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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55화 (55/184)

환생의 정석 55화

아슬란은 페일커의 성을 버리고 아덴카를 만들었다.

그리고 500년이 흘렀다.

‘결국 아덴카도 남았고, 페일커도 남았다.’

그렇다면 본래 아슬란이 ‘페일커’라는 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법도 한데 그러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데이븐의 옳은 기록이 사라진 것처럼, 페일커의 기록도 사라졌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나?’

-네. 형님이 헛것을 본 거 아니에요? 제가 멀린 경을 왜 못 봤겠어요?

율리안은 그날 보았던 멀린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 역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간섭한 게 아닐까 싶었다.

빈첸은 멀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내 생각보다 멀린 경이 대단한 인물인가 해서.”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문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개 무인일 뿐입니다.”

바르곤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멀린 경을 빈첸 생도의 정식 스승으로 등록하겠습니다. 효력은 내일부터 발생할 것입니다.”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안은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상에나, 전대 12검 중 한 명이 형님의 스승을 자처하다니.

아직은 상급자인 빈첸이 멀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를 스승으로 만나게 되어 영광이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름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잠을 자고 있던 빈첸은 날카로운 살기에 눈을 번쩍 떴다.

황급히 몸을 움직여 검날을 피해냈다.

푹!

날카로운 날붙이가 침상을 찔렀다.

빈첸은 존댓말로 말했다.

“첫날부터 화끈하군요.”

암습자의 목소리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검격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활관 안은 평온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형님, 이 공격은 설마…….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멀린이 틀림없었다.

빈첸은 다시 잠을 청했다.

-그렇게 공격을 당하고 또 잠이 와요?

‘자야지.’

그래야 체력을 회복할 수 있고, 오전 훈련에 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다 또 공격이 오면요?

‘멀린 경이 정말로 찌르려 했다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못 피해.’

-그건 그렇지만요.

‘결국 멀린 경이 첫째 날 내게서 보려고 한 것은, 암습 후에 적절한 판단을 내리느냐, 그리고 다시 평정을 되찾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느냐, 그거니까.’

-저도 머리로는 알아요.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건 다른 문제다.

율리안은 허- 하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실제로 빈첸이 몇 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세상을 살아온 거야. 미친 영감님 같으니라고……

어떻게 방금 암습을 당하고 곧장 잠에 빠져든단 말인가.

억지로 잠을 자는 것도 훈련의 영역이라고 했는데, 그걸 실제로 이렇게 잘 보여주는 인간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다행히 더 이상의 암습은 없었고 아침 해가 밝았다.

* * *

개인 수련실.

빈첸은 그곳에서 멀린과 만났다.

둘은 새벽에 있었던 암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덴카의 검식은 나조차 모두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고 뛰어난 검이나, 크게 7개의 검식으로 구분된다.”

아덴카 검식은 7개의 묘리를 다루는 무학이었다.

정(正), 중(重), 쾌(快), 환(幻), 폭(爆), 첨(尖).

이 여섯 가지가 기본이었고,

거기에 더하여 연환(連環)이 존재했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루는 검은 연환검이다.”

멀린의 이명은 거뢰였다.

그는 아덴카 검식들 중 ‘연환검’을 사용하는 검술가였다.

빈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것이 아슬란이 아덴카에 남긴 검.’

아슬란이 말을 이었다.

“자연계 특성을 아덴카 검식에 적용하여 사용한다.”

“많은 특성들 중 자연계 특성을 접목하여 구사하는 검술을 연환검이라 표현하는군요.”

“그렇다.”

“스승님은 뇌기를 운용하고 계시고요.”

“그렇다. 너는 여섯 가지의 검식 중 무엇을 가장 원하지?”

“저는 정검(正劍)을 원합니다.”

정검은 그다지 큰 특성이 없는 검이다.

중검만큼 위력이 있지 않고, 쾌검만큼 빠르지도 않다.

환검만큼 화려하지도 않고, 폭검만큼의 대량살상력도 없으며, 첨검만큼의 관통력도 없다.

“정검은 이도 저도 아닌 검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에 조화롭겠지요.”

빈첸이 물었다.

“스승님은 어떤 검식을 주검식으로 사용하고 계십니까?”

“정검이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겸허히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멀린은 빈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정검은 특색이 없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검식이기도 했다.

‘보통 저 나이 때 아이들은 정검을 기피하는데.’

멀린은 흐뭇한 마음을 감춘 채 말을 이었다.

“아덴카 검식을 익히기 위하여 아덴카의 호흡을 익히고 심상을 만들어야만 한다.”

“…….”

사실 이것이 가장 난제였다.

빈첸은 심상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매우 효율적인 학문인 것은 맞으나 한계가 뚜렷했다.

“심상을 반드시 만들어야만 합니까?”

“아덴카 검식은 그렇게 설계되었고 발전해 왔다.”

“아덴카의 호흡과 심상 없이, 아덴카 검식을 운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덴카 검식은 상승의 무학이다. 심상이론의 도움 없이 사용하면 매우 위험하다.”

하급의 무학은 잘못 사용해도 별다른 위험이 없다.

애초에 그다지 큰 묘리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그러나 상승 경지의 무학을 잘못 운용할 경우, 몸에 심각한 부상이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무예의 깊이’라는 것은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멀린이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기감을 넓게 흩뿌려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게는 심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빈첸이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그래, 8성 무인이지.”

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설마……!”

“짚이는 것이 있나?”

“있습니다.”

멀린은 의아한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무엇이냐?”

“스승님 역시 가상의 심상을 만들어 운용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

멀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 말이 맞았다.

‘알고…… 있었다?’

사실 멀린은 시작이 많이 늦은 무인이었다.

빈첸은 심상을 아예 만들 수 없는 체질이었고, 멀린은 심상이 제대로 운용되지 않는 체질이었다.

‘나는 스무 살에 이 방법을 깨우쳤는데.’

그 전까지는 평범한 무인에 불과했다.

스무 살이 되었던 시점, 친구였던 레일사는 이미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고, 멀린은 그렇지 않았었다.

그만큼, 멀린은 시작이 늦었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8성의 무인이라 불리게 되었고, 레일사는 아직 7성에 머물러 있었다.

“언제부터 가상의 심상에 대해 알게 되었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가상의 심상을 만들 줄 아느냐?”

“예.”

“보여줘 봐라.”

빈첸은 뇌력거인의 가호를 자극하여 미전류 특성을 이끌어 냈다.

그 과정에서 미전류 특성 발현에 가장 유리한 ‘삼각형’ 형태의 가상심상을 만들어내었다.

멀린은 단숨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삼각형 형태의 심상을 구성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왜?”

“[미전류 특성]을 발현하기에 가장 유리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멀린은 속으로 감탄했다.

‘내가 스무 살이 되어서야 겨우 알아냈던 것을…….’

이 아이는 이미 알아내어 운용하고 있었다.

“또 다른 것도 알고 있느냐?”

“심상의 형태에 따라 미전류의 특성도 조금씩 변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삼각형 형태의 심상에 획을 더하여 변형했다.

사각형 형태의 심상.

그러자 미전류의 색깔이 푸른색으로 변했다.

“이렇게 하면 위력은 떨어지지만 더 멀리 퍼지는 특성을 지니게 되더군요.”

“…….”

이것은 멀린이 22살에 가능했던 경지였다.

‘이 아이는…….’

누가 빈첸을 못난이라 하였는가.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달랐다.

‘천재다.’

이러한 방법을 알고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멀린이 아는 한, 멀린 자신과 더불어 자신에게 이 방법을 가르쳐준 노인뿐이었다.

멀린은 그 노인의 이름조차 모른다.

그저 스승으로 여기고 있을 뿐.

‘나는 노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 완성했었는데.’

다시 확인해 보았다.

“스스로 깨우쳤느냐?”

“그렇습니다.”

무예는 일찍 익히면 익힐수록 좋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의 1년이, 성인의 10년과도 같다는 표현도 있다.

빈첸은 이제 겨우 열넷이다.

멀린이 가상의 심상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터득한 이후, 심상의 형상을 변화시키는 데 걸린 시간이 또 2년이었다.

‘내가 스물둘에 이룩한 것을, 빈첸은 열넷에 이룩했어. 그것도 스스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미온을 이겨낸 것이 행운이 아니라 필연이었구나.”

빈첸의 심장이 뛰는 것만큼이나, 멀린의 심장도 뛰기 시작했다.

* * *

빈첸에게 스승이 배정된 후 6개월이 흘렀다.

그사이 빈첸은 대표 생도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그에게 붉은 요새의 임무하달서가 전달되었다.

“마물 토벌 건이라…….”

셀비라가 빈첸 옆에 앉았다.

대표생도의 자리를 내려놓은 셀비라는 빈첸의 옆에서 빈첸을 도왔다.

대표생도로서의 실질적인 행정업무는 셀비라가 대행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셀비라가 임무하달서를 함께 읽어보았다.

“음, 그러니까…… 변이 고블린과 관련된 임무?”

셀비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마물들이 엄청 기승을 부린다더니 진짜인가 봐.”

“무슨 뜻이지?”

“보통은 우리한테까지 임무가 하달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대부분 5급 생도 선에서 끝난다고 했다.

그러나 마물이 이토록 기승을 부릴 때에는 하급 생도들에게까지 임무가 전달된다.

9급 생도에게 임무가 하달된 것은 10년 만의 일이라고 했다.

“어디 보자. 9급 야수종 변이 고블린. 그리고…….”

셀비라가 눈을 크게 떴다.

“임무를 내린 주체가 아덴카 장로원이네?”

장로원은 아덴카를 지탱하는 실세였다.

“빈첸을 직접 지목했고…… 지목한 사람의 이름이 틸로반?”

율리안이 끼어들었다.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장로 중 하나예요.

‘대부분이 그렇지 않나?’

-왜 사실로 뼈 때려요?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하나였다.

빈첸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장로가 굳이 9급 생도 빈첸을 콕 짚어 임무를 하달했다는 것이다.

-이제 저도 견제 대상 혹은 시험 대상에 들어가나 봐요. 다른 말로 하면, 아덴카의 후계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거죠.

그때,

셀비라가 입을 열었다.

“흐음, 나는 빈첸이랑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

“혹시 나를 데려갈 생각은 없을까, 빈첸?”

“없어.”

“왜? 그래도 나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네가 오기 전까지는 촉망받던 대표생도였다고.”

“임무하달서에 나의 이름만 적혀 있으니까.”

“그래도 네가 인원 차출해서 데려갈 수 있잖아.”

셀비라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셀비라. 너는 내가 9급 생도들 중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야.”

“……갑자기?”

“대표생도인 내가 빠지면, 나를 대신해서 생도들을 리드할 수 있는 유일한 생도이고.”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셀비라의 마음은 고마우나 이번 임무는 반드시 혼자 진행해야 했다.

“그러니 뒤를 부탁한다, 셀비라.”

셀비라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흐, 흥. 네가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할게.”

빈첸의 생활관을 빠져나온 셀비라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침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상당히 기뻐 보였다.

셀비라가 돌아간 후, 빈첸은 언제나처럼 멀린과의 수련에 임했다.

수련이 끝나고서 멀린이 물었다.

“어째서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려 하느냐?”

멀린이 보기에 빈첸이 굳이 혼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동료들이 돕는다면 훨씬 수월할 임무였다.

“그것이 변이 고블린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선택의 이유가 되느냐?”

빈첸의 입에서, 멀린이 생각하지 못했던 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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