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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45화 (45/184)
  • 환생의 정석 45화

    검을 감싸고 있는 사슬 문양의 마나 낙인.

    지하감옥에 결박될 때, 데이븐이 당했던 봉인술식 중 하나였다.

    검에 대한 재능과 감각을 무뎌지게 만드는 사미온가(家)의 저주술식이었다.

    500년 전에는 ‘제1 사슬식’이라 불렸다.

    ‘이게 왜…….’

    말이 좋아 ‘사슬식’이지 저주였다.

    데이븐도 지하감옥에 갇히기 직전까지 사미온에 이런 술식이 존재하는지 몰랐다.

    그때에도 의아했었다.

    이러한 저주는 보통 심장을 매개체로 이루어진다.

    저주를 내리기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생명을 바친다.

    그것이 동물이 되었든, 마물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효과가 가장 좋은 것은 인간의 심장이기는 한데.’

    제물이 사람에 가까울수록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저주다.

    보통은 흑마법사들이 이러한 저주를 연구하고 개발했는데, 사미온은 흑마법사들을 처단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가문이기도 했다.

    그러니 데이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인간의 심장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아.’

    해당 저주를 직접 당해보았던 데이븐이기에, 대략적인 감이 왔다.

    아주 복잡한 술식이 얽혀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상황을 모른 채 손목을 잡힌 셀비라는 약간 당황했다.

    “왜, 왜 그래?”

    “단상 아래 있을 때. 카곤과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셀비라는 빈첸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신체접촉이라든가.”

    “신체접촉……?”

    빈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있었어, 없었어?”

    “그런 거 없었어. 그냥 평범하게 악수만 했을 뿐이야.”

    빈첸은 셀비라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셀비라의 손바닥을 노려보았다.

    그나마 한 줄이어서 다행이기는 했다.

    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복잡하게 꼬이면 꼬일수록 해금하기가 어려워지니까.

    “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매일 새벽 6시. 개인 수련을 떠나기 전에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어?”

    “……왜?”

    “봐야 할 것 같아서.”

    지금 빈첸의 능력으로는 한 번에 해금할 수는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봉인술식을 해제해야 한다.

    “나, 나를?”

    “그래.”

    셀비라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알겠어. 그럼 매일 새벽 6시에 만나자는 거지? 언제부터?”

    “내일 당장.”

    “내, 내일 당장?”

    내일은 좀 곤란할 것 같은데…… 라고 말하려던 셀비라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빈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안 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알겠어. 그럼 내일 새벽 6시에 만나.”

    그제야 빈첸은 셀비라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셀비라는 손을 내린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빈첸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곤 네놈.’

    정황상 카곤이 사슬식을 사용한 게 맞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카곤은 셀비라에게 저주를 내렸다.

    이유보다는 그 사실이 중요했다.

    ‘더러운 짓을 벌였구나.’

    빈첸은 저주에 관해 말해줄까를 잠시 고민했다.

    -저주에 관해서는 함구하는 게 좋겠어요. 증거는 있냐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알았느냐를 파고들기 시작하면 엄청 피곤해질 거예요. 만약 적절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역으로 공격당할 수도 있고요.

    저주에 관한 것은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 * *

    빈첸은 개인 수련실에 들어와 가부좌를 틀었다.

    본격적으로 명상식을 운용하기 전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 당장 따지고들 수는 없어.’

    율리안의 말대로다.

    카곤의 만행을 입증할 증거도 없다.

    율리안에게 물었다.

    ‘카곤이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건, 들키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어서겠지?’

    -헐? 형님도 생각이란 걸 하시는구나.

    율리안은 약간 놀랐다.

    당장에라도 카곤을 찾아가 옳고 그름을 따질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던 차였다.

    그런데 빈첸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침착했다.

    ‘이 시대의 무인들은 예전과 달라. 세리의 마나도 느끼지 못했고, 어쩌면 저주와 관련된 것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거야.’

    이 시대의 무인들은 세리의 마나를 느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빈첸 자신의 마나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심상 이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심상 이론에서 벗어난 것들에 대해서는 예전보다 더 무지했다.

    -저도 그렇게 판단했어요. 헤르카 경이나 바르곤 경, 심지어는 마탑 마법사인 알베르토 경에게도 들키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겠죠. 근데 그게 저주가 맞긴 맞아요? 형님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빈첸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율리안이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읽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내 모든 생각을 읽고 있지 않나?’

    사실 빈첸은, 외팔이 데이븐이었던 자신의 정체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거라고 판단하던 중이었다.

    서로 암묵적으로 말만 안 하고 있는 줄 알았다.

    -모든 것을 읽지는 못해요. 어떤 것들은 희뿌옇게 가려져 있어요.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아요.

    ‘어째서?’

    -형님이 감추고 싶은 것까지 끄집어내서 볼 수 있을 만큼 동조율이 높지 않아서? 형님도 제 모든 생각을 구체적으로 다 읽어내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이 맞기는 했다.

    빈첸도 율리안이 몹시 크게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뿐, 모든 것을 읽어내지는 못했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저주인 건 확실한 거죠?

    ‘그래.’

    -어떻게 알았는지는 안 가르쳐줄 거죠?

    ‘때가 되면 가르쳐주마.’

    -뭐, 나는 형님이 옛날에 날고 기는 흑마법사였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빈첸은 늘 율리안이 고안했던 최선 이상의 최선을 보여주었으니까.

    빈첸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율리안이 갈망하던 것들이었으니까.

    빈첸은 잡념을 떨쳐내며 명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셀비라는 약속시간에 맞추어 개인 수련실 앞에 나와 있었다.

    “빈첸.”

    “…….”

    빈첸은 조금 의아했다.

    “……너.”

    셀비라는 평소와 많이 달랐다.

    수련을 할 때 늘 질끈 동여맸던 기다란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상태였다.

    평소와는 달리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하고 풍성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수련할 때와는 달리 하늘하늘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사교장에서 입는 드레스만큼 격식을 갖춘 것은 아니었으나 수련을 하기에는 분명 불편한 복장이었다.

    “수련 복장이 영 이상한데.”

    “…….”

    셀비라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내가 뭘 생각한 거야?’

    크흠, 크게 헛기침하며 빈첸의 시선을 피했다.

    “가끔 기분전환 겸 이렇게 입고 수련하기도 해.”

    “……왜?”

    “옷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적은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빈첸은 그제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파티에서도 암습자들은 나타날 수 있는 노릇이다.

    “네 수련법을 존중하지.”

    어쨌든 중요한 것은 복장이 아니라 사슬식이었다.

    일단 이 사슬식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했다.

    빈첸이 말했다.

    “내가 호법을 설 건데, 너는 마력자전을 시키면서 유독 흐름이 걸리는 곳이 있는지 집중해 봐.”

    “왜?”

    빈첸도 사실 대답할 말이 궁하기는 했다.

    대충 둘러댔다.

    “어쩐지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음, 알겠어.”

    셀비라는 별다른 의심 없이 명상을 시작했다.

    빈첸은 셀비라를 무인의 눈으로 열심히 관찰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셀비라가 눈을 떴다.

    “한 번 끝냈어.”

    “이상한 점은?”

    “잘 모르겠는데? 이상한 점이 있어야 해?”

    흐름이 이상한 지점을 전혀 찾지 못했다.

    이 또한 심상이론의 단점이었다.

    심상이론은 매우 효율적이고 안전한 방식이다.

    약간의 문제나 오류가 있어도, 공식대로 유도하면 별 무리 없이 마력자전이 진행된다.

    시전자 입장에서는 사소한 문제 같은 건 인식하지도 못한다.

    ‘본래 어딘가 흐름이 답답한 곳을 느끼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심상을 사용하지 않고 마력자전을 해보라고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 더 해볼까?”

    “알겠어.”

    셀비라는 군말 없이 빈첸이 하자는 대로 했다.

    다시 몇 차례 명상을 끝내고서 빈첸이 말했다.

    “손을 잡고 명상을 하는 게 좋겠군.”

    일단 저주술식이 새겨진 곳이 손바닥이다.

    저주가 전달된 방식은 ‘신체접촉’이었고.

    빈첸은 저주가 내려진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저주의 흔적을 느껴보려 했다.

    “소, 손을 잡고 명상을 같이 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봐.”

    “꽤 흔한 방법이야.”

    “그, 그래?”

    신체접촉을 통해 마력흐름을 관찰하고 도와주는 것.

    500년 전에는 흔한 방법이었다.

    보통 스승이 제자에게 이렇게 해주었었다.

    심상이론이 발달된 지금은 사라진 방식이지만.

    “그래.”

    “아, 알겠어.”

    셀비라는 얼떨결에 손을 내주었다.

    빈첸과 손을 잡고 마주 앉아 명상을 시작했는데, 명상에 도통 집중이 되질 않았다.

    빈첸의 말이 들려왔다.

    “마력 흐름에 집중해.”

    “…….”

    “마력이 너무 널뛰고 있잖아.”

    그 말이 맞았다.

    셀비라의 신경이 온통 맞잡은 손으로 가 있었다.

    도무지 명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력의 세기가 일정하지 않고 도통 널뛰는 바람에 제대로 된 흐름이 나오지 못했다.

    ‘심상이론이 아니었으면 위험했겠어.’

    현대무인들이 마나를 다루는 방식은, 옛무인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했다.

    심장박동을 따라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마나라니.

    빈첸의 입장에서는 생경하다 못해 끔찍할 지경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래서야 사슬식 포인트를 찾아낼 수가 없겠군.’

    그날 수련은 거기서 끝내기로 했다.

    현재 빈첸의 능력으로는 셀비라의 사슬식을 풀어줄 수가 없었다.

    -형님. 친선교류회의 2차 관문이 이틀 뒤인 건 알죠?

    율리안에게는 셀비라의 안위보다 빈첸의 영달이 우선이었다.

    당장 이틀 뒤에 있을 친선교류회가 셀비라에게 내려진 저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고.

    ‘안다.’

    -일단 친선교류회에 더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주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강해져.’

    저주가 처음 내려졌을 시점부터 3일.

    그 시간이 골든타임이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저주를 해금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진다.

    -그래도요. 우리한테는 친선교류회가 더 중요한 거잖아요.

    ‘율리안. 부디 무엇이 더 중한 것인지 깨닫기를 바란다.’

    빈첸도 율리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한때 데이븐도 목표만을 위해 살았었으니까.

    ‘목표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는 사람을 잃어.’

    사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외팔이 데이븐 주변에 그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토록 무력하게 죽지는 않았으리라.

    한편,

    빈첸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던 세리는 은근슬쩍 빈첸의 눈치를 살폈다.

    바르곤에게 마법을 사사받느라 무척 바빴지만 저녁 식사만큼은 직접 대접했다.

    그게 세리도 마음이 좋았다.

    “공자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걱정이라기보다는…….”

    그녀는 귀신같이 빈첸의 마음을 읽어냈다.

    “제게 말씀해 주세요. 비록 잘난 건 별로 없지만, 공자님의 고민을 들어드릴 수는 있답니다.”

    그녀조차도 알지 못했다.

    오늘의 경청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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