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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35화 (35/184)
  • 환생의 정석 35화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오늘의 불침번은 시젠이었다.

    순찰을 돌던 시젠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사삭-

    검은 그림자가 움직인 것 같았다.

    ‘붉은 요새’ 내인지라 커다란 사고가 벌어지기는 힘들었지만 시젠은 불침번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누구 있습니까?”

    어두운 곳을 향해 다가갔다.

    담벼락 부근을 살펴보았다.

    그때.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큭!”

    시젠은 오른팔로 어깨 부근을 붙잡았다.

    다섯 손가락 사이로 붉은 핏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입술을 꽉 깨물어 비명을 참았다.

    ‘왼팔이…… 잘렸어.’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목을 베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군.”

    “말론!”

    말론의 상태가 이상했다.

    눈 전체가 시뻘겋게 변해 있었고, 몸에서는 붉은 기운이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악령 계약이다!’

    대악마 데이븐이 남긴 잔재이자 세상에 남긴 불행.

    시젠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황급히 비상호각을 꺼내 불었다.

    삐이이이익-!

    비상호각 소리가 퍼져나갔다.

    “그래그래. 열심히 불어라. 다들 한 자리로 불러주니 고맙구나.”

    “말론, 제정신이냐!”

    오른팔로 검을 꺼내 들었다.

    “너희가 나를 배신했던 그 순간부터, 나는 너희를 죽이기로 했다, 흐흐.”

    “…….”

    “네놈이 나를 배신한 첫 번째 놈이었지.”

    시젠은 검을 들어 올린 채 말론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악령과 계약한 자는 훨씬 더 강한 힘을 낸다.

    ‘나는 두렵지 않아.’

    빈첸의 말을 떠올렸다.

    무인이 가져야 할 두려움은 경외뿐이다.

    악령과 계약한 말론 따위에게 굴복할 수는 없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무인이 아냐.”

    시젠은 땅을 박찼다.

    말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말론은 시젠의 검을 가볍게 피해내고서, 슬쩍 시젠의 발을 걸었다.

    “컥.”

    왼팔을 잃어 중심이 흐트러진 시젠은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말론이 시젠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배신을 후회하게 해주지.”

    “악령 계약이라니! 아덴카의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때, 9급 생활관의 당직을 맡고 있던 5성 무인 브론드가 황급히 뛰어나왔다.

    “말론! 제정신이냐!”

    그도 말론의 상태를 확인했다.

    말론이 피식 웃었다.

    “브론드 경. 경에게 딱히 원한은 없습니다만.”

    오늘 이곳의 모두를 죽일 것이다.

    악령과 계약한 말론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득한 살심이 들끓어 올랐다.

    브론드가 검을 꺼내 들었다.

    “아덴카의 직계라고는 하나 너는 선을 넘었다.”

    5성 무인 브론드와 악령계약자 말론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 * *

    삐이이익-!

    비상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생도들이 하나둘씩 눈을 떴는데, 빈첸은 이미 기상한 상태였다.

    ‘기묘하다.’

    눈을 번쩍 떴다.

    비교적 최근에 이와 비슷한 부류의 기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붉은 악귀’와 비슷한 느낌이야.’

    느낌 자체는 비슷했으나 붉은 악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다.

    결만 같았을 뿐, 그 격은 완전히 달랐다.

    빈첸이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마나가 요동치고 있어.’

    어디선가,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빈첸은 검집에서 홍련을 꺼내 들었다.

    삐이이익-

    비상호각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생도들도 하나둘씩 검을 뽑아 들었다.

    빈첸이 셀비라를 찾았다.

    “셀비라.”

    이들은 아직 생도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실전경험이 전무한 햇병아리들.

    빈첸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통솔자가 되어 상황을 지휘했다.

    “저번에 했던 비상연락.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상급 무인을 불러.”

    “얼마나 상급 무인?”

    이들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빈첸은 확실히 느꼈다.

    바람결에 혈향이 담겨 있었다.

    “가능하다면 바르곤 경을 부르고.”

    “이 시간에? 바르곤 경을?”

    “그래.”

    “……알겠어.”

    이 시간에 바르곤 같은 상급자를 부르는 것은 셀비라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으나 빈첸의 말에 크게 토를 달지는 않았다.

    빈첸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연락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 두렵다면 숨어 있고.”

    9급 생도가 된 지 얼마 안 된 빈첸이건만, 생도들은 빈첸의 뒤를 자연스레 따르기 시작했다.

    빈첸을 필두로 스무 명 가까운 생도들이 바깥 공터로 향했다.

    삐이이익-!

    호각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다가 이내 끊겼다.

    ‘호각 소리가 사라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피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마나의 흐름도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거야.’

    1차적인 전투가 거의 끝난 것 같았다.

    빈첸은 마음이 급해졌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장수가 흔들리면 병졸은 무너진다.

    비상 연락책만 배치하고 뒤따라온 셀비라가 빈첸 옆에 섰다.

    “셀비라. ‘진’을 연습한 적이 있어?”

    “진?”

    무인들은 개개인의 무력도 중요하지만 ‘집단’으로서의 힘도 중요하다.

    ‘진’은 다수의 무인들이 하나의 흐름과 세력을 형성하여 최고의 효율을 끌어내는 방법이었다.

    “몇 가지 배운 것이 있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견고한 방어진은?”

    셀비라가 곧바로 대답했다.

    “아덴카 기본 7진 중 하나. 삼각 방어진.”

    “펼쳐. 네가 주도해.”

    호각 소리는 끊겼다.

    적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상급 무인이 도달하기 전,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 오합지졸 같은 9급 생도들을 이끌어서, 최상의 결과를 끌어내야 했다.

    살을 에는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이 정도 살기는 오랜만이었다.

    셀비라가 말했다.

    “문제가 있어. 이 기본진에는 꼭짓점이 되어주는 강력한 무인 한 명이 필요해.”

    보통 삼각 방어진을 연습할 때에는 5성급 무인이 그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내가 할게.”

    “네가?”

    너한테는 심상이 없잖아.

    셀비라는 그 말을 꾹 참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빈첸. 너만 믿을게.”

    그때, ‘반갑다, 얘들아’라는 목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몇몇 생도들은 비명을 질렀다.

    목소리와 함께 굴러온 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브, 브론드 경!”

    이러한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생도들은 크게 당황했다.

    빈첸이 말했다.

    “동요하지 마.”

    빈첸은 한쪽 무릎을 꿇어 브론드의 눈을 감겨 준 뒤, 음성에 마나를 담았다.

    “동요하는 순간 우리는 다 죽어.”

    빈첸이 일부러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다가오는 말론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그 자리로.

    “그러나 오늘은 아냐.”

    빈첸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빈첸이 일전에 보여주었던 ‘기백’이었다.

    ‘생도들이 흔들리면 안 돼.’

    오늘 필요한 것은 단순한 무력이 아니었다.

    빈첸이 해야 할 것은 버텨내어 살아남는 것이었다.

    상급 무인이 올 때까지.

    ‘나 혼자서는 무리다.’

    생도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저들이 진을 이루어 생성하는 마나의 흐름.

    그리고 말론의 공격 경로를 차단하는 진의 효용.

    그것에 의지하여 시간을 벌어야 했다.

    셀비라가 황급히 생도들에게 번호를 부여하며 진을 정렬했다.

    “삼각 방어진을 구성할 거야. 진의 꼭짓점은 빈첸이 맡아줄 거고.”

    셀비라는 대표생도답게 생도들을 리드했다.

    빈첸은 홍련을 들어 올렸다.

    -형님. 우리라도 일단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도망치려 했다면, 이미 여기는 몰살이었다.’

    도망은 불가능했다.

    5성 무인의 목을 이토록 쉽게 베어낸 말론이다.

    이쪽이 대치하려 하고 있기에 말론은 이쪽을 살려두고 있는 것이다.

    더 처절하게 발악해 보라고.

    저만치 멀리, 시젠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간신히 숨이 붙어 있기는 했으나 양쪽 팔이 다 잘려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악령과 계약한 게 틀림없어요. 악령과의 계약자는 엄청난 힘을 뿜어내요.

    말론이 다가와 말했다.

    “방어진이라. 너 같은 놈이 꼭짓점인가?”

    “그래.”

    말론은 진이 완성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발버둥 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구나.”

    그가 원하는 건 별거 아니었다.

    제왕으로서의 위치.

    다시 한번 저들이 보내오는 공포의 시선.

    “기다려 주마.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빈첸이 차분하게 말했다.

    “여기서 함께 죽을 생각인 것 같은데.”

    말론에게 미래는 없었다.

    이미 상급 무인이 이쪽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말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홍련을 들어 올렸다.

    “그 하찮은 소원조차 이루지 못하겠군.”

    진이 완성되었다.

    마나의 흐름이 빈첸 주변을 감쌌다.

    빈첸은 흔들림 없이 단단한 태도로 말론을 바라보았다.

    말론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왔다.

    ‘빠르다!’

    빈첸의 눈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빨랐다.

    ‘아래.’

    빈첸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챙!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건 경험에서 나온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막아냈군?”

    말론은 재미있는 듯했다.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어깨가 빠질 뻔했어.’

    진에서 생성되는 마나흐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깨가 박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검을 통해 전해진 ‘뇌기’가 마나 흐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으나 힘의 차이를 절감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웃었다.

    “빌려온 힘조차 이렇게 형편없어서 쓰나?”

    말론의 몸에서 뇌기가 일렁거렸다.

    ‘빌려온 힘’이라는 말에 자극받은 듯했다.

    “이것은! 온전한 나의 힘이다!”

    말론의 검에 뇌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왕을 잊은 배신자들은 모조리 죽여야지.”

    그의 특성 ‘위압’이 뿜어져 나왔다.

    진을 구성하고 있는 몇몇은 그것만으로도 피를 토했다.

    또 몇몇은 진에서 이탈해 도망치기도 했다.

    진이 무너지면 잠시라도 버틸 수 없다.

    진을 견고하게 유지해야 했다.

    빈첸이 크게 외쳤다.

    “맞서라!”

    무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데이븐은 그렇게 살아왔다.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다.”

    기백과 의지를 담아 말했다.

    “우리는 무인이기 때문이다.”

    위압 특성에 질려 버린 생도들에게 빈첸의 목소리가 닿았다.

    ‘진’을 통해 생도들의 마나가 빈첸에게 전달되었다.

    그러자 빈첸의 기백이 말론의 위압을 밀어냈다.

    “입만 살아서는.”

    말론이 다시 한번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챙!

    검과 검이 부딪쳤다.

    빈첸의 속이 진탕되었다.

    울컥!

    목구멍을 통해 피가 솟구쳤으나 빈첸은 꿀꺽 삼켜버렸다.

    겉으로는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겨우 이게 다인가?”

    말론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공포에 질린 생도들의 얼굴이었다.

    빈첸이 살려 달라 비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빈첸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유희는 여기까지다. 그냥 죽여주지.”

    그도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다 판단했다.

    곧 상급 무인이 도착할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빈첸도 속으로는 긴장했다.

    ‘큰 기술을 사용할 거야.’

    들끓는 뇌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막아낼 수 있을까?’

    어차피 공격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진’에 의지해서 시간을 끄는 것이 최선.

    ‘막아내야 한다.’

    마나의 흐름을 통해 느껴졌다.

    생도들이 자신에게 신뢰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신뢰에 응답해야 한다.

    ‘음?’

    그런데 그때.

    빈첸의 눈에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본래는 억지로 만들어내야 하는 ‘이능검격’의 검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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