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39화
빈첸이 정신을 되찾고 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체븐과 데탁도 의식을 찾았다.
체븐이 몸을 일으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공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빈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뇌력거인의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
홍련을 보여주었다.
빈첸 스스로 만들어낸 가호는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수식언들로 둘러싸인 3개의 선.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사슬 모양의 수많은 선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뇌력거인’의 증거였다.
“그게 무인들이 말하는 가호입니까?”
신관들은 가호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다만, ‘뇌력거인’이라는 이름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들도 몇 번인가 들어본 가호였다.
“그…… 누구더라 거뢰(巨雷)라는 이명을 가진 유명한 검객이 뇌력거인의 가호를 가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아, 맞아. 엄청 유명한 무인이 있었지.”
그들은 무인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뢰’라는 이름은 알았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인간이 잘 다루기 어려운 힘이라고 하더군요.”
“잘은 몰라도 대단하군요. 기연을 얻으신 거군요! 저희가 곁에 있어서 참 다행한 일입니다, 하하핫!”
체븐과 데탁은 원하는 대답이 있는 듯했다.
빈첸이 피식 웃었다.
“두 분 신관께서 순수한 호의로 절 도와주시지 않은 건 잘 알겠습니다.”
“그, 그건…….”
체븐과 데탁의 얼굴이 동시에 조금 붉어졌다.
“티가 좀 났습니까?”
“많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빈첸은 저들이 밉지 않았다.
본의를 숨기고 독사처럼 접근하는 것보다 이렇게 대놓고 원하는 것이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두 분이 두 분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죠.”
“하하, 하하!”
“그, 그렇죠?”
체븐과 데탁은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속으로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빈첸 공자는 융통성 없이 강직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체븐이 본 빈첸은 그랬다.
보통 저런 자들의 단점이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도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처세술로 여지껏 버텨온 체븐은 그런 자들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빈첸은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향이기도 했다.
“솔직히 저희에게 실망할 줄 알았습니다.”
“제가요?”
“저희 시커먼 속내를 훤히 들여다봤으니 말입니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제가 들여다본 게 아니라, 굳이 숨기지 않으신 거겠지요.”
“…….”
율리안이 파악해 준 바에 의하면 체븐은 상당한 처세가였다.
만약 자신의 본심을 숨기려 했다면 어떻게든 숨기고 아닌 척했을 것이다.
그러나 체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두 분은 무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인이 아닌 자에게 무인의 기준을 강요할 필요는 없는 노릇이죠. 무엇보다, 두 분의 도움은 제게도 큰 기연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빈첸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훗날,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두 신관은 엉겁결에 함께 허리를 숙였다.
“빈첸 공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빈첸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결코 열네 살의 무게감이 아니었다.
마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과 대화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둘은 동시에 확신했다.
‘정말로…… 기연을 잡았구나, 우리가!’
* * *
빈첸이 ‘진심으로 감사’했던 것은 그가 ‘뇌력 거인’의 가호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빈첸이 ‘진심으로 감사’했던 것은 율리안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뽑아내 준 신성력 덕택에 신기가 회복된 모양이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율리안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신기를 사용했을 때. 빈첸은 율리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율리안은 자신을 희생하여 신관들에게 위험을 알렸다.
운이 좋아 일이 잘 풀렸지, 운이 나빴다면 율리안은 사라졌을 것이다.
‘꽤 감격적이었다.’
-흥, 영감님 좋으라고 한 일 아니거든요. 그냥 나는 약속을 지켰을 뿐이에요.
위급한 상황이 오면 방울을 울려주겠다.
그게 율리안의 약속이었다.
-내가 없는 영감님은 존재할 수 있지만, 영감님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는 불평등한 계약관계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을 뿐이라고요. 법칙을 깨뜨리면 나만 소멸하는 아주아주 불평등한 계약관계!
‘오늘따라 말이 긴데.’
-아니거든요!
‘이상하구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인데 왜 그리 부끄러워하는 것이냐?’
-부끄러워한 적 없다니깐요!
사실 율리안은 부끄러웠다.
그는 늘 자신이 대단히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논리와 이성에 합치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의 행동은 그렇게 이성적인 일은 아니었다.
논리보다는 감성이 먼저 움직였다.
빈첸이 피식 웃었다.
‘당연한 거다. 오히려 네가 인간다운 구석이 있어서 좋구나.’
-흐 흥! 됐거든요.
어쨌든 뇌력거인의 가호가 생성되었다.
율리안도 신기를 회복했다.
휴식도 어느 정도 취했겠다, 빈첸은 윌슨을 불렀다.
“윌슨. 이 서신을 아버지께 전하고 와라.”
“가주님께요?”
“아니. 아버지께.”
그게 그거죠!
그 말은 꾹 참았다.
어쨌든 상대는 가주였다.
윌슨은 바짝 긴장했다.
“시종장 레일사에게 전하면 될 것이다.”
사실 윌슨은 시종장 레일사도 무서웠지만 그래도 가주보다는 나았다.
“알겠습니다요.”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전송마법으로 보내도 되지 않나요?”
“그랬다면 너를 불렀겠느냐?”
윌슨은 잠시 침묵했다.
무엇인가를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서신은 비밀스러운 서신이고.”
“…….”
“저는 공자님의 슈퍼 비밀 특파요원이 되는 겁니까?”
윌슨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저는 비밀스러운 임무를 부여받은 영광스러운 시종이군요……!”
그 모습이 마치 겁은 많지만 호기심은 가득한 모험가 같았다.
그는 시종들의 별관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후후.”
“이봐, 윌슨, 뭐가 그렇게 신났어?”
“내 이름은 윌슨.”
시종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실실 웃고 있는 빈첸이 영 이상했다.
“빈첸 공자님의 두터운 신임과 신뢰를 받고 있는 시종이지. 너희들이 뭘 알겠냐? 후후후, 신임 받는 삶이란 참으로 경이롭구나!”
그가 짐을 챙겨 아덴카로 향했다.
* * *
서신을 전한 레일사가 물었다.
“어떤 내용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빈첸이 말론의 가호를 흡수했다고 하더군.”
“…….”
레일사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레일사. 이러한 경우가 존재했었나?”
“처음 듣습니다.”
“빈첸이 이것을 노리고 말론을 자극한 뒤 일부러 베어냈을 확률은?”
“저와 가주께서 모르는 사실을 빈첸 공자가 알 수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빈첸이 왜 이 사실을 내게 서신으로 보고했는지 말해보아라.”
전송마법으로 서신을 보내면 편할 일이었다.
혹은 공식적인 보고절차를 밟아 보고를 올려도 될 일이었다.
“빈첸 공자는 아버지께 서신을 전해 달라 하였습니다.”
가주가 아닌 아버지라 칭했다.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아닐지요.”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지?”
레일사가 빙그레 웃었다.
“아덴카 내에도 뇌전을 다루는 뛰어난 무인이 있지 않습니까? 한때 아덴카의 12검 중 한 명이었으며 이명이 거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요즘은 마물 토벌 건으로 굉장히 바쁜 모양입니다.”
슬며시 눈치를 살폈다.
“가주님의 권한으로 직책을 바꿔주신다면 그가 빈첸 공자의 스승으로 갈 수 있겠지요.”
“그가 스스로 원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직까지 빈첸에게는 스승이 배정되어 있지 않았다.
보통 스승은 ‘자원’하거나 장로회에서 ‘지원’해 준다.
빈첸에게는 자원이나 지원한 사람이 없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제 오랜 친우이기도 하니까요.”
* * *
빈첸이 9급 생도가 되고서 2주가 흘렀다.
그동안 셀비라는 빈첸을 자주 찾았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빈첸 옆에 앉았다.
“빈첸. 네가 꼭 마음에 들어할 만한 선물을 가져왔어.”
“선물?”
사실 빈첸은 셀비라가 조금 귀찮았다.
왜 자꾸 옆에서 생긋 웃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사미온 6공자. 카곤과 관련된 거야.”
빈첸의 몸이 움찔 떨렸다.
다른 건 몰라도 카곤과 관련된 거라면 들을 가치가 있는 얘기였다.
곧 아덴카와 사미온의 ‘친선교류회’가 열리니까.
“카곤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건 알고 있지?”
이번 친선교류회가 붉은 요새에서 열리게 되었다.
벌써부터 소식지 기자들이 붉은 요새에 속속 입성 중이었다.
“오는 길에, 길에서 마주친 자와 연습대련을 치렀다고 해.”
셀비라가 품속에서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
“이게 뭐지?”
“영상석을 몰라?”
미량의 마나를 흘려보내면 영상이 재생되는 마도문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카곤의 대련영상. 진짜진짜 어렵게 구했어.”
빈첸은 영상석을 받아들었다.
“고맙군.”
“나 잘했지?”
셀비라가 헤헤- 웃었다.
“근데 마지막에는 조심해.”
“왜?”
“진짜로 목을 베어버리더라.”
“……뭐?”
“사미온에게 결투를 신청한 값이래.”
“…….”
은원관계가 얽힌 결투가 아니면 보통 목숨까지 취하지는 않는데.
빈첸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네.”
빈첸은 셀비라의 의도가 조금 궁금했다.
“왜 이렇게 내게 호의적으로 구는 거지?”
“그건…….”
셀비라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우리는 친구니까. 친구가 꼭 사미온을 넘어주면 좋겠어서.”
빈첸은 납득할 수 있었다.
“나의 승리에 네 공로가 있다는 것을 공표하도록 하지.”
빈첸은 영상석을 받아들고서 1인 수련실로 향했다.
1인 수련실.
보통의 대련장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그래도 다수가 대련을 치를 수 있을 만큼 꽤 큰 너비의 밀폐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빈첸은 영상석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신기하군.’
영상석에서는 마법영상이 재생되었다.
카곤의 모습이 보였다.
-일대일 크기로 구현한 완벽히 똑같은 영상이에요.
영상으로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상대도 꽤 강한 무인인 것 같았다.
카곤과 한 남자가 대련을 치르기 시작했다.
‘실제와 거의 똑같은데.’
500년간, 마법에도 어마어마한 발전이 있었던 것 같았다.
마치 진짜 두 사람이 눈앞에서 대련을 펼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형님. 왜 그래요?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영상 속 인물들을 노려보았다.
‘저기서 왼발을 내밀 거야.’
카곤의 움직임이 낯설지 않았다.
실제로 영상 속 카곤이 왼발을 내밀었다.
‘하단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그것은 속임수였다.
‘중단을 베겠지.’
그러면 상대는 중단을 막아낼 것이다.
‘그것 역시 속임수.’
하단-중단에서 다시금 하단.
상대를 두 번 속여 하체를 다치게 만들 것이다.
‘다시 한번 하단.’
상대가 능숙하지 못하다면 막아내지 못할 것이나, 숙련된 무인이라면 막아낼 것이다.
영상 속 무인은 막아내었다.
상대가 막아낸다면,
‘검을 튕겨낸 다음.’
카곤이 상대의 검을 튕겨냈다.
‘가까이 접근할 것이다.’
그러면 상대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멀어질 것이고, 그것은 함정이었다.
그 뒷공간은 이미 카곤의 계산속에 존재하는 공간.
뒷공간에서 검이 쑥- 튀어나왔다.
사미온의 중급 검식 중 하나 ‘공첨격’이었다.
그것을 예상치 못한 남자가 가볍게 찔렀다.
이후 카곤이 빈틈을 노리고 남자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사미온에게 결투를 신청한 값이다.”]
피가 솟구치며 영상이 끝났다.
빈첸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하나부터 열까지.
작은 습관과 주로 쓰는 기술들이.
‘카진과 똑같은 것이냐. 어째서.’
그를 만나봐야 알 것 같았다.
며칠 후.
사미온의 6공자 카곤이 붉은 요새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