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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52화 (52/184)

환생의 정석 52화

적황미력.

그 은은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당대 친선교류회에서 적황미력이 사용된 것은 단 한 번뿐입니다.”]

그것은 2공녀 데이아가 친선교류회를 치를 때뿐이었다.

그 이후, 사미온의 직계들은 적황미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적황미력이 등장했다는 것은 사미온의 직계가 반드시 승리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역시 적황미력을 꺼내 드는군.’

카곤이 정말 카진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면.

카진의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면.

분명히 적황미력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붉은 노래의 장] 계열의 검을 사용할 거야.’

카곤이 그의 검을 곧추세워 가슴에 대었다.

빈첸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의 기세를 맞받아내었다.

‘온다.’

카곤이 그의 검을 드러내었듯,

빈첸도 자신의 검을 보여주기로 했다.

또한 보여주어야 했다.

카곤의 검을 이미 읽어내고 있다는 것을.

“검로는 한 방향이며.”

어쩌면 실력 자체는 카곤보다 부족할지 모른다.

사람들이 평가하는 재능도 카곤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다를 것이다.

“허초는 없겠지.”

빈첸이 카곤의 검을 막아내었다.

챙!

검과 검이 부딪쳤다.

속임수가 없는 일자의 횡 베기.

검로만 미리 알고 있다면 그 힘을 흘리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강하다.’

카곤은 큰 힘을 들이는 것 같지 않았으나 빈첸은 최대한의 힘을 끌어내어야 했다.

과연 사미온의 적황미력을 운용하는 사미온 검식다웠다.

챙!

챙!

이어지는 공방.

카곤에게는 무력의 우위가.

빈첸에게는 경험의 우위가 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어떻게?’

꽉 막힌 벽과 싸우는 것 같았다.

눈으로 보기에 그 벽을 언제든지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벽이 이상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바위조차 쉽게 잘라버린다는 사미온의 검이 빈첸의 검을 베어내지 못했다.

[“빈첸 공자의 검이 사미온의 붉은 노래를 막아내었습니다!”]

홍련은 전혀 망가지지 않았다.

오러나 검기를 덧씌운 것도 아닌데 검이 손상되지 않았다는 건, ‘홍련’의 내구성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몸이 버텨주어야 할 텐데.’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빈첸의 몸이 세 발자국이나 뒤로 밀렸다.

검로를 미리 읽어내고 대비한 게 아니라면, 단 일 검도 막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 왼쪽을 노리겠지.”

“말이 무척 많구나, 빈첸.”

카곤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으나 빈첸의 말대로 움직였다.

왼쪽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설인걸음.’

빈첸이 설인걸음을 운용하여 카곤의 검을 피해냈다.

겉으로 보기에 빈첸이 카곤의 검을 피하기에 급급해 보였다.

승기는 어느덧 카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빈첸.”

“…….”

“다음은 내가 무엇을 하겠느냐?”

“붉은 원을 그릴 것이다.”

빈첸이 홍련을 크게 휘둘렀다.

카곤은 홍련을 쉽게 피해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확하군.”

사미온 검식.

붉은 노래의 장.

적만월.

빈첸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카곤 공자의 검이 원을 그립니다!”]

[“그 유명한 적만월입니다!”]

[“빈첸 공자는 모든 것을 예상한 듯 보입니다!”]

빈첸은 이미 카곤의 검을 예상했다.

이것은 예상이기도 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상황이기도 했다.

‘내가 네 움직임을 읽어내어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카곤은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일부러 내 예측대로 움직여주겠지.’

더 강한 힘으로 빈첸 자신을 찍어 누르기 위하여.

네 예측 따위는 무용지물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빈첸을 압도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하여.

“결투는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빈첸.”

카곤의 눈이 빛났다.

그의 눈에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나의 승리다, 빈첸.”

사미온의 계승자들 중에서도 검신 케샤크의 가호를 지닌 자들만 운용할 수 있다 알려진 검.

검로가 만월(滿月)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의 검흔이 보름달을 만들었다.

사아아-!

마나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적만월.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검로를 차단하는 검이었다.

반탄력과 검기를 이용하여 공격한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는 반격기이기도 했다.

순간, 그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의 체감에는 그러했다.

‘네 목을 베어주마.’

여지껏 그와 결투했던 모두의 목을 베어 죽였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헤르카가 방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응?’

어리석게도,

빈첸은 정면으로 적만월의 힘을 감당하려는 듯 보였다.

치직-

빈첸의 검에 뇌기가 서렸다.

뇌기를 머금은 빈첸의 검이 적만월의 중앙을 찔렀다.

카곤이 미소 지었다.

‘어리석은 놈!’

적만월의 중심부.

공격자에게는 가장 위험한 곳이다.

적황미력이 상대를 덮칠 것이다.

그런데,

“큭!”

비명성을 내지른 건 빈첸이 아니라 카곤이었다.

서걱!

예리하게 잘리는 소리와 함께,

탁!

무엇인가가 땅에 떨어졌다.

빈첸의 목이 아니었다.

카곤의 오른팔이었다.

검을 쥔 그의 오른팔이 땅에 나뒹굴었다.

카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실력의 차이가 곧 격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카곤.”

실력은 조금 부족할지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빈첸이 몸소 그것을 증명해냈다.

[“카, 카곤 공자의 오른팔이……!”]

[“자, 자, 잘렸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헤르카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절대로 운이 아냐.’

잘은 모르겠지만 ‘적만월의 약점’을 파악하여 공략한 것 같았다.

‘빈첸은 카곤이 자기 목을 노릴 거라는 걸 이미 예상했어.’

예상을 바탕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빈첸이 카곤 앞에 섰다.

500년이나 묻혀 있었고 왜곡되어 있었으나 이제 선언했다.

사미온의 가주와 아덴카의 가주가 보는 앞에서.

“이것이 나의 검이다.”

500년의 시간을 격해 이어진 의지의 발현이었다.

또한 내 스승의 검이기도 하다.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빈첸은 사미온의 가주 발키아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빈첸이 빈첸 ‘아덴카’임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장면이었다.

몇몇 기자들이 그 모습을 영상석에 담았다.

체븐 신관이 또 헐레벌떡 뛰어왔다.

“또 이런 중상입니까! 자꾸 이러면 제 신성력도 남아나질 않을 겁니다!”

체븐이 치료를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에 하얀 신성력이 생성되었고 그와 함께 기적이 깃들었다.

그때까지도 대다수의 생도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발키아 경이 자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느새 발키아는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그녀 역시 사미온의 패배를 인정한 모양이었다.

신관의 치료를 받으며, 카곤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유를…… 알려다오.”

카곤이 생각하기에 그의 검식은 완벽했다.

적만월이 부서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빈첸은 말하고 싶었다.

‘나와 내 스승이 함께 만들어간 검의 이름이 파사검이었다.’

파사검.

오로지 사미온 검식을 파훼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검식.

그 검식은 사미온 검식의 힘을 역이용하도록 고안된 검식이었다.

그러나 파사검에 대해 말해줄 수는 없으니 다른 이유를 대었다.

“청련화(靑蓮花)의 도움을 얻었다.”

청련화를 짓이겨 액체로 만들었다.

그것을 홍련에 발랐다.

청련화는 혈액을 응고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미온의 붉은 노래는 혈기(血氣)를 응용한 기운이니까.”

“…….”

청련화를 사용하여 혈기의 흐름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러면 본래 적만월의 가장 위험한 ‘중심’이 오히려 ‘약점’이 되어 버린다.

약점을 찌르는 순간, 찰나이지만 적만월의 기운이 파훼된다.

‘그리고 파사검이 네 적황미력의 도움을 얻어 네 오른팔을 베어냈다.’

파사검이 아니라 일반적인 검식이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다.

카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청련화는 검날을 무디게 만들잖아.”

어찌 ‘홍련’처럼 상징적인 검에 청련화를 발랐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보통은 실행하지 못할 일이었다.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청련화 따위는 명장의 검날을 망가뜨릴 수 없으니.”

“……명장?”

빈첸은 대장장이 한센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

영광된 자리에 그의 이름은 함께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었으니까.

“이 검은 명장, 한센이 제련해 주신 검이다.”

칸이 한센의 검으로 시작을 알렸듯.

빈첸도 한센의 검으로 시작을 알렸다.

어느새 카곤의 오른팔이 모두 회복되었다.

그리고 헤르카가 빈첸의 승리를 인정했다.

“친선교류회의 승자는 빈첸 생도이다.”

빈첸에게 말했다.

“빈첸 생도는 승리를 선언하라.”

빈첸은 카곤을 바라보았다.

친선교류회 이전과 이후는 많이 다를 것이다.

“이제는 네가 컨텐더(*도전자)다.”

와아아아-!

검투장에는 거대한 함성 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 * *

붉은 요새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대다수가 아덴카의 방계이거나, 아덴카에 호의적인 가문의 자제들이라 더욱 그랬다.

“와, 진짜 이겼잖아?”

셀비라는 물론이거니와 9급 생도들이 존경의 눈빛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당대 친선교류회에서 사미온의 직계를 꺾은 두 번째 아덴카가 되었다.

“솔직히 나는 네가 당연히 질 줄 알았어.”

누가 알았겠는가.

빈첸이 카곤의 오른팔을 베어낼 줄은.

“뭐랄까, 그건 실력의 영역이 아닌 것 같았어.”

여전히, 누가 뭐라 해도 객관적인 실력은 카곤이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첸이 승리했다.

‘빈첸은 볼 때마다 새롭다니까.’

빈첸을 보면서 배웠다.

실력만이 무인의 모든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었다.

실력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빈첸에게는 있었다.

셀비라는 그것을 무인 본연의 ‘격’이라 이해했다.

“네가 적만월에 검을 휘둘렀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

“진짜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구.”

정말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카곤의 검이 빈첸의 목에 닿았을 것이다.

“아무리 헤르카 경이 중재해 주고 있다지만.”

셀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심 좀 하지.

그녀는 빈첸의 승리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한편, 빈첸의 전략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셀비라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멋있기는 했는데…….”

“…….”

“그래도 나는.”

속으로만 이어 말했다.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너무 위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목숨은 한 개란 말이야.’

카곤의 검기가 빈첸의 목에 떨어지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왠지 빈첸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것 같아서 말하지는 않았다.

무인에게 다치지 말라고 말하는 건 모욕이라고 받아들일 것 같았다.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네가 이겨서 기뻐. 지금 소식지 기자들이 아주 바쁜가 봐. 네가 말한 최고의 명장에게도 기자들이 엄청 파견되고 있는 모양이야.”

빈첸은 마리아와 단독으로 인터뷰를 하면 되어서 크게 바쁘지는 않았다.

정말 바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빈첸에게 인터뷰를 허락받은 윌슨이었다.

그는 시종들 앞에서 못다 한 자랑을 기자들 앞에 쏟아냈다.

“엣헴. 그렇죠. 공자님의 심! 복! 인 저, 윌! 슨! 이 청련화를 달인 물을 미리 준비했죠, 후후.”

“그렇다면 빈첸 생도는 카곤 공자가 어떻게 반응할지 미리 예측했다는 것인가요?”

“저는 그분의 깊고 높은 뜻을 모릅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소식지들은 앞다투어 그 소식을 전했다.

대륙 전체에 빈첸의 승리가 전해졌다.

빈첸이 언급한 명장 한센의 이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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