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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44화 (44/184)

환생의 정석 44화

1차 관문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많은 소식지의 기자들이 카곤 자신이 아닌 빈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카곤이 빈첸을 향해 걸어갔다.

“빈첸.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생도들이 환호를 멈추었다.

빈첸과 카곤의 ‘대화’ 역시도 친선교류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가 샅샅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네가 시간을 오래 할애할 것을 알았다. 덕분에 내가 먼저 푸락투아를 사냥할 수 있었고, 1차 관문을 먼저 통과할 수 있었어.”

“네가 그 푸락투아를 사냥했단 말이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지.”

빈첸의 뒤에는 두 명의 생도가 서 있었다.

카곤의 눈으로 보았을 때 ‘훌륭한 동료’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생도들이었다.

“그렇…… 군.”

카곤 자신도 셀비라의 도움을 받았다.

아마 빈첸도 비슷한 방식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짐작했다.

납득하지 못할 얘기는 아니었다.

카곤이 빙그레 웃었다.

“1차 관문은 내 패배구나.”

빈첸은 카곤의 웃음 속에 숨겨진 칼날 같은 기세를 읽어냈다.

강한 승부욕이 느껴졌다.

“내가 너를 너무 얕본 것 같다. 인정하지.”

“…….”

“그러나 다음에 또 같은 이변은 없을 것이다.”

“그래 주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빈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카곤이 그 손을 맞잡았다.

다시금, 대연무장에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리아가 순식간에 소식지를 작성했다.

[아덴카의 6공자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무력의 우월이 아니었다.]

그동안의 ‘친선교류회’와는 양상이 많이 달랐다.

아덴카의 2공녀가 됐든, 다른 사미온의 자제가 됐든, 어쨌든 ‘친선교류회’의 주인공은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이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여 왔었다.

[빈첸 공자의 승리는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였다.]

[그 경지의 승리에는 전략이 있었고, 통찰이 있었고, 동료들의 성장과 동행이 있었다.]

실제로 가장 열등생이었던 하몬이 엉엉 울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것에서 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열등생이 사미온의 천재 위에 올라서는 순간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헤르카가 단상을 내려와 빈첸과 카곤 사이에 섰다.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원래는 3시간짜리 관문인데.’

오늘은 그게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녀가 1차 관문의 승리자를 호명했다.

“1차 관문의 승자는 빈첸 생도이다. 빈첸 생도는 검을 들어 승리를 선언하도록.”

빈첸이 홍련을 들어 올렸다.

그는 승리의 선언을 읊었다.

“빈첸 아덴카는 카곤 사미온과의 신성한 경쟁에서 승리하였음을 선언한다.”

카곤이 패배를 시인했다.

“카곤 사미온은 빈첸 아덴카와의 신성한 경쟁에서 패배하였음을 시인한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헤르카는 흡족한 눈으로 빈첸과 카곤을 한차례 바라본 뒤 말했다.

“선언은 끝이 났다. 빈첸 생도는 단상으로 올라가 마지막을 장식하도록.”

승리를 확정받았다.

그는 홀로 단상 위를 올라갈 자격을 획득했다.

단상에 올라선 빈첸이 입을 열었다.

“이번 관문은 동료와 함께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본 행사의 책임자이신 헤르카 경께서 허락하신다면 제 친구들도 단상 위에 함께 서고 싶습니다. 그들 덕분에 저는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으니까요.”

헤르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지난 ‘친선교류회’들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머뭇거리던 시젠과 하몬 역시 단상 위로 올라섰다.

둘의 얼굴은 무척이나 붉어져 있었다.

마리아는 흥미롭다는 듯 그들을 관찰했다.

‘빈첸 공자의 태도는 시종일관 같아.’

빈첸이 혼자서 빛나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으나 빈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돋보임을 위하여 동료들을 배경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있어.’

그 이유는 간단했다.

‘모두가 빛나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는 거야. 심지어 상대인 카곤까지도.’

홀로 빛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방식이다.

그런데 혼자서 빛날 때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빈첸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것이 아덴카의 7공자가 사미온을 극복하기 위하여 선택한 방식입니다.”

외팔이 데이븐 때와는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그때는 혼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율리안이 함께하고 있고, 또 다른 동료들도 함께였다.

결코 그때처럼 무력하게 무너질 일이 없도록 기반을 단단히 다질 것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여.

짝! 짝! 짝!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하몬은 눈물을 닦아냈다.

가슴이 벌렁거리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사미온의 6공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단상 위에서, 박수갈채를 받으며.

‘내가! 내가 해낸 거야!’

내면의 한계 하나가 깨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어.’

혼자서는 이 영광스러운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거다.

뿌옇게 변한 시계 사이로 빈첸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의 하몬에게 있어서 빈첸은 거인처럼 보였다.

“빈첸.”

빈첸을 부른 하몬은 검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잡이를 빈첸 쪽으로 돌린 뒤 무릎을 꿇었다.

“내게 새로운 날을 보여주어 고맙다.”

생도들 앞에서, 또한 기자들 앞에서 맺는 충성맹세.

하몬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 표현이었다.

“일어나, 하몬.”

빈첸은 하몬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는 동료로서 충분히 훌륭했어.”

“…….”

하몬은 빈첸의 손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하몬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동료로서 인정받은 것이 기뻤다.

결국 그는 빈첸의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빈첸이 말했다.

“어깨 펴.”

하몬은 몸을 부르르 떨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단상 아래에서 박수치고 있는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을 잊지 말자.’

그는 오늘 승리했다.

‘오늘을 기억하자.’

오늘을 이겨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들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할 수 있어. 무엇이든.’

바로 옆에 선 시젠은 친구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말론에게 짓눌려 있던 시젠이어서, 하몬의 마음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제의 하몬과 오늘의 하몬은 다를 것이 분명했다.

시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 *

단상 아래.

패배를 시인한 카곤은 셀비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다. 셀비라 생도.”

“네?”

셀비라는 카곤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빈첸의 부탁 때문에 최선을 다해 카곤을 돕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카곤이 썩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잘생기고, 예의도 있고, 매너도 있고, 다 잘났는데, 왜 별로지?’

안목 특성을 활성화하지도 않았는데 그랬다.

이건 본능적인 영역이었다.

빈첸의 경쟁자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카곤이 말을 이었다.

“네가 도와준 덕택에 내가 초라하지 않을 수 있었어.”

셀비라가 적재적소에 청각도구를 활용하여 푸락투아의 신경을 분산시켜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꽤 우스운 꼴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빈첸이 쉽게 베어낸 푸락투아를, 카곤은 힘들게 상대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뇨. 저는 그저 제 역할을 다했을 뿐인걸요.”

“네가 없었다면 나는 꽤 고전했을 거야.”

“…….”

“손이 무거운데.”

카곤이 어깨를 으쓱했다.

셀비라는 카곤의 손을 마지못해 살짝 잡았다.

‘안 잡고 싶은데.’

세간이 찬양하는 사미온의 천재.

지금 카곤의 모습은 귀공자 그 자체였다.

패배를 깔끔하게 시인했고,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준 셀비라에게도 기품있게 감사함을 표현했다.

“셀비라 생도는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군.”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생도를 모욕하려던 건 아니었다.”

카곤은 처음에 셀비라더러 멀리 떨어져서 따라오면서 감탄하는 들러리 역할을 하라고 했다.

그건 어찌 보면 무인에 대한 모욕이었고, 카곤은 그에 대한 사과도 건넸다.

“괜찮아요. 친선교류회는 늘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왔으니까요. 이해해요.”

“이해해 주니 고맙군.”

셀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는 끝이 났고 친선교류회의 1차 관문은 끝이 났다.

“이제 그만 손을 놓아주실래요?”

악수치고는 시간이 좀 길었다.

셀비라가 먼저 카곤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음에 더 좋은 모습 기대할게요, 공자님.”

그러고서 9급 생활관을 향해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지금 셀비라에게 있어서 카곤은 관심 외였다.

‘얼른 축하해 줘야지.’

그녀는 빈첸을 위해 몰래 준비해놓았던 축하 선물을 건네기로 했다.

‘마음에 들면 좋겠다.’

셀비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카곤의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삭막했다.

* * *

빈첸이 9급 생활관에 도착했을 때, 스무 명 남짓한 생도들이 복도 양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짝! 짝! 짝! 짝!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까지 축하해 주지 않아도 돼.”

그래도 기분 자체는 좋았다.

저들의 진심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좀 어이없긴 하네요.

율리안은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제가 생각한 형님의 전력으로 이런 결과는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율리안은 보다 객관적으로 빈첸의 능력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이론상 도출했던 최선의 결과를 뛰어넘는 최선이에요. 이건 오차범위 밖이라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이론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는데…….

율리안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앞으로도 평생 가지지 못할 것 같아요.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전략을 만드는 건 율리안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최선의 결과를 예상하는 것도 율리안의 몫이었다.

그런데 빈첸과 함께 일을 진행하면 늘 그 최선을 뛰어넘는 또 다른 최선의 결과를 얻었다.

-아마 정령신이었다고 해도 지금의 우리처럼은 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 또 왔다, 쟤.

늘 그렇듯 셀비라가 빈첸 옆에 앉았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작은 화분이 하나 들려 있었다.

“축하해. 선물이야.”

화분에는 조그마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작게 개량한 황금 당종려야.”

“황금 당종려?”

“응. 야자수랑 비슷한 형태로 자라날 거야. 꽃말은 승리, 쟁취. 1년에 한 번 황금이 맺혀.”

물론 그 양이 아주 작아서 보물로서의 가치는 별로 없다고 했다.

“고맙군.”

“늘 그렇긴 했지만 오늘의 너는 정말 멋있었어.”

셀비라가 빈첸의 옆에 앉았다.

“네가 나와 같은 9급 생도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셀비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결연해 보이기도 했다.

“분하기도 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너를 빛내준 조연에 불과했잖아.”

“…….”

“그것은 아마도 내 실력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

그녀는 분했다.

빈첸보다 약하고 무능해서 분한 것이 아니라, 빈첸에게 어울리는 동료가 되지 못할 것 같아서 분했다.

“나는 앞으로 정말 많이 노력할 거야.”

빈첸의 뒤를 쫓기 위해서.

그 옆이 부끄럽지 않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니까 꼭 지켜봐 줘. 네게 부끄럽지 않은 동료가 되어볼게.”

셀비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빈첸이 셀비라의 손목을 탁! 잡았다.

셀비라는 반사적으로 빈첸의 손을 뿌리쳤다.

“아, 미, 미안, 나도 모르게, 놀라서.”

빈첸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셀비라.”

“미안해. 뿌리치려던 건 아냐.”

“손 줘봐.”

“응? 왜?”

“얼른.”

셀비라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손을 내밀었다.

빈첸은 셀비라의 오른 손목을 잡고서 그녀의 손바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셀비라는 왠지 모르게 손바닥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왜, 왜 그러는데?”

빈첸은 대답하지 않고 손바닥을 계속 살폈다.

‘이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셀비라의 손바닥에 검을 형상화한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 자루의 검. 그리고 그를 옭아맨 한 줄의 사슬 문양.’

빈첸은 이 끔찍한 문양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미온가에 전해지는 저주 중 하나가 셀비라의 손에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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