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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49화 (49/184)
  • 환생의 정석 49화

    쇠창살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빈첸은 홍련을 든 채 검투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후우-

    호흡을 들이마셨다.

    환호성을 지르는 생도들.

    빈첸 자신의 등장과 동시에 바빠진 소식지의 기자들.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마법사단장과 휘하 마법사들.

    붉은 요새의 관련자들과 상급 생도들까지.

    ‘이곳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집중했다.

    저만치 멀리.

    쇠창살에 갇혀 있는 한 마리의 리자드맨을 보았다.

    ‘남은 것은 나와 마물 뿐.’

    리자드맨은 커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가늘어진 눈동자는 오로지 빈첸을 향한 살심만이 가득했다.

    빈첸은 두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눈에 힘을 주고 리자드맨을 노려보았다.

    ‘고요하구나.’

    환호성이 들리지 않았다.

    시야를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보이는 것은 오로지 리자드맨뿐이었다.

    ‘아밀룬 검식.’

    친구의 검을 떠올렸다.

    영혼에 각인된 친구의 검.

    ‘마나는 더욱 무겁게.’

    심장에서 샘솟는 마나를 다스렸다.

    중첩하고 또 중첩했다.

    ‘더욱 무거워야 한다.’

    마나가 무거워지면 흐름이 느려진다.

    흐름이 느려지면 신체의 속도와 검속도 느려진다.

    그러나 파괴력은 강해진다.

    그만큼, 마력회로에 가해지는 부담도 컸다.

    ‘내 친구의 검은 이보다 더욱 무거웠기에.’

    팔콘의 검은 무거운 검이었다.

    아밀룬의 검식이 표방하는 것은 무거운 고요였다.

    그렇기 위해 스스로 고요하고 무거운 상태를 만들어야 했다.

    발바닥으로 지면을 느꼈다.

    마나를 흘려보내 몸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육중한 마나가 마력 회로 곳곳에 흐르기 시작했다.

    [“빈첸 공자는 카곤 공자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빈첸에게서는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마나가 쉴 새 없이 흐르며 빈첸을 고요하고 무겁게 만들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과정은 아니었다.

    율리안은 있지도 않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빈첸의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마력회로를 한계까지 구동하고 있어.’

    빈첸의 마력회로는 약했다.

    연약해진 천골 때문에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지금 이런 마나를 사용하는 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형님.’

    빈첸은 늘 말했다.

    500년 전 무인들은 모든 순간 목숨을 걸었다고.

    그걸 스스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고통이 빈첸의 몸을 잠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빈첸은 작은 신음성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크르륵!

    리자드맨이 달려들었다.

    빈첸과의 거리가 점차 좁혀졌다.

    빈첸은 리자드맨을 느꼈다.

    눈으로 보고, 기감으로 느끼고, 자신의 거리 안으로 유도했다.

    ‘다가온다.’

    빈첸은 느릿느릿, 한 발을 뒤로 빼었다.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빈첸 공자의 몸이 지나치게 둔합니다. 너무 느린데요.”]

    [“왜 저러는 걸까요?”]

    마법사단장 알베르토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뭘 하려고?’

    지금 당장에라도 나서서 방어벽을 생성시켜줘야 하나.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다만, 헤르카는 조금 다르게 보았다.

    헤르카는 빈첸이 ‘중검’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리자드맨을 상대로 중검이 나쁜 선택은 아니야.’

    중검은 느리지만 파괴력이 강하다.

    그래서 다수의 무인들이 중요한 순간 필살의 공격으로 사용하곤 했다.

    제대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리자드맨을 양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 4성 이상의 단련된 무인이어야 했고, 그에 유리한 가호와 특성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지금 빈첸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타이밍도 느리고.’

    현대 무인 헤르카의 눈에는 빈첸의 타이밍이 너무 느렸다.

    ‘리자드맨의 거리는 네 생각보다 길다고.’

    리자드맨은 창을 다룬다.

    빈첸은 검을 다룬다.

    창은 검보다 거리가 길다.

    헤르카가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때, 빈첸이 검을 휘둘렀다.

    리자드맨도 창을 뻗었다.

    푸욱!

    빈첸의 옆구리에 리자드맨의 창이 꽂혔다.

    [“비, 빈첸 공자의 옆구리에 창이 꽂혔습니다!”]

    현대무인들의 기준으로, 빈첸은 큰 부상을 입었다.

    다들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 * *

    빈첸은 심장으로부터 마력을 이끌어 내어 온몸에 고루 퍼뜨렸다.

    그리고 홍련에 새겨진 뇌력거인의 힘을 사용하여 아밀룬의 검에 덧입혔다.

    아밀룬 제1검식.

    중검양단(重劍兩斷).

    무거운 검으로 짓눌러 둘로 나누는 검에,

    치직-

    가벼운 뇌기가 서렸다.

    ‘뇌력거인의 힘을 덧씌운다.’

    무거운 검에 파괴적인 기운이 덧입혀졌다.

    보였다.

    리자드맨의 몸이.

    ‘벤다.’

    슈걱!

    리자드맨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한 채 리자드맨은 그대로 절명했다.

    푸악!

    리자드맨의 피가 솟구쳤고 빈첸은 그 피를 피하지 않았다.

    카곤이 리자드맨을 사살하는 데 걸린 시간은 6분이었으나, 빈첸이 리자드맨을 죽이는 데 걸린 시간은 45초였다.

    검투장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중계인들조차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피…… 피를 뒤집어쓴 야차가 서 있습니다.”]

    저것이 빈첸이 흘리는 피인지.

    리자드맨이 흩뿌린 피인지.

    그들은 구별하기 어려웠다.

    빈첸의 몸에는 여전히 리자드맨의 뼈로 만들어진 창이 꽂혀 있었다.

    [“빈첸 공자가 대 마물전을 마무리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총 45초입니다.”]

    역대 최단시간이었다.

    환호성은 들리지 않았다.

    환호보다 시끄러운 침묵이 감돌았다.

    [“2차 관문 대마물전에서 저 정도 부상을 감수하는 경우는 처음입니다만…….”]

    다친다면 보통 실력이 부족해서 다친다.

    다만, 지금껏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친선교류회’는 아덴카와 사미온의 직계가 참여하므로.

    오늘 같은 부상은 꽤 큰 부상이었다.

    [“빈첸 공자 역시도 꽤 큰 부상을 감수한 듯합니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리자드맨을 반으로 갈라버릴 수 있는 무위를 지닌 자가, 어째서 리자드맨의 공격을 허용했단 말인가.

    검투장에서 저토록 피를 흘리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빈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창을 쑥- 빼버렸다.

    -혀, 형님, 괜찮아요?

    ‘이 정도 부상은 부상 축에도 끼지 않는다.’

    알고 당한 부상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다.

    심장에도 검이 꽂혔던 빈첸이고, 500년 전 이 정도 부상은 정말로 흔한 부상이었다.

    빈첸은 옆구리에 꽂힌 리자드맨의 창을 양손으로 잡았다.

    힘을 살짝 주자 창이 쑥 뽑혀 나왔다.

    빈첸은 무심하게 창을 땅에 툭! 던졌다.

    [“빈첸 공자가 창을 뽑아냈습니다.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한 표정입니다.”]

    리자드맨의 창이 땅에 떨어졌다.

    빈첸의 강대한 마나에 침식당했던 리자드맨의 창은 이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생도들이 와아-! 하고 함성을 내질렀다.

    출입을 허가받은 마리아가 재빨리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빈첸 공자.”

    “저는 생도입니다.”

    “빈첸 생도. 어째서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리자드맨을 사살한 겁니까?”

    빈첸이 카곤이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를 상대하려는 자의 준비가 조금 나태한 것 같아서요.”

    그의 음성과 모습은 음성 증폭기와 영상 재생석을 통해 곳곳에 전달되었다.

    휴식을 취하던 카곤도 빈첸의 허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빈첸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했다.

    현대 무인들은 그리 선호하지 않는 방식.

    아니, 생각하지 않는 방식.

    그 방식을 카곤에게 보여주었다.

    각오를 달리하라고.

    방심한 사미온을 꺾는 것에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보았느냐?’

    또한 율리안에게도 보여주었다.

    ‘옛 무인들은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고통을 꺼려 하고 피하고자 하는 현대 무인들과는 달리 말이다.’

    안전을 위한 중재 무인 같은 것도 없었다.

    작은 마물을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손쉽고 효율적으로 토벌할 수 있다면, 부상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렇게 했다.

    부상이야 신관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치료하면 되는 거니까.

    지금의 고통만 참으면 되었고, 빈첸은 고통을 참는 것에 누구보다 익숙했다.

    율리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겨우 말했다.

    -진짜로 무식하고 야만적이네요.

    그러나,

    -효율적인 것도 맞네요.

    고통만 감내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효율적이니까.

    -서 있는 건 괜찮아요?

    중검을 위하여 무거운 마력을 구동했다.

    마력회로에 안 그래도 부담이 많이 갔을 텐데, 거기에 뇌기까지 운용했다.

    두 가지 기운을 한 번에 사용하는 것은 하나의 기운을 사용하는 것보다 최소 세 배 이상은 힘들었다.

    ‘물론.’

    조금 어지럽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율리안이 중얼거렸다.

    -괜찮다의 기준이 너무 괴이한 것 같아.

    빈첸이 물었다.

    ‘네가 보기에는 괜찮았느냐?’

    -괜찮을 리가요. 체븐 신관을 미리 대기시켜놔서 망정이지, 마력회로 녹아내릴 뻔한 것 같은데요.

    ‘아니. 그거 말고.’

    빈첸은 친구의 검을 보여주었다.

    팔콘의 검.

    그의 검을 부끄럽게 사용하면 안 되었다.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빈첸 생도의 방식이 흔한 것은 분명 아니었으나……! 그의 검이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의 검으로 리자드맨으로 양단했습니다! 실로 놀라운 무위였으며, 빈첸 생도가 일부러 부상을 허용했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합니다!”]

    [“이 충격적인 방식이 카곤 공자에게는 분명한 경고가 되겠군요!”]

    빈첸을 독점하지 못한 소식지의 기자들은 앞다투어 헤르카에게 달려갔다.

    “헤르카 경께서 방금 빈첸 공자의 검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헤르카 경은 방금의 검식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헤르카가 몰려든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도 몹시 궁금했다.

    어떻게 빈첸이 저런 검을 구사할 수 있는 건지.

    “방금의 일격만큼은 4성 무인.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중검’을 극한으로 익힌 무인.

    중검을 다루는 가호와 특성을 가지고 있는 무인의 것.

    “제 짧은 식견으로는, 저 나이의 그 누구도 저 정도 파괴력을 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가호의 도움 없이는 말입니다.”

    가호와 특성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빈첸에게는 가호가 없고 특성이 없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게다가 미약한 뇌기까지 다루었어.’

    그녀는 알고 있다.

    가호의 도움 없이 뇌기를 다루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행위인지를.

    그리고 뛰어난 안력을 지닌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홍련에 뇌력거인의 가호가 새겨져 있어.’

    저런 경우는 처음 봤다.

    검에 가호를 심어서 사용하다니.

    ‘뇌력거인의 힘이 분명해.’

    그 힘은 위험한 힘이다.

    그 위험한 기운을, 부상을 입은 채 운용했다.

    그렇다는 말은 빈첸이 고통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고통을 예상했다고 해도, 그게 가능한가?’

    저 정도 고통을 여러 번 경험한 무인도, 아무리 부상에 익숙하다고 해도, 저 상태에서 중검과 뇌기를 한 번에 운용할 수는 없다.

    그게 현대 무인 헤르카가 가진 상식이었다.

    “아무래도 빈첸은 저의 상식에서 무척이나 벗어난 생도 같군요.”

    마지막 한 마디로 빈첸의 검을 정리했다.

    “방금의 일격만큼은 저도 배우고 싶을 만큼 훌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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