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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53화 (53/184)

환생의 정석 53화

올해로 17세가 된 소녀 밀리는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한때 유명했다던 대장장이 한센의 공방에 취직한 그녀는 대장장이들의 간단한 심부름을 하거나 공방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녀의 일상은 보통 따분하고 지루한 편이었다.

‘하아암.’

대장장이들은 모두 제 할 일이 바빠 보통은 말 한 번 걸지 않는다.

그들 중 몇은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을 지닌 탓에 청소할 거리도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대장간의 불길이 무척이나 뜨거워서 한겨울에도 땀이 삐질삐질 난다는 것만 제외하면 제법 마음에 드는 직장이었다.

‘오늘 할 일도 다 했고.’

그녀는 대장간 밖으로 나가 나무 사이에 걸린 해먹에 누웠다.

고용주인 한센은 꽤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할 일만 제대로 다 하면 그 외의 시간은 어떻게 쓰든 간섭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오늘도 낮잠을 실컷 자려 했다.

“이, 이봐요!”

그런데 오늘 낮잠 자기는 영 그른 모양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사람들이 대장간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기자들?’

밀리는 대장간 문 앞을 막아섰다.

“안에서 장인들이 피땀 흘려 제련하고 있어요. 무슨 일들이죠?”

“당신은 누구십니까?”

“한센 공방에서 일하는 잡부인데요.”

“명장께서는 지금 공방 안에 계신가요?”

하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내용의 질문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바람에 밀리는 조금 어지러워졌다.

“잠깐! 제발, 한 분씩 얘기해 주시겠어요.”

그때, 한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네, 거기 주황머리 아저씨.”

“명장께서 지금 공방 안에 계십니까?”

밀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는 한센 공방인데요?”

명장을 찾는 사람들은 한센 공방에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저 기자들이 잘못 알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이곳은 질 좋은 공산품을 대량 양산하는 곳이지, 명장의 보물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한센 명장님께서 계십니까?”

“한센 영감님이 안에 계시기는 한데…….”

한센은 일할 때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 한다.

그리고 밀리는 기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저번에 그 자식도 있잖아?’

한센 공방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나 뭐라나.

무인들은 각성하여 진짜 명인들의 훌륭한 검을 사용하여야 한다나 뭐라나.

사람 좋은 척 와서 인터뷰를 하더니 그따위 소식을 써냈던 기자도 있었다.

‘오늘은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취직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정을 주고 있는 곳이었다.

밀리는 한센 공방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그래도 지금처럼 소란스럽게 이러시면 안 돼요. 영감님은 요새 엄청 바쁘다고요.”

“오, 명장님을 영감님이라고 부르십니까?”

“…….”

밀리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기자들의 질문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왜 자꾸 명장이라고 하는지.

‘또 무슨 시커먼 속셈이지?’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영감님을 물어뜯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극도로 말을 조심했다.

“그렇다면 질문 좀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빨간 단발머리의 기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영감님이라 부르는 한센 명장께서는 요즘 왜 바쁘신 겁니까?”

“검을 만들고 계세요.”

순간, 기자들의 펜이 바빠졌다.

몇몇은 영상기록석을 벌써부터 사용하여 모든 장면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검이라면 어떤 검이죠?”

“저는 잡부예요. 그런 건 잘 몰라요.”

또 소란스러워졌다.

밀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돌아가세요! 공방의 외적 연락은 제가 맡고 있으니까, 저한테 명함들 주시고요. 남의 작업장에 와서 다들 뭐하는 거람.”

그러나 기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센 명장을 영감님이라 부르는 당신은 빈첸 공자님과 절친한 사이입니까?”

그게 누군데요?

반문하려던 그때,

대장간의 문이 열렸다.

화악-!

뜨거운 열풍이 불었다.

그 뒤로 얼굴에 그을음을 잔뜩 묻힌 야장, 한센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기자들이 그를 발견했다.

“한센 명장님이 맞으십니까?”

“맞습니다만.”

한센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밀리는 한센이 조금 걱정되었다.

“영감님, 외부 연락은 제가 담당하고 있잖아요.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처리할게요.”

밀리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짓고서 한센을 살짝 밀었다.

그러나 한센은 뒤로 밀리지 않았다.

굳건한 바위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평소에 이렇게 밀면 밀렸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영감님?”

질문이 또 들려왔다.

“한센 명장님께서 [홍련]을 제련하신 것이 맞습니까?”

평범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무인들의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밀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꾸 한센을 명장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빈첸은 또 누구고, 홍련은 또 뭐란 말인가.

한센이 짧게 대답했다.

“홍련을 제련한 것은 맞으나, 명장이란 이름은 버린 지 오래요.”

한센은 빈첸의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

기자들이 말했다.

노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말을 이었다.

“한센 야장께서는 명장의 이름을 버렸다 말씀하셨으나, 한센 야장님을 명장이라 직접 언급한 무인이 있습니다.”

“무인?”

한센은 고개를 갸웃했다.

‘칸은 아닐 테고.’

칸과의 인연은 진즉에 끊겼다.

사람으로서, 친구로서의 인연은 남았을지 몰라도, 무인과 대장장이의 관계는 이미 끊어졌다.

‘나를 언급할 만한 무인은 없을 텐데.’

그것도 이렇게 많은 기자들을 움직일 만큼의 명예로운 무인은 없었다.

‘홍련’이라는 이름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센은 빈첸의 이름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노란머리의 기자가 말했다.

“가주 칸과 발키아 앞에서 명장의 이름을 언급한 무인입니다. 짐작 가시는 바가 없습니까?”

칸과 발키아?

이 시대의 거인 두 명 앞에서 그것을 언급한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 거물은 없었다.

“전혀 없습니다. 그게 누구요?”

“빈첸 공자입니다!”

“…….”

명장.

한센에게는 너무 멀어져 버린 단어가, 기자들의 입에서 쏟아졌다.

한센은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빈첸이라고?’

“명검 홍련이 사미온 직계의 오른팔을 베어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빈첸 공자와는 어떻게 연이 닿게 되었습니까?”

한센은 그들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그들의 목소리가 백색소음이 되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빈첸이…… 카곤의 팔을 잘랐단 말이냐?’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카곤은 검신 케샤크의 가호를 지닌 사미온의 천재 아니었던가.

“빈첸 공자가 카곤 공자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이 홍련 덕분인 것이 맞습니까?”

한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빈첸이 일을 치를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만.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기자들 입에서 계속해서 ‘명장’이란 단어가 오르내렸다.

빈첸 덕분에 빛이 바랬던 한센의 명예가 일부 회복되었다.

명장의 명예를 애써 외면하고 살아왔다.

‘정말로, 내 이름을 언급하였구나.’

요즘 시대에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지금 기자들의 질문만 보더라도 그렇다.

빈첸이 카곤을 이길 수 있었던 건 결국 ‘병장기 덕택’이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져대고 있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다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첸은 한센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헛된 선택을 하지 않았구나.’

대장장이의 명예는 무인의 명성에 기인한다.

명예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그는 늘 명예회복을 꿈꾸었다.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리라는 머나먼 허상을 좇으면서.

괜스레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홍련이 ‘시작을 알렸던 검’이라는 것입니다.”

홍련은 시작이다.

칸에게도 홍련은 시작이었다.

시작은 미비하였으나 끝은 창대할 것이다.

그 검이 곧 한센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며 빈첸과 함께 높은 곳에 설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나의 명예는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대장장이들이 자신의 길을 따를 것이다.

더 많은 대장장이들이 질 좋고 값싼 병장기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더 많은 무인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병장기의 한계 때문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무인들이 줄어들 것이야.’

그게, 한센이 꿈꾸는 세상이었다.

그 세상에 한 걸음 내디딘 기분이 들었다.

“빈첸 공자가 보여준 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한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는 빈첸에게 강한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이 더욱 단단해졌다.

“저 역시도 빈첸의 비상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와 함께하는 쇠쟁이로서.”

* * *

사미온가의 저녁 식사 자리.

발키아가 카곤을 불렀다.

모자는 간만에 둘만의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실력에서도 졌고, 배포에서도 졌고, 전략에서도 졌구나. 너는 빈첸의 목이 아니라 오른팔을 노렸어야 했다. 빈첸의 예측대로 움직여줄 것이었으면, 그만한 실력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자존심은 패배를 부를 뿐이다.”

“……죄송합니다.”

팔을 노렸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거다.

빈첸의 목이 무방비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진짜 약점은 팔이었다.

팔이 목보다 가까웠다.

카곤이 빈첸의 팔을 노렸다면 카곤의 팔이 아니라 빈첸의 팔이 땅에 떨어졌을 것이었다.

“정진하여라.”

“어머니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녀는 사미온의 가주로서 아들에게 조언해 주었다.

“빈첸은 네가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어.”

“…….”

“그만큼 너를 면밀하게 파악했다는 뜻이다. 어쩌면 네 자신보다 더 많이. 그리고 그 판단에 대한 강대한 믿음과 실행력도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그것이 빈첸의 승리를 가져왔어.”

사실 카곤이 못했다기보다는 빈첸이 너무 잘했다고 봐야 옳았다.

발키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이번 패배로 많은 것을 배웠기를 바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녀의 웃음이 짙어졌다.

“배우지 못하면, 네 손과 발의 힘줄을 내 친히 자를 것이니.”

“그럴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셀비라와 대화를 나누던 빈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에 있던 생도들 모두가 얼어붙었다.

헤르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할 일들 해.”

그러나 헤르카의 말에도 생도들은 꿈쩍하지 못했다.

헤르카와 함께 생활관을 찾은 사람이 아덴카의 가주 칸이었기 때문이었다.

“승리하였구나.”

빈첸은 칸 앞에 섰다.

칸을 올려다보았다.

칸을 향한 존중은 내보였지만 위축되지는 않은 모양새였다.

“잘하였다.”

“감사합니다.”

생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칸 경께서 직접 칭찬하시다니.’

‘데이아 공녀님 외에는 직접 칭찬하신 적이 없다던데.’

칸이 말을 이었다.

“내게 서신을 보낸 이유를 듣고 싶구나.”

칸의 손에 서신이 들려 있었다.

이전에 빈첸이 말론의 가호를 흡수한 것에 대해 알리는 서신이었다.

시종장 레일사는 이 서신이 ‘아들’ 빈첸이 ‘아버지’ 칸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이라 해석했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오늘의 승리를 통해 빈첸은 최소한의 자격을 획득했다.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해보아라.”

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빈첸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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