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59화
세르쿤이 말했다.
“폭발을 베어낸 것입니다.”
“폭발을 베어냈다고?”
현재 레이븐의 경지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해?”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마나의 흐름을 끊어내어 마나의 응축과 팽창을 막는다.
“집사에게도 가능한 일이야?”
“저는…….”
세르쿤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반반입니다.”
“그러니까, 집사조차 반반인데 빈첸이 해냈다고 말을 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렇다는 건, 빈첸 공자의 경지와 집사의 경지가 비슷하다고 해석해도 돼?”
“그건 아닙니다.”
세르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나의 흐름을 읽어내는 탁월한 눈을 가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다는 것이겠지요. 공자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일 듯싶…….”
“오. 이해했어.”
“……예?”
“빈첸이 대단했다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세르쿤은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레이븐은 쉽게 납득한 것 같았다.
이내,
빈첸이 눈을 떴다.
‘온몸이 쑤시는군.’
율리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형님! 괜찮아요?
‘머리가 울린다. 소리 좀 지르지 마라.’
-임무를 앞두고 그렇게 무리하면 어떡해요!
‘제발, 조용히 좀 해줘.’
빈첸의 부탁에 율리안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빈첸이 몸을 일으켰다.
“레이븐. 세르쿤 집사님. 잠시 호법을 부탁드립니다.”
“……나한테 부탁하는 거냐?”
레이븐은 활짝 웃었다.
“이제 날 믿는구나, 빈첸. 탁월한 안목이다.”
그러나 세르쿤은 레이븐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빈첸 공자님은 심상을 다룰 수 없다 들었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만, 일단 심상을 다룰 수 없는 건 맞습니다.”
“그렇다면…… 명상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일 텐데요. 혹여 제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시렵니까?”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면, 제 명상의 유무와 상관이 있습니까?”
“…….”
“세르쿤 집사가 진심으로 저를 해하려 들면, 저는 세르쿤 집사를 막을 수 있습니까?”
빈첸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마나의 흐름을 베어내느라 몸이 만신창이였다.
마력회로가 꼬일 대로 꼬여서 괴로웠다.
명상으로 마나를 다스려야 했다.
‘참 평화로운 시대야.’
새삼스레 이 시대가 참 좋은 시대라는 것을 체감했다.
‘500년 전에는…… 어제까지 검을 맞대던 상대에게 호법을 부탁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는데.’
심지어 호법이 없는 상태로 명상에 빠져들 때도 많았다.
그때는 지금보다 결투나 전쟁도 훨씬 잦았다.
평화로운 이 시대와는 많이 달랐다.
빈첸의 입장에서 레이븐과 세르쿤에게 호법을 부탁하는 건 무척이나 안전한 행위였다.
받아들이는 레이븐과 세르쿤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마력자전을 시작한다.’
1회.
2회.
3회.
최대한 마나를 자전시키며 마력회로를 보수하고 온몸에 마나를 골고루 뿌렸다.
빈첸이 눈을 떴을 때, 신기한 것을 보았다.
“결계입니까?”
은색 실로 만들어진 거미줄 같은 공간이었다.
바닥에는 알 수 없는 온갖 상형문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는데, 이것은 살왕 세르쿤이 펼치는 비호결계였다.
빈첸은 이 공간이 얼마나 특별한 공간인지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이 무슨 과잉처사란 말이냐.’
스승님이자 8성 무인인 멀린조차도 이 결계를 뚫고 들어오려면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빈첸이 가볍게 웃었다.
“이렇게까지는 안 해주셔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빈첸 공자.”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왜 그랬습니까?”
세르쿤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마나 폭발을 저보다 빨리 감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옳은 선택은, 위험을 알리고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임무를 앞둔 상황에서 왜 그런 무리수를 둔 것입니까?”
빈첸의 답은 간단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무인이 아닌 자들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빈첸 공자도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빈첸은 세르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세르쿤 집사님이라면 다른 선택을 했겠습니까?”
“…….”
사실 세르쿤은 레이븐만 지키려 했다.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 없었다.
“질문이 틀렸군요. 다시 묻겠습니다. 레이븐이라면 다른 선택을 했겠습니까?”
“……같은 선택을 했겠군요.”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제가 아니라 다른 누구였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입니다.”
빈첸은 대부분 사실을 말했으나 한 가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 마나흐름이 사미온의 마나흐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익숙했고 확인해 보아야 했다.
정말로 사미온의 것이 맞는지.
약간은 무리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어때요? 진짜 사미온 거예요?
직접 베었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미온의 것이 맞아.’
빈첸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미온의 적통인 카곤은 저주나 다름없는 사슬식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고.
사미온의 지하감옥 냄새가 풀풀 나는 괴인이 폭발을 일으켰다.
검술의 명가인 사미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사미온은 단순히 역사를 조작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구린내가 진동해.’
세르쿤이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한 건 모두가 공자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그러나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인 듯하군요.”
하나 더.
레이븐은 빈첸의 정의로운 행동에 몹시 감격했고, 마음속으로는 빈첸과 절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공자의 검은 아덴카의 정검(正劍) 이었습니까?”
아덴카임을 증명하는 깔끔한 발검.
본능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읽어내고 베어내던 상승의 솜씨.
필요한 마나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사용하는 절제 어린 검술.
“그렇습니다.”
“멀린 경과 칸 경께서 기뻐하시겠군요.”
세르쿤은 빈첸의 몸 상태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정상이 아니군.’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빈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마력회로도 많이 다쳤고, 기이하게도 신체 자체가 흐물거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마나를 제때 머금지 못한 천골의 부작용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빈첸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어.’
보통 저 정도면 신음성이라도 내기 마련이고 인상이라도 한 번 찡그리기 마련인데.
빈첸에게서 그런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빈첸의 정신력에 감탄한 뒤, 솔직한 감상을 토해냈다.
“몹시 훌륭한 무예였습니다.”
레이븐이 빈첸의 어깨를 두드렸다.
“멋있었다, 친구야.”
“…….”
“두고 봐. 나도 멋있어질 거니까.”
레이븐은 몸을 돌려 걸어가 침상에 누웠다.
내일 임무를 위해 체력을 비축하기로 했다.
‘좋은 녀석이야.’
눈을 감고 생각했다.
빈첸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갔다.
빈첸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하루 만에 많은 일이 있었다.’
변이 고블린을 토벌하러 왔을 뿐인데 사미온의 냄새가 짙게 밴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폭발했다.
이것은 분명 마법폭발 테러였다.
왜?
누가?
무엇을 위해서?
‘짚이는 게 없어?’
-잘 모르겠어요.
이상했다.
현시대에 ‘심상 없이 다루는 마나’는 사장되었다.
그런데 괴인은 그 마나를 다루었고, 폭발까지 일으켰다.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괴인을 활용한 테러가 있었다 정도밖에 없네요. 형님과 레이븐을 다치게 하고 싶었던 걸까요?
빈첸이 가까이 다가가자 마나 중첩이 시작되었었다.
빈첸이 그 마나를 활성화시키는 키였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자는 분명 형님을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형님과 마주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어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죠.
율리안은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제가 모르는 미지의 세력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빈첸은 잠이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되었다.
빈첸은 아침 일찍 문을 나섰다.
윌슨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저, 저는 무섭지는 않지만, 저, 저도 꼭 가야 할까요?”
빈첸이 피식 웃었다.
“정 두렵다면 여기 있어도 좋다.”
어차피 짐은 최소화할 거다.
딱히 짐꾼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다.
“누, 누가 무섭다고 했습니까? 다만 저는 도움이 안 될까 걱정되어…….”
“여기 있거라.”
어차피 윌슨은 두고 가려고 했다.
임무 수행 중에는 방해만 될 테니까.
그런데 윌슨이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갑자기 용감해졌다.
“아닙니다, 제가 도와야지요.”
“그래?”
윌슨이 황급히 꼬리를 내렸다.
“그렇지만 저는 공자님의 충실한 시종이니 명령을 받들고 이곳에서 목 빠지게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충성.”
빈첸은 레이븐, 세르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세르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레이븐 공자님의 안전과 관계된 일이 아니면 일절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혹여…….”
혹시라도 도움을 받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빈첸이 말을 끊었다.
“이것은 저와 레이븐의 임무입니다.”
세르쿤이 빙그레 웃었다.
빈첸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세르쿤은 은신술을 사용하여 몸을 숨겼고, 빈첸과 일정 거리 멀어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세르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빈첸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빈첸은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레이븐이 신기한 듯 빈첸을 바라보았다.
“뭘 하는 거냐?”
“추적.”
“추적?”
레이븐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추적 특성을 지닌 추적자를 섭외하지 않고 추적하는 거야?”
“안 했는데.”
“아주 대단한데?”
바르곤이었다면 황당해했겠지만 레이븐은 신기해했다.
레이븐은 흥미 가득한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빈첸은 주변을 둘러보며 정보들을 취합했다.
“근데 어떻게 추적할 건데?”
“기본적으로 야수종은 추적하기 쉬운 편에 속해. 심지어 포식 권능을 지니고 있다면 지금 체중이 많이 나가는 상태일 거야.”
“그렇군.”
“많이 먹은 만큼 배변량도 많겠지.”
“오오.”
율리안은 조금 의아했다.
-귀찮게 왜 다 설명하고 있어요?
‘나한테 배움을 받으면 반쯤은 스승님으로 생각할걸?’
-에이. 쟤가 아무리 바보여도 그러겠…….
왠지 그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율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다른 고블린들에 비해 이빨 자국이 깊고 큰 편이고.”
레이븐은 빈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빈첸의 말 모두가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래서? 그 다음은?”
그리고 그는 신세계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