에 새겨진 변이 고블린의 이빨 자국을 찾아냈다.

    “거리를 꽤 많이 좁힌 듯하다.”

    추적 3일 차.

    빈첸은 착실히 변이 고블린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추적 특성 없이, 발자국과 배변 흔적, 주변 야생동물들의 사체들을 토대로 진행 방향을 설정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쫓아왔다.

    “또 알아낸 것이 있는 거야?”

    “지금 놈은 배가 고파.”

    이빨 자국을 보면 알 수 있다.

    변이 고블린은 배가 고프면 나무를 깨물어 나무껍질 안쪽에 서식하는 벌레들까지도 잡아먹는다.

    그 과정에서 자국이 남는다.

    “배고픈 변이 고블린은 흉폭해지지. 특히 놈은 포식 권능을 지니고 있으니 더욱 그럴 거야.”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빈첸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변이 고블린의 이빨 자국과는 약간 다른 형태의 흔적이 보였다.

    “이게 뭐지?”

    “네발짐승 형태의 야수종이 남긴 흔적.”

    ‘이라고 추정된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율리안이 끼어들었다.

    -청안 백호일 확률이 높아요.

    빈첸이 ‘네발짐승 형태의 야수종’이라고 단서를 특정해 주자, 그걸 바탕으로 율리안이 추리해냈다.

    -수종(樹種). 흔적이 새겨진 높이, 발톱의 크기, 상처의 깊이. 그리고 청안 백호의 발톱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고 했어요.

    다만 책으로 접해서 그게 어떤 냄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빈첸이 냄새를 맡아보았다.

    “청안 백호다.”

    “청안 백호?”

    “이곳에서 청안 백호 특유의 향이 나. 짐승의 냄새.”

    “……그런 것도 느껴지는구나.”

    레이븐도 가까이 다가가서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그런 걸 별로 느끼지 못했다.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나를 코 쪽으로 유도해서 후각을 활성화시켜봐.”

    “난 그런 건 못해.”

    “엄청 기초적인 건데?”

    빈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심상이론의 폐해군. 이렇게 기초적인 걸 할 줄 모른다니.’

    그에 반해 레이븐은 크게 자극받았다.

    ‘오늘부터 나도 연습이다!’

    빈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흔적으로 보면 청안 백호와 변이 고블린은 비슷한 시간에 이곳을 지나쳤어. 청안 백호는 고블린을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놈이지.”

    “청안 백호가 변이 고블린을 쫓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런데 흔적이 지나치게 평온해.”

    저만치 멀리.

    고블린이 싸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똥이 있었다.

    빈첸은 나뭇가지로 똥을 찔러보았다.

    “아직 굳지 않았군.”

    레이븐은 인상을 찡그렸다.

    똥 냄새가 지독했다.

    “만약 청안 백호가 고블린을 먹잇감으로 생각하여 쫓고 있었다면 이 똥을 파헤친 흔적이 있어야 하거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을 테니.

    그러나 상태가 너무나 멀쩡했다.

    레이븐은 어느새 빈첸의 말에 빠져들었다.

    “반대로 변이 고블린도 청안 백호를 먹잇감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와?”

    “지나오면서 야생동물들의 흔적을 봤잖아.”

    많은 사체들이 있었다.

    변이 고블린에게 죽은 동물들이었다.

    “호랑이 형태의 동물들은 파먹지 않았어.”

    유독 그랬다.

    레이븐은 또 감탄했다.

    “대박이다 너.”

    인정할 것은 솔직히 인정했다.

    “같은 걸 봤는데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배가 극도로 고픈 와중인데도 호랑이 형태는 먹지 않았다는 건 뭔가 이상하지.”

    빈첸은 발자국을 따라 조금 더 걸었다.

    “둘의 속도를 비교해 보면, 이쯤에서는 만났어야 해.”

    숲을 지나고 나니 광활한 갈대밭이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싸움의 흔적은 전혀 없군.”

    “그러게.”

    레이븐도 핵심을 짚어냈다.

    “상황이 엄청 작위적이고 이상하잖아?”

    “그래.”

    빈첸이 피식 웃었다.

    “네가 보기에 내가 전문 추적꾼같이 보이나?”

    “응.”

    그러나 빈첸은 전문 추적꾼은 아니었다.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 ‘전문 길잡이’에 비하면 초라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레이븐의 단호한 대답에 빈첸도 아주 약간 당황했지만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럴 리 없잖아. 나는 전문 추적꾼이 아냐. 그러나 내가 전문 추적꾼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모든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흔적을 일부러 남겨놓은 것처럼.”

    쫓아오기 좋도록.

    모든 흔적을 알기 좋게 잘 배치해 주었다.

    “고블린을 먹이로 생각하는 청안 백호가 변이 고블린에게 덤벼들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또한,

    “이토록 나무가 높이 자란 깊은 숲속에 갑자기 갈대밭이 있는 것도 이상해.”

    “그게 왜 이상한 건데?”

    “그건…….”

    사실 빈첸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직관에 의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왜 이상한지는 모르죠?

    율리안이 부연 설명해 주었다.

    -갈대는 습하고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요. 여기는 갈대가 이렇게 군락을 이룰 수 없는 환경이에요.

    레이븐은 빈첸의 설명에 빠져들었다가 이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면 이건…….”

    “그래. 누군가 우리를 유인한 거야.”

    이건 함정이었다.

    빈첸이 홍련을 꺼내 들었다.

    갈대밭을 향해 홍련을 겨누었다.

    “누구냐?”

    레이븐은 홍련의 검 끝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으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인지하지 못할 때에는 보이지 않다가, 이제는 보이기 시작했다.

    ‘빈첸 말이 맞잖아!’

    갈대밭 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갈대를 헤치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군.”

    배가 불룩 나온 남자였다.

    율리안이 소리쳤다.

    -저, 저, 저 남자는! 식인귀 카르발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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