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42화
빈첸은 기대되었다.
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지금 사미온의 후계자가 얼마나 강할지.
빈첸이 보이는 의외의 모습에 카곤은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헤르카가 피식 웃었다.
‘빈첸이 카곤의 예상과는 달리 움직인 모양이야.’
명예롭게 패배하기 위한 초석을 깔 줄 알았더니, 반대로 도발을 해버렸다.
일차적인 말싸움에서 빈첸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헤르카가 말했다.
“빈첸 생도가 먼저 함께할 생도들을 호명하라.”
“알겠습니다.”
빈첸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생도들을 불렀다.
“9급 생도 하몬. 그리고 9급 생도 시젠을 선택하겠습니다.”
“하몬과 시젠? 확실히 그들을 선택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헤르카 경.”
중계석의 기자들도 바빠졌다.
황급히 하몬과 시젠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하몬과 시젠이 누군데 헤르카가 저런 반응을 보여?’
‘뭐야?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생도잖아?’
‘최근 팔이 잘렸다가 회복됐으면 제 실력을 내기 어려울 텐데?’
그들도 빈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람소리의 마리아는 더더욱 그랬다.
‘왜?’
대표생도였던 셀비라를 선택해도 모자랄 판에.
왜 저런 선택을 한단 말인가.
헤르카가 궁금한 듯 물었다.
“이유가 뭐야? 혹시 약한 동료들을 구실로 핑곗거리를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함께한 생도들이 약해서 졌다.
그런 핑계를 댄다면, 헤르카는 빈첸에게 크게 실망할 터였다.
그런데 빈첸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첫째로, 사미온의 6공자에게 패배의 핑계를 만들어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일부러 카곤에게 우수한 생도들을 양보했다.
만약 카곤이 지더라도, 핑계 댈 수 없도록 말이다.
헤르카마저 혀를 짧게 차고 말았다.
“허.”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덴카의 피를 이은 생도가 사미온의 무인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지 보여주기 위한 선택입니다.”
“말은 아주 번지르르하구나.”
이쯤 되자 헤르카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각명의 명예를 수여받고서 콧대가 지나치게 높아진 듯했다.
기자들의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했다.
헤르카가 카곤에게 시선을 옮겼다.
“카곤 공자는 달리 할 말이 있나?”
카곤은 침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재미있는 도발이군요. 부디 그만큼 대단한 걸 보여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할 뿐입니다.”
* * *
카곤은 스스로 동료를 선택하지 않았다.
누구와 함께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였고, 따라서 헤르카는 붉은 요새의 규칙에 따라 정기평가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했던 두 명의 동료를 카곤에게 붙여 주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셀비라였다.
카곤이 둘에게 말했다.
“친선교류회에 대하여 잘 알고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생도들의 도움은 그리 필요하지 않았어.”
사미온은 늘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1차 관문을 쉽사리 통과했다.
생도들은 거의 들러리에 가까웠다.
사미온의 무력을 더욱 돋보여주게 만드는 장치.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내 지시에 잘 따라주면 좋겠군.”
셀비라가 말했다.
“카곤 공자. 푸락투아에 대해서는 좀 알아요?”
셀비라는 일부러 말을 높였다.
사적으로 그리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셀비라 나름의 표현이었다.
“8급 거인종이라는 사실만 알아.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빈첸 생도는 아마 그 거인종에 대해 모든 것을 공부해 왔을 거예요. 그리고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겠지요. 뿐만 아니라 모든 요소와 변수를 고려하여 작전을 짜왔을 거예요.”
“그것이 그의 최선이라면.”
카곤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최선이 곧 최고를 의미하지는 않는 법.”
카곤이 인공던전의 입구 앞에 섰다.
커다란 마법진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억지로 감탄을 연기할 필요는 없지만, 감정에는 충실해 주면 좋겠군.”
다른 말로 하자면, 카곤이 뛰어난 무력을 선보였을 때 솔직하게 감탄해달라는 말이었다.
그 모습은 아마 기자들을 통해 영상석에 저장될 것이며, 대륙에 퍼져나가게 될 것이었다.
그것이 여지껏 ‘친선교류회’의 역사였다.
“그럴게요.”
셀비라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카곤 공자가 빈첸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말이에요.”
빈첸도 그 옆, 마법진에 섰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단상 위 헤르카가 말했다.
“빈첸 생도와 카곤 공자는 준비되었나?”
빈첸과 카곤이 오른손을 들어 올려 준비되었음을 표시했다.
“마법진을 구동한다.”
열 명에 가까운 마법사들이 동시에 마법영창을 내뱉었다.
마법진에서 형형색색의 마나가 피어올랐다.
[Opemera Diodas]
빈첸과 카곤을 비롯하여 생도들의 몸을 둘러쌌다.
그들의 모습이 대연무장에서 사라졌다.
* * *
주어진 시간은 3시간.
빈첸은 앞을 바라보았다.
‘어둡군.’
보이지 않는 기다란 통로가 있었다.
시젠이 말했다.
“마법횃불을 꺼낼까?”
“부탁한다.”
시젠은 마법횃불을 꺼냈다.
인공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기본적인 물품들은 시젠이 준비해 주었다.
한편, 빈첸과 함께하게 된 하몬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8급 거인종이라니.’
8급 거인종은 어쩌면 어지간한 6급 마물과도 비견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빈첸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빈첸을 필두로 하여 세 사람은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편, 카곤은 달랐다.
“너희는 나와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따라와 주면 좋겠군.”
전투에는 끼어들지 말라는 소리였다.
셀비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마음은 고맙지만.”
카곤이 앞장서서 걸었다.
그에게는 마법횃불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카곤에게 필요한 건, 카곤의 무위에 놀라며 감탄하는 조연들이었다.
“혹시라도 공자가 위험해진다면 나서서 도와도 될까요?”
“그렇게 해.”
카곤은 검을 뽑아 들었다.
셀비라의 말은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즐거웠다.
‘8급 거인종 푸락투아.’
비록 인공이라고는 하지만 마물을 베어낼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는 순수한 무력으로 그의 존재를 증명해 낼 생각이었다.
대륙 최대의 소식지인 센트럴의 론도는 카곤에게 집중했다.
빈첸과 비교하여 카곤에게 유리한 문장들을 완성했다.
[빈첸 생도는 두 명의 생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통로를 이동하였으나, 카곤 공자는 홀로 어둠을 향해 걸었다.]
이미 던전을 접하는 모양새부터가 달랐다.
[빈첸 생도는 마법횃불에, 카곤 공자는 검 한 자루에 의지하였다.]
어느덧, 빈첸은 커다란 공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서 이질적인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마나가 응집되어 있어.’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이 근처에 ‘푸락투아’가 생성되어 있을 것이다.
‘숫자는 둘인가.’
빈첸이 작게 말했다.
“소리를 내는 마법도구를 꺼내.”
시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북 형태의 도구 두 개를 꺼내서 하몬과 나눠 가졌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카곤에게 집중할 때, 마리아는 빈첸의 음성을 증폭시켜 확인해 보았다.
‘소리를 내는 마법도구?’
그것은 청각에 예민한 마물들을 상대할 때 필요한 도구였다.
‘청각도구를 사용해서 푸락투아를 교란시킬 생각이라고?’
그녀는 크게 실망했다.
분명 전략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푸락투아는 체력과 근력이 뛰어나지만, 시력이 매우 나쁘고 몸동작이 느린 편이다.
두 명의 생도가 소리로 그들을 교란시키는 사이 빈첸이 보물상자를 찾을 모양인 것 같았다.
‘물론 이 관문의 목표가 보물상자를 획득하는 것은 맞아.’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보물상자는 그저 상징적인 물건일 뿐이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며 보물상자를 획득하느냐였다.
영상석을 통해 빈첸을 보고 있던 마리아 기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빈첸 공자! 제발 뭐가 우선인지를 잊지 말아주면 좋겠는데.’
빈첸에게 기자 인생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론도가 빈정거렸다.
“빈첸 공자는 뭐가 중요한지 파악을 못한 것 같군.”
“…….”
“바람소리의 1급 기자 안목이 그리 없어서야.”
“취재에나 집중하세요.”
“그러도록 하지, 후후후. 아참. 지금 카곤 공자도 푸락투아와 마주했어. 곧바로 검신의 특성을 활성화할 모양이야. 아마도 사미온의 검식을 제대로 보여주겠지?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화려하고 뛰어난 검술을 선보여줄 거야.”
카곤이 푸락투아와 전투를 시작했을 때, 빈첸은 구석에 숨겨져 있는 보물상자를 발견했다.
그사이 시젠과 하몬이 청각도구를 이용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크륵!
크르륵!
두 거인종은 괴성을 지르며 시젠과 하몬을 쫓았다.
빈첸은 태연스레 거인종을 지나쳐 보물상자를 들어 올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습니다.”
마리아의 몸이 움찔했다.
‘뭐야?’
빈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던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다니.
‘나한테 말한 거야?’
그녀는 괜스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어떻게 나와 눈이 마주쳤겠어?’
빈첸이 말을 이었다.
“저는 붉은 요새의 생도로서, 제게 주어진 임무의 본질을 잊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1차 관문의 임무는 ‘보물상자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오랜 세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을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이 자리는 본신의 무력도 과시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친선교류회의 또 다른 목적이기도 하므로.”
그는 단순히 무력을 선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의 증명하는 자리라면,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로 했다.
“그러니 보여드리지요.”
빈첸은 하몬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하몬은 거의 울먹이며 청각도구를 울려대고 있었다.
팡! 팡! 팡!
요란한 북소리가 푸락투아를 교란시켰고,
빈첸이 그 뒤에 따라붙었다.
빈첸이 말했다.
“하몬, 고맙다. 수고했어.”
그 말을 신호로 하여 하몬이 몸을 앞으로 굴렸다.
그와 동시에 빈첸이 크게 기합을 내질렀다.
“하압!”
크륵?
푸락투아 하나가 빈첸의 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네 상대는 내가 될 것이다.”
하몬은 숨을 죽이고 빈첸을 바라보았다.
‘고맙다’라는 말이 가슴 깊이 박혔다.
훌륭히,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해낸 것 같은 성취감이 가득 차올랐다.
‘내가…… 해낸 건가?’
그러나 이다음이 어떨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8급 거인종 푸락투아는 강하기에.
‘뭐야?’
일어난 일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하몬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푸락투아가 반으로 갈라져서 사라져 버렸다.
8급 거인종 푸락투아.
강력한 마물의 몸이 흐려져서 없어졌다.
‘진짜 없어졌다고? 푸락투아가?’
별다른 전투도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검을 몇 번 휘두른 게 끝인데?’
하몬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두 눈을 꿈뻑거렸다.
총책임자 헤르카도, 사미온의 장로인 홀리만도, 심지어는 이 인공던전을 운용하고 있는 마법사단장 알베르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알베르토는 황급히 지시를 내렸다.
“마법운용에 실수가 있던 건지 속히 확인하라.”
만약 실수가 있었다면 6마탑의 명예가 추락할 것이었다.
“사, 사단장님, 저, 저기 보십시오.”
“왜?”
빈첸이 시젠 앞에 섰다.
마침, 푸락투아가 시젠을 향해 커다란 몽둥이를 휘두르던 찰나였다.
“비, 빈첸 생도가……!”
이변이 또 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