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47화 (47/184)
  • 환생의 정석 47화

    빈첸은 카곤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역겹군.’

    동의를 구하는 듯한 카곤의 표정에 빈첸은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그러나 이제 빈첸은 데이븐이 아니었다.

    무작정 정의를 꿈꾸었던 데이븐은 죽었다.

    오래전, 사미온의 지하감옥에서.

    “네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나. 제물을 이용하여 술식을 펼쳤다면, 내 상식에서 이건 저주다. 나는 무인으로서 저주를 묵과할 수 없어.”

    “사미온의 정통 술식이야. 홀리만 장로님을 불러 보증할 수도 있어.”

    빈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카곤은 그 침묵을 동의로 이해했다.

    “이번에는 우연히 내 일을 망쳤겠지만, 다음번에는 조심해 주면 좋겠군.”

    빈첸은 조금 더 침묵하다가 물었다.

    “사미온의 방법이 곧 정도(正道)인가?”

    “……뭐?”

    “너희들의 방식이라는 것이 정의를 뜻하는 건 아니야, 카곤.”

    카곤과의 대화를 통해 빈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상부로 일이 보고되어 공식적으로 처리되면, 카곤에게 유리해질 거다.

    본질이 비록 흑마법과 같다 할지라도, 이것은 사미온의 방식이니까.

    흑마법사의 저주는 지탄되어야 마땅하지만, 사미온의 방식은 옳은 것이니까.

    그들에게는 힘이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랬다.

    “너희들의 방식이 너희들에게는 옳을지 모르겠으나.”

    저들에게는 옳았다.

    500년 전에도 그랬다.

    억울하게 죽었던 데이븐은 대악마로 기록되어 명예가 더럽혀졌고.

    치졸하고 비겁했던 카진은 영웅왕으로 기록되어 칭송받고 있다.

    그조차 사미온의 입장에서는 옳았던 것이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

    “…….”

    빈첸과 카곤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카곤이 어깨를 으쓱하고서 말했다.

    “좋은 눈이네.”

    카곤은 빈첸의 태도를 좋게 보았다.

    무인은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해야 한다.

    빈첸은 그렇게 했다.

    카곤이 말을 이었다.

    “너무 좋은 눈이어서, 우리는 친구가 되기는 어렵겠어.”

    “본래부터 너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없었어.”

    한 명은 사미온의 직계.

    또 한 명은 아덴카의 직계다.

    둘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아덴카의 사명이 곧 사미온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참, 아쉽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카곤이 먼저 몸을 돌렸다.

    “그래도 내 경고를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다음에도 내 일을 망친다면 오늘처럼 넘어가지는 않을 거야.”

    “…….”

    “죽여 버릴 거거든.”

    빈첸은 카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형님, 왜 그래요?

    율리안은 빈첸이 감정 조절을 굉장히 잘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율리안이 느끼는 빈첸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빈첸의 심장에 자리 잡고 있는 마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잘 참았잖아요. 대처 잘했는데, 갑자기 왜 그래요! 형님!

    순간, 빈첸은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살기를 방출할 뻔했다.

    ‘카곤의 뒷모습에서 기이한 것을 보았다.’

    빈첸은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이고 있었다.

    -기이한 거요? 그게 뭔데요?

    * * *

    어린 시절.

    데이븐은 카진의 ‘도움 친구’로 파견되었었고, 카진에게 많은 괴롭힘을 당했었다.

    그때 데이븐은 카진에게서 기이한 기운을 느꼈었다.

    ‘칼 한 자루 같은 느낌.’

    물론,

    검과 몸이 하나가 된 경지에 이르면 무인의 모습이 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당시의 카진은 그 정도 수준의 무인은 아니었다.

    어렸던 데이븐은 저 기운이 어딘지 모르게 인위적이라고 느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일렁이는 검붉은 기운.’

    그 기운은 카진이 크게 방심했을 때에 새어 나오는 기운이었다.

    어린 시절 카진은 어른들 앞에서 그 기운을 뿜어낸 적은 없었고, 그가 어른이 되어서는 한 번도 외부로 그 기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카진의 기운과 똑같아.’

    그의 등 뒤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곤을 볼 때마다 느꼈던 이유 모를 찝찝함이 저것 때문인 것 같았다.

    -네?

    ‘카진의 기운이라고.’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는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세요.

    ‘검과 같은 기세. 적황미력이되 적황미력과는 미묘하게 다른 검붉은 기운. 카곤을 둘러싼 기이한 일렁거림. 저 모든 것들이 카진의 것이라고!’

    -뭐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율리안은 빈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빈첸은 멀어지는 카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느새 그 기운은 사라져 있었다.

    ‘잘못 보지 않았다.’

    흔히들, 어린 시절에 각인된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빈첸에게 있어서 카진의 기운이 그랬다.

    -뭘 잘못 보지 않았는데요?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카진의 기운이 카곤에게 담겨 있었다.’

    그쯤 되니 율리안은 이상함을 눈치챘다.

    -형님의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아요. 마치, 누군가가 개입해서 우리의 대화를 차단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대화를 차단한다고?’

    -네. 형님이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그게 안 들려요. 이건 우연히 이렇게 될 수는 없어요.

    빈첸은 잠시 고민했다.

    그사이, 카곤은 완전히 멀어졌고 빈첸이 작게 중얼거렸다.

    일부러 육성으로 말했다.

    “나의 정체는 대악…….”

    그때,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아악! 그만! 그만요!

    어찌나 큰 고통을 느낀 건지, 빈첸에게도 그 정신적 고통이 일부 전달되었다.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이 끊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율리안은 한참이나 괴로워하다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영감님 이 자식아! 날 죽일 셈이냐!

    ‘…….’

    -요!

    빈첸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율리안이 이토록 괴로워할 줄은 몰랐다.

    ‘내 정체를 말했는데 왜 네가 그토록 괴로워하지?’

    율리안은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율리안 자신의 계산상 실수로.

    혹은 운이 나빠서.

    정령신이 아닌 이상한 존재가 들어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무엇인가 외력이 작용한 것 같아요. 형님과 제가 만나도록 치밀하게 설계한 거예요.

    ‘누가?’

    -그야 저도 모르죠.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신 정도일 것 같기는 한데…….

    ‘신?’

    -그렇지만 신은 이렇게까지 인간들에게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울 텐데…….

    저번에 율리안이 빈첸의 방울을 한 번 흔드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소멸을 걸어야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직접적인 개입을 한다?

    -그러니까 신은 아닐 것 같기도 해요. 진짜 모르겠네요. 도대체 누가? 왜? 어떻게? 저희에게 이렇게까지 간섭할 수 있는 건지. 진짜 중요한 건 여기까지 올 때까지 저조차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빈첸에게 율리안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율리안은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빈첸은 잠시 생각하다가 의지를 전달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율리안은 아는 것이 너무 많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고려하고 생각하려 든다.

    ‘지나치게 신중한 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누군가가 개입하여 이 만남을 계획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빈첸 자신과 율리안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걱정 마라.’

    중요한 건 하나였다.

    빈첸이 꿈꾸는 것과 율리안이 꿈꾸는 것이 같다는 것.

    꿈이 같다면 걸어갈 길도 같다.

    그거면 되었다.

    율리안에게 위로를 건넸다.

    ‘내가 살았던 시대에서도, 나는 당대 검제의 검을 부러뜨렸어.’

    말해줄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 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강하다고.’

    무력은 그때보다 약할지 모른다.

    신체는 언제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고, ‘천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천골을 완벽히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최강의 검식이라 불리는 사미온의 검식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빈첸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때보다 지금이 강하다고.

    ‘그때의 나는 혼자였으나 지금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율리안이 함께하고 있다.

    빈첸에게 없는 것이 율리안에게 있었다.

    율리안과 함께라면 훨씬 더 높은 곳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우습게도 이 어린 잡신은 빈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늘 보고 있으니까.

    ‘그러니 혼란스러워할 필요 없어.’

    이것은 위로이자 진심이자 다짐이었다.

    ‘너와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흔들리지 않아도 돼.’

    빈첸은 허공을 응시했다.

    아덴카는 물론이거니와 사미온도 넘어서야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을 배신했던 사미온가(家)라고만 생각했다.

    영웅왕의 후손들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500년 전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 과거는 현재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카진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500년이 지났어도.

    그 냄새와 기운은 잊혀지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아.’

    그 말을 달리하자면, 앞으로 알아가야 할 것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재미있겠군.’

    새로 얻은 목숨.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 * *

    율리안은 혼란스러워하기는 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빈첸은 혹시 걱정하고 있을 세리를 찾아 괜찮다는 것을 알려준 뒤 생활관으로 복귀했다.

    그는 9급 생활관 내, 셀비라가 생활하고 있는 3생활관을 찾았다.

    “셀비라.”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셀비라가 벌떡 일어섰다.

    “빈첸?”

    그녀의 얼굴이 화사하게 물들었다.

    빈첸이 셀비라의 생활관을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쩐 일이야, 갑자기?”

    “손 좀.”

    “소, 손?”

    셀비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3급 생활관에서 생활하는 생도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중에는 이번에 빈첸과 함께 1차 관문 승리를 장식했던 하몬도 있었다.

    셀비라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까.”

    “뭘 확인해야 하는데?”

    네 저주.

    그렇게 말하기는 조금 애매했다.

    “그냥, 좀 주면 안 될까?”

    “…….”

    셀비라는 괜스레 생도들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내밀었다.

    하몬은 곁눈질로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손을 뭐 저렇게 오래 잡고 있어?’

    빈첸은 한참 동안 셀비라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없어졌군.’

    그래도 조금 더 확인해 보았다.

    눈을 감고 엄지손가락으로 셀비라의 손바닥을 살살 문질렀다.

    셀비라는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야?”

    “다 됐어.”

    “무슨 의미가 있는 행동이야?”

    “너를 위한 행동.”

    ‘제1 사슬식’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행히 별다른 후유증 같은 것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이야.”

    “응?”

    빈첸은 자세한 것을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굳은살이 많네.”

    그 말을 끝으로 빈첸은 몸을 돌렸다.

    빈첸 입장에서는 큰 칭찬이었다.

    굳은살은 단련된 무인의 척도나 다름없었으니까.

    빈첸이 밖으로 나간 뒤, 셀비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련 열심히 해서 그렇거든?”

    셀비라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하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곁눈질로 셀비라를 바라보고 있던 하몬이 움찔 놀랐다.

    “왜, 왜?”

    “그거 빌려줘.”

    “그거라니?”

    “그거!”

    “그니까, 그게 뭔데?”

    셀비라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네가 쓰는 재생크림! 마탑에서 만든 거.”

    “이, 이거?”

    마탑에서 만들어낸 재생크림 덕분에 하몬은 늘 뽀송뽀송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굳은살이 하나도 없었다.

    사교계에서는 필수품이었고, 무인들 중 일부에게도 꽤 인기가 있는 크림이었다.

    “그게 효과가 엄청 좋다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