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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46화 (46/184)

환생의 정석 46화

빈첸은 세리에게서 또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전 생에서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내리사랑.

이 감정은 빈첸에게도 꽤 소중한 것이었다.

“그냥 뭔가를 좀 찾고 있는데.”

저주를 직접 풀어낼 수 없는 경우, 술식을 해금하는 또 다른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술식에 사용된 매개체를 찾아 없애는 것이었다.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어서.”

“그게 무엇인가요?”

“저주에 사용되었을 법한 제물.”

“저, 저, 저주요?”

세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듣기에는 굉장히 무시무시한 단어였다.

“무서운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그 저주 말인가요?”

흑마법사들에 대한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나빴다.

그들은 늘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악한 집단으로 규정되었고,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 또한 그랬다.

“맞아.”

세리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그, 그런 불길한 것이 붉은 요새에 있을 리가 없는데…….’

그렇지만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빈첸이었다.

세리는 빈첸이 잘난 모습을 보이기 이전부터 늘 빈첸의 편이었다.

지금은 더욱 그랬다.

“혹시 어떤 종류일까요?”

“작은 동물의 시체 같은 것이 어딘가에 묻혀 있을 확률이 높아.”

너무 거창하게 숨기려 들면 티가 날 것이다.

따라서 카곤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척 제물을 숨겼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어쩌면 근처에 제대로 된 무덤을 만들어주었을지도 모르죠.

혹시라도 누군가 발견하면 불쌍하게 죽임을 당한 동물을 묻어주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어쩌면 작은 무덤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세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세리가?”

“네.”

그녀는 조금 더 고민하다가 힘겹게 말했다.

“사실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말을 안하고 있었는데요.”

세리는 걱정하는 듯했다.

빈첸마저도 세리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볼까 봐.

“세리. 난 널 믿어.”

“…….”

세리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빈첸의 말이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다.

“요즘 이상한 목소리들이 자꾸 들려요.”

“이상한 목소리?”

“재잘재잘 떠드는 것 같은 소리요. 자꾸 저한테 말을 걸어요.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주기도 해요.”

“…….”

“그런데 자꾸 살려달라는 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려요.”

세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도 들렸어요.”

빈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빈첸은 율리안에게 물었다.

‘저런 경우가 있어?’

-잘 모르겠어요.

‘하긴, 마력체도 처음 들어보는데, 이런 현상은 당연히 모르겠지.’

-지금 저 무시한 거예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저런 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기는 해요! 정령의 목소리를 자연스레 듣는 타고난 정령술사들. 혹은 귀문이 열려 귀신들과 소통하는 귀력술사들. 그들에게서 저런 경우를 찾아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세리는 마법을 익히고 있잖아요. 마법을 익힌 자는 정령술사도, 귀력술사도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이런 경우를 모르겠다고 한 것뿐이에요. 아무것도 몰라서 모른다고 한 게 아니라고요! 설명해 봤자 어차피 결론만 말하라고 구박할 거면서!

‘그럼 아는 거지, 왜 모른다 했어?’

율리안은 이익! 하고 분노에 찬 일갈을 내뱉었다.

빈첸이 물었다.

“세리.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날 안내해 주겠어?”

* * *

빈첸은 세리와 함께 생활관을 나섰다.

생활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연무장 근처 화단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피어 있는 곳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한 곳에 파헤쳐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세리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목소리가…… 들려요.”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존재가 내뱉는 비명성 같은 소리였다.

“살려달라고 자꾸 빌고 있어요. 죽고 싶지 않대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세리의 마력이 널뛰기 시작했다.

“흑, 흐흑……!”

세리는 한참 동안 울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것을 보았다고 했다.

“세리.”

빈첸은 세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울고 있는 세리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괜찮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어.”

세리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크게 겁을 먹은 것 같아 어깨를 토닥여주자, 차츰 세리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일단 세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빈첸은 화단 속으로 들어갔다.

맨손으로 조심스레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마나의 흐름이 영 이상하다.

작은 결계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이건…… 마정석?’

마나를 머금은 마정석이 보였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심어놓은 것이었다.

‘특수한 결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 같군.’

-맞아요. 일종의 봉인식 같아요.

무엇인가를 가둬두고 있다는 소리였다.

조금 더 땅을 파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군.’

그런데 그때, 세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공자님.”

“응?”

세리가 또 울고 있었다.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나왔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흙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안아 올렸다.

빈첸은 의아했지만 세리를 지켜보기만 했다.

‘뭐지?’

세리가 무언가를 조심스레 안아 들고 있었다.

세리의 손에 점차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은 아기 두더지 같은 것이 보였다.

-정령이에요!

일반적인 사람들은 정령을 보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정령은 보통 정령술사와 계약한 정령뿐이다.

-저, 정령이 왜 눈에 보이지?

아기 두더지 같은 정령의 몸이 깜빡거렸다.

소멸되기 직전인 것 같았다.

생명체로 치자면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는 형상이었다.

‘정령을…… 저주의 매개체로 쓴 건가?’

정령을 사용하여 사슬식을 사용한 것 같았다.

‘일부러 소멸되지 않도록 유지하면서.’

무척이나 잔혹한 방법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령은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저주의 방법도 진화한 거야.’

500년 전에 이런 저주는 없었다.

그때는 그 자리에서 제물을 죽여 저주를 활성화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죽음을 예정시킨’ 제물, 그것도 ‘정령’을 사용하여 저주술식을 풀어내는 모양이었다.

세리의 손에 들린 정령이 울음소리를 내었는데, 빈첸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들으니 알 수 있었다.

‘끔찍하구나.’

세리가 저토록 울고 있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정령의 울음소리는 처참했다.

‘등에 제1 사슬식 문양이 새겨져 있다.’

셀비라의 손에 새겨진 문양과 같았다.

카곤의 짓이 틀림없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편안히 보내주는 것 뿐인가.’

저주를 없애기 위해서 제물을 불태워 없애야 한다.

정령이니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소멸시켜야겠지.

사실 진작 소멸되어야 했다.

‘제1 사슬식’이 생명마저 억지로 잡아두고 있는 것이었다.

빈첸이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편안하게 보내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괴로워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내가 구해줄게.”

세리의 눈물 몇 방울이 아기 두더지에게 닿았다.

사슬식을 구성하는 마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리의 발밑에 커다란 정령문이 생성되었다.

-저, 정령계약?!

마나와는 또 다른 힘.

인간이 스스로는 다룰 수 없는, 오로지 정령의 힘을 빌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정령력이 지면으로부터 충만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세리가 조심스레 정령의 등에 입을 맞추었다.

‘사슬식이…… 사라지고 있다.’

제물을 죽이지 않았는데.

사슬식이 없어졌다.

괴로워하고 있던 정령은 어느새 건강을 되찾았다.

폴짝!

땅에 뛰어내린 정령은 삐융? 삐융? 삐융! 소리를 내었는데, 아마도 세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리는 그 말을 모두 알아듣는 듯했다.

“응, 정령계로 돌아가서 푹 쉬다 돌아오렴.”

세리가 손을 흔들었고 두더지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땅 밑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빈첸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세리.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오늘 있었던 일이라면…….”

“네가 정령과 계약했다는 사실 말이야.”

세리는 바르곤 경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다.

마법을 익히는 자는 정령과 계약할 수 없다.

“너는 지금 기적을 일으켰어. 전 대륙을 뒤져봐도 너 같은 체질은 없을 거야.”

스스로 마나를 받아들이는 마력체.

마법을 익히면서 또한 정령과 계약까지 진행한 희귀 케이스.

이 비밀이 세상에 퍼지게 되면, 세리의 몸을 궁금해하는 세력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거다.

‘나는 아직 네게 일어난 기적을 지켜줄 힘이 없어.’

세리는 코치코치 캐묻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스승님에게도 비밀로 해야 할까요?”

“일단은.”

“알았어요.”

빈첸이 세리에게 손을 뻗어 세리를 일으켜주었다.

아까 펑펑 운 탓에 세리의 눈은 여전히 붉었다.

그녀가 웃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저는 공자님께 도움이 되었을까요?”

* * *

빈첸은 세리를 돌려보낸 후, 화단 앞을 조금 더 살펴보았다.

‘카곤이 정령을 다룰 수 있나?’

‘제1 사슬식’을 펼친 자는 카곤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정령까지 그 스스로 다룬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건 없어요. 애초에 사미온 출신 정령술사 자체가 없는걸요.

이상한 일이었다.

계약되지 않은 정령을 보거나 만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에 가까운데, 카곤은 정령을 가지고 저주까지 사용했으니 말이다.

‘구린내가 많이 나는군.’

조금 더 살펴보았지만 정확한 것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카곤이었다.

“자꾸 이상한 비명소리가 들려서 말이야.”

“비명소리?”

카곤이 고개를 갸웃했다.

“2차 관문 때문에 신경이 과민한 모양이군.”

카곤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표정에 딱히 놀랐다거나 당황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카곤이 말을 이었다.

“빈첸. 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네가 내 일을 망쳤다.”

“네 일?”

카곤은 그다지 숨기지 않았다.

“이곳에는 내가 사미온의 정통 술식을 사용하기 위해 사용한 제물이 묻혀 있었거든.”

“…….”

빈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스스로 실토할 줄은 몰랐다.

“사미온의 정통 술식에 제물이 필요하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가문의 법규 같은 거라서. 철저하게 비밀은 아니지만 굳이 떠벌리지도 않지.”

“도대체 어떤 정통 술식이기에 제물이 필요하지?”

“벌을 내린 거야.”

“벌?”

“사람에게는 타고난 격이라는 게 있잖아.”

카곤의 눈에는 은근한 호감이 담겨 있었다.

빈첸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곤은 빈첸 자신을 ‘동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와 나처럼, 무거운 명운과 뛰어난 격을 지니고 태어난 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지.”

“…….”

“너도 알다시피 우리와 그들은 지배와 피지배로 나뉘는 거고. 적절한 지배를 위해서 적당한 훈계도 필요한 법이잖아?”

셀비라는 카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오며 감탄만 하라고 ‘명령’했는데 감히 움직였다.

결과적으로 카곤에게 유리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카곤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벌을 내려야만 했어.”

카곤이 빙그레 웃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너라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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