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54화
빈첸이 말했다.
“저는 아덴카가 되길 원합니다.”
“너는 이미 아덴카이다.”
“그러나 아덴카의 검식은 다루지 못하지요.”
빈첸은 분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는 이번 친선교류회에서 사미온의 6공자를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아덴카로서 사미온을 극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빈첸이 카곤을 이긴 것은 맞다.
그러나 아덴카가 사미온을 이긴 것은 아니었다.
빈첸이 사용한 능력 중 아덴카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직 아덴카의 검식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는 아덴카의 검으로, 사미온의 검을 넘어서고 싶습니다.”
아슬란이 남겨준 이 가문에서.
그가 남긴 검과 함께, 그가 남긴 사명에 동참하고 싶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
칸은 빈첸을 내려다보았다.
빈첸은 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선에…… 작은 호감이 담겨 있다.’
문득, 빈첸은 칸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상기하였다.
외팔이 데이븐이었던 그 시절.
그토록 갈망하였으나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호감 어린 시선.
그 시선을 지금 느꼈다.
“스승이 필요합니다.”
칸은 시종장 레일사의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아닐지요.
-가주님의 권한으로 직책을 바꿔주신다면 그가 빈첸 공자의 스승으로 갈 수 있겠지요.
레일사의 판단이 옳았던 모양이었다.
빈첸은 스승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덴카 검식을 익히고 있는 무인들 중 빈첸의 스승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많지 않았다.
이미 빈첸은 장로회의 눈 밖에 났을 뿐만 아니라 외가의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까.
괜히 빈첸의 스승이 되었다가 후에 가문 내 권력경쟁에서 밀려날 수도 있었다.
“스스로 자원하는 자가 있어야만 가능할 일이다.”
“있을 것입니다.”
물론 빈첸도 누가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는 아덴카의 검식을 익히지 않고 사미온 검식을 이겨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2공녀 데이아의 성과보다 더욱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상대는 사미온 내에서도 기재라 불리는 카곤이었으니.
“그런데 자원하는 자가 없다면.”
빈첸이 다시 한번 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가문의 어른들에게 크게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뒤에서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셀비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비, 빈첸의 말이 너무 센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가문의 어른들에게 실망이라니.
그런 말을 가문의 수장 앞에서 스스럼없이 해버린다니.
‘가주께서 혹시 화가 나신 건…….’
아니었다.
칸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나 역시 실망할 것이다.”
칸이 등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는 미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네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구나.”
* * *
며칠 전.
아덴카의 시종장 중 한 명인 레일사는 오래된 친우의 숙소를 찾았다.
“레일사. 무슨 일이지?”
친우의 이름은 멀린.
백색검대의 부검대장이었다.
멀린이 자세를 고쳐 잡고 자리에 곧게 앉았다.
레일사는 멀린 옆에 앉았다.
“부검대장 일은 어때? 할 만해?”
“주어진 임무를 다할 뿐이다.”
멀린은 가치판단을 하지 않았다.
임무가 주어지고, 직책이 주어졌으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면 그뿐이었다.
“사실 원하지 않았었잖아.”
멀린은 겨우 부검대장에 있을 자가 아니다.
오래된 친우인 레일사는 잘 알고 있다.
“내 개인적인 기호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혹시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은 없어?”
“다른 일?”
“황룡대에 마침 인원이 필요해서.”
황룡대.
그곳은 아덴카의 무인들을 양성하고 키우는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검이 빠져 있는 곳이군.”
현재 그가 몸담은 곳은 백색‘검’대였다.
레일사가 제안한 곳은 ‘검’이 빠진, ‘황룡대’였다.
그는 ‘검’이 없는 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거절한다.”
“그렇게 말할 줄은 알았지만.”
레일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꼭 가르쳐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그게 누구지?”
“못난이, 빈첸 공자.”
순간,
멀린의 몸이 움찔했다.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빈첸이 흑향목 목검으로 허수아비를 예리하게 베어냈던 그 흔적을.
심상치 않았던 그 날 밤의 기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이미 장로회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어. 나이도 너무 어려. 후계자가 될 확률은 지극히 낮지. 빈첸의 스승이 되고자 하는 아덴카의 무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그러니 내가 거절할 것도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 그가 뇌력거인의 가호를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
멀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는 일이군.”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해보려하는데.”
레일사가 빙그레 웃었다.
“며칠 후, 빈첸 공자는 카곤 공자와 겨룰 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카곤 공자가 승리하겠지.”
“나는 빈첸 공자가 승리한다에 걸겠어.”
멀린은 어이없다는 듯 레일사를 바라보았다.
“농담이 늘었군.”
“농담이 아냐.”
레일사는 멀린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멀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인가?”
“진심.”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나?”
“빈첸 공자가 이기면, 네가 스승이 되어줄 생각이 있다고 봐도 되나?”
“가능성이 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군.”
레일사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그녀의 애검 ‘묵월’이었다.
레일사의 검이 멀린의 목 끝에 닿았다.
“나는 나의 검을 걸겠다.”
“…….”
멀린은 조심스레 그 검을 치워냈다.
“네가 이 정도로 진심이라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레일사가 이렇게까지 움직일 때는 좀처럼 없으니까.
“그렇지만 빈첸 공자는 카곤 공자를 이길 수 없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기적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빈첸이 카곤을 이겼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세 번의 모든 관문에서 승리했다.
레일사가 말했다.
“거봐. 빈첸 공자가 이긴다고 했지?”
“…….”
“준비해. 가주님께는 미리 보고 올려놓았어.”
인사이동에는 차질이 없도록 레일사가 이미 준비해놓았다.
레일사는 빈첸이 승리할 것을 가정하고 모든 일을 처리해놓았다.
멀린은 별로 없는 짐을 꾸렸다.
레일사가 묵월을 내밀었다.
“20년 전, 네가 그토록 탐내던 검이야.”
“나는 내기에서 졌는데.”
“뇌물이라고 해두자.”
“뇌물?”
“더 이상 내게 묵월은 필요 없어.”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보다시피 나는 시종장이니까. 시종장에게 명검은 필요 없지. 묵월은 네게 더 어울릴 거야.”
멀린은 레일사의 검을 받아들었다.
그는 레일사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왜 이토록 빈첸 공자를 위하는 거지? 사르비나, 그분의 아들이어서?”
“그게 시작이었어.”
레일사가 가볍게 웃었다.
분명 시작은 그랬다.
“그런데 왠지, 빈첸 공자는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거든.”
“…….”
레일사와 멀린은 아덴카의 남문을 향해 함께 걸었다.
백색검대의 검대원들에게도 딱히 작별을 고하지 않았다.
남문 앞.
레일사가 입을 열었다.
다 알고 있는 얘기지만 한 번 더 짚었다.
“빈첸 공자는 장로회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거, 알고 있지?”
“그래.”
후계자 후보의 스승이 된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만약 제자가 후계를 이어받지 못하게 되면 말로가 별로 좋지 않다.
“외가의 도움도 없다는 거, 알고 있을 테고.”
“알고 있다.”
정치적으로 계산했을 때, 이 선택은 멀린에게 큰 손해였다.
멀린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땐 술 한잔하지.”
그의 모습이 멀어졌다.
* * *
서신을 전달받았을 때, 바르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일전에 빈첸과 나누었던 대화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 날의 승리 이후, 나의 스승이 정해질 것이니 두고 보아라.
‘정말로…… 스승이 정해졌다.’
바르곤은 다시 한번 서신을 읽어보았다.
아덴카 가주의 인장으로 증명된 이 서신에는 한 무인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한때 ‘거뢰(巨雷)’라 불렸던 검술가, 멀린이었다.
“거뢰. 멀린 경이 빈첸 공자의 스승을 자처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 한참이나 멀린의 이름을 곱씹었다.
멀린이 활약했던 전투들을 떠올렸다.
“메르티카 고원, 맘부스 황야, 베를타 고지전.”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차르비달 대평원 전투였었다.
지금은 멸문하고 사라진 타밀란가의 무인들이 아덴카가의 무인들을 포위했었던 그 전투.
당시 7성의 무인이었던 멀린은 타밀란의 무인들 120여 명을 혼자서 사살하고 포위망을 뚫어냈었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이후 그는 아덴카를 대표하는 ‘십이검(十二劍)’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장로회의 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행동하여 십이검의 직위를 박탈당했다고 들었는데…….’
그 이후 행적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실제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총책임자 헤르카 경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는 부책임자 바르곤입니다. 멀린 경.”
“만나서 반갑습니다, 바르곤 경.”
일이 싫은 헤르카는 또 대마물 토벌을 핑계로 붉은 요새를 떠나 있는 상태.
바르곤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제 우상이었던 분을 만나게 되니 가슴이 떨리는군요.”
“저는 누군가의 우상이 될 재목이 아닙니다.”
“차르비달 대평원 전투에서 저는 아덴카 측 파견 마법사였습니다. 저는 그때 멀린 경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바르곤은 직접 보았다.
혼자서 수백 명의 무인들을 도륙하던 야차의 모습을.
바르곤의 기억 속에서, 멀린은 뇌력거인 그 자체였었다.
바르곤과 멀린이 마주 보고 앉았다.
“기별을 넣었으니 곧 빈첸 생도가 도착할 것입니다.”
바르곤의 말대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곤 경, 호출하셨다 들었습니다.”
“들어오도록.”
빈첸이었다.
빈첸이 바르곤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빈첸 생도의 스승이 확정되었다.”
빈첸은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예상은 하고 있었다.
‘내 스승이라.’
아버지께서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주신 모양이었다.
그때, 소파에 앉은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멀린이군.”
“저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 있다.
“백색검대의 검대원 아니었던가.”
율리안이 버럭 소리 질렀다.
-백색검대의 검대원이라뇨!
빈첸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말았다.
머리가 웅웅- 울려댔다.
‘너도 보지 않았더냐? 함께 인사도 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멀린 경을 언제 만났다고!
빈첸은 이상함을 느꼈다.
빈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백색검대 소속 멀린입니다.
수련을 시작하던 그 무렵.
빈첸 자신에게 처음으로 호의를 보여주었던 무인이었다.
-체력 포션입니다. 이를 이용하시면 훨씬 수월하게 수련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말했었다.
-멀린, 네 이름을 기억하겠다.
그러고 보니 당시 꽤 수다스러웠던 율리안이, 멀린과의 대화에는 전혀 끼어들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일단 물었다.
“기별을 전하러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누가 스승으로 확정되었는지 적힌 서신을 전달하러 온 검대원이라 생각했다.
멀린이 입을 열었다.
“이름을 기억해 주시니 몹시 기쁘군요.”
“당연한 일이다.”
처음으로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 아니던가.
그리고 기억하겠다고 말하였으니, 기억하는 것이 옳았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저의 이름은 멀린 페일커. 내일부터 빈첸 공자님의 스승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내일부터는 공자님이 아닌 제자이자 생도로 대할 것이니, 무례를 양해하여 주십시오.”
빈첸의 몸이 움찔했다.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페일커…… 라고?’
페일커.
아덴카의 초대가주 아슬란의 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