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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38화 (38/184)

환생의 정석 38화

시종, 시녀들이 머무는 공간은 9급 생활관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붙어 있는 별관이었다.

그 별관에 최근 새로운 신성이 떠올랐다.

“엣헴.”

윌슨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어깨에 힘을 잔뜩 줬다.

“저희 공자님이 빈첸 공자님인 거 다들 아시겠지?”

시종들 간의 서열은 누구를 모시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 비스켓을 두 개 먹을 권리가 있어요.”

세리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동생 같은 윌슨을 챙겨주었다.

직접 만든 비스킷을 시종들과 함께 나눠 먹으라고 만들어주곤 했는데, 그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그 수가 딱 떨어지지 않는 경우, 윌슨이 더 많이 먹었다.

사실 본래 윌슨의 것이기에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일이기는 했다만, 윌슨은 꼭 ‘제 공자님이 빈첸 공자님인 거 아시죠?’라는 이유를 덧붙였다.

“아참, 그리고 저는 오늘부로 빈첸 공자님의 개인 수련실에 동행합니다. 후후.”

“뭐? 그게 진짜냐?”

시종들 중에는 몰락한 가문의 자제들도 꽤 많았다.

윌슨처럼 근본 없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상급자와 개인 수련실에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나 신뢰를 받고 있단 말이냐?”

“제가 바로 윌슨입니다, 후후.”

“진짜 부럽구나. 뭘 어떻게 했어?”

“글쎄요. 진심을 다하여 섬기면 뭐든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음하핫!”

시종들 중 몇몇은 흐음, 하고 납득했다.

“하긴, 세리 누님의 일까지 도맡아서 하느라 네가 고생이 많긴 하지.”

“고생은요, 형님. 마음가짐이 틀려먹었네요. 고생이 아니라 이건 행복입니다. 흐흐.”

한껏 허세를 부린 윌슨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빈첸이 9급 생도 신분으로 각명을 하게 될 줄이야.

더군다나 무려 가주께서 직접 와서 해주다니.

붉은 요새로 온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이토록 이름을 드높이고 있으니, 윌슨의 위상 또한 높아졌다.

윌슨은 빈첸의 명령을 받아 객원당으로 향했다.

“체븐 신관님. 빈첸 공자님이 도움을 좀 요청하는데 시간 좀 괜찮으십니까?”

“빈첸 공자가?”

체븐이 벌떡 일어섰다.

‘내게도 이런 기회가!’

체븐은 만년 5급 신관이었다.

사실 처세술만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그의 동물적인 감각과 사회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빈첸 공자를 잡아야 한다.’

안 그래도 빈첸과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건 체븐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관으로서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더냐?”

“저는 무지렁이라 잘은 모르는데, 어쩐 일이신지요?”

“공자에게 여쭤보거라. 나 말고도 실력 좋은 친구가 한 명 더 있거든. 신관의 힘은 하나일 때보다 둘일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너도 알고 있을 테지.”

체븐은 오랜 친구이자 역시 만년 5급 신관인 데탁을 추천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빈첸이 그에 동의했다.

“선뜻 도와주시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체븐이 손을 휘이-휘이- 내저었다.

“아닙니다. 놀랍도록 무서운 공자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어 영광이군요.”

“저 또한 영광입니다. 최근 붉은 비석에 이름을 새기셨다지요. 축하드립니다.”

체븐과 데탁은 어쩐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빈첸이 속으로 물었다.

‘나는 저 신관들이 꽤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구나.’

빈첸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저들의 효용성을 느꼈다.

율리안은 늘 그렇듯 논리적으로 분석해 주었다.

-처세술에 능하고 상당한 기회주의자들이에요. 그러니 지금의 형님을 도울 수 있다면 발 벗고 나설 거예요.

‘아. 그래서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로군.’

-그런 걸 전혀 모르는데, 그냥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게 너무 무서워요.

율리안은 ‘아무래도 이건 사기야’라고 중얼거리며 일종의 허탈감을 느꼈다.

빈첸이 씨익 웃었다.

‘뇌력거인의 가호를 깨워보자꾸나.’

-절대! 죽으면 안 돼요!

* * *

빈첸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체븐과 데탁은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율리안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

-뇌기는 지나치게 파괴적이에요. 조심해야 해요.

‘명심하마.’

저번에 이미 느꼈다.

특성을 자극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작업이었다.

율리안의 말에 집중했다.

-가장 초보적인 특성인 ‘미전류’의 길을 가르쳐줄게요.

미전류의 길을 통해 마력자전을 시킴으로써 홍련에 새겨진 가호를 이끌어낼 것이다.

‘그래.’

빈첸도 빈첸이 고안한 방식을 얘기했다.

‘나는 가상의 심상을 일시적으로 만들어 운용해 볼 생각이다.’

-가능한 거죠……?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심상’을 떠올렸다.

뇌기를 받아들이기에 가장 좋은 심상의 형태는 ‘삼각형’이라고 했다.

‘시작하마.’

‘가상의 심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그의 마력회로는 조금 더 안정되었다.

율리안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런 게 진짜 된단 말이야?’

심상 없이 마나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는데, 갑자기 가상의 심상을 만들어낸다니.

율리안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자연계열 특성은 대부분 7개의 마력선 중 하나를 증폭하여 사용하는 형식이에요.

그중 뇌기는 6번째, 7번째 마나선을 증폭하여야 한다.

마나흐름을 일곱 갈래로 나누었다.

율리안이 시키는 대로 마력을 발생시켜 가호를 자극하자, 홍련에 미약한 뇌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본능에 의거한 흐름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율리안이 허탈한 듯 말했다.

-이걸 또 해버리네.

그것도 몇 시간 만에.

아무래도 ‘미전류’ 특성을 발현시킨 것 같았다.

아무리 초급 특성 중에 초급 특성이라지만, 그래도 이렇게 3시간 만에 익힐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을 베어서 가호를 획득하질 않나. 거기서 특성을 3시간 만에 이끌어내질 않나.

빈첸과 만난 모든 순간이 해괴했다.

기존의 상식과 이론을 모조리 뒤엎어버렸으나, 결과적으로 빈첸에게 굉장히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형님?

그런데 빈첸이 말을 하지 않았다.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형님!

빈첸이 이끌어냈던 것은 아주 미약한 ‘미전류’였다.

뇌기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수준의 뇌기.

그런데 홍련을 통해 새어 나온 그 기운이 빈첸의 심장을 자극했다.

율리안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가상의 심상이…… 터졌어!’

홍련에서 새어 나온 뇌기가 역으로 빈첸의 심상을 자극했다.

심상이 터지면서 빈첸의 심장에도 큰 무리가 왔다.

‘젠장!’

율리안은 황급히 신기(神氣)를 일으켰다.

이런 일을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으나,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랐다.

‘신기도 얼마 없는데!’

율리안은 신기를 일으켜 빈첸의 심장을 덮었다.

당장은 심장을 지킬 수 있겠지만 이것은 미봉책이었다.

-영감님, 지금 내 목소리 들리기는 하죠?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율리안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그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사이, 홍련에서 시작된 ‘뇌기’는 더 이상 ‘미전류’라 보기 힘들었다.

콰직-

콰지지직-

빈첸의 몸에서 뇌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의 말론이 다루는 뇌기보다 훨씬 더 강력한 뇌기였다.

율리안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어떻게든 검을 놓아야 해요.

홍련에서 피어오른 뇌기가 계속해서 빈첸의 몸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빈첸은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깊이 생각했다.

‘이러한 것들은 아슬란의 안배일 것이다.’

아슬란은 무엇을 원했을까.

‘무인은 검을 놓지 않아.’

심장이 찔려 죽어가던 그 과정 속에서도, 데이븐은 검을 놓지 않았다.

꼬맹이 아슬란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어떤 순간에도 무인은 검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그러니 나도 놓지 않는다.’

빈첸은 이를 악물고 홍련을 꽉 쥐었다.

홍련은 발악하듯 뇌기를 토해냈고 빈첸은 그 뇌기를 받아들였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명상하며 빠르게 마력을 자전시켰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마력회로가 불타 끊어질 것만 같은 극심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견뎌야 해.’

이보다 더한 고통도 견뎌내 왔다.

고통에 질 수 없었다.

그리고 뇌기는 계속해서 피어올라 빈첸의 몸을 잡아먹었다.

-형님?

율리안이 얼마 남지 않은 신기를 끄집어냈다.

신기를 쓰면 쓸수록, 율리안 자신의 존재가 옅어지리라는 것을 안다.

신기를 남용하면 봉인된다.

‘젠장!’

그래도 그는 신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어쩌면 사라질지도 몰라.’

그러나 의미가 없지 않았다.

[네 이름이 빈첸 아덴카임을 잊지 말거라.]

평생 인정받고 싶었다.

빈첸이 그 인정을 받아내 주었다.

못난이 빈첸이 아니라 빈첸 아덴카가 되어주었다.

그러므로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신력을 억지로 쥐어짜서 물리력을 행사했다.

허리춤의 방울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인간의 세계에 신이 물리력을 행사했다.

잡신 정도는 순식간에 녹아내릴 정도로 많은 신기를 사용해야만 했다.

방울 소리를 듣자마자 두 신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나야 모르지.”

그들은 빈첸의 몸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빈첸은 가부좌를 튼 상태로 평온하게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윌슨이 버럭 소리 질렀다.

“아니, 이런 멍청한 신관님들 같으니라고! 방울 소리 들리면 당장 신성력 쏟아붓기로 했잖아요! 뭣들하고 있어욧! 정신 안 차려요!”

“그, 그렇지. 내 정신 좀 보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지.”

그들이 빈첸 앞에 섰다.

아직 명상 중일 수도 있으니, 직접 접촉은 피했다.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가 신성력을 뿜어냈다.

‘엉?’

‘응?’

두 신관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기분을 느꼈다.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위험해.’

어딘가, 깊은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몸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신성력을 빨아 먹는 것 같았다.

그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젠장!’

그들은 신언을 외우며 모든 힘을 이끌어냈다.

그들의 몸에서 하얀 빛이 번쩍이며 터져 나왔다.

“하아…….”

“헉…… 헉……!”

체븐과 데탁은 기진맥진해서 쓰러졌다.

빈첸은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빈첸의 입가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봐, 데탁.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나도 모르겠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군.”

그들도 당분간 요양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들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뭔가를 해낸 것 같은데.”

“그러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체븐은 스스로의 감을 믿었다.

“빈첸 공자에게 은혜를 입힌 모양이야.”

“그러게나 말이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빈첸은, 결코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우리는 기연을 얻은 거냐?”

빈첸에게 은혜를 입힌 것은 분명 이쪽의 기연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면 빈첸 공자가 기연을 얻은 거냐?”

빈첸에게 분명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빈첸의 몸에서 여전히 일렁거리는 저 커다란 신성력이 그것을 증명했다.

‘홍련’ 또한 화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체븐이 대답했다.

“두 쪽 다, 기연을 얻은 것 같군, 아무래도, 뭔가를 해낸 모양이…….”

털썩.

거기까지 말한 체븐은 기절해 버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빈첸은 눈을 떴다.

빈첸의 눈동자에는, 전에 없던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푸르스름한 기운은 ‘뇌력거인’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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