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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32화 (32/184)

환생의 정석 32화

“앗, 뜨거!”

빈첸의 부탁으로 검은색 제복을 다리던 세리는 자신의 손을 후후- 불었다.

너무 서두르느라 손을 조금 다쳤다.

그렇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얼른 대련장으로 복귀해야 해. 공자님이 결투를 하신다고.’

진검회동 때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아덴카 직계와의 첫 결투는 꼭 지켜봐야 했다.

‘다 됐다!’

세리는 손에 검은 제복을 들고 열심히 뛰어왔다.

다행히 아직 결투는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어?’

어느 순간.

빈첸이 말론의 오른 손목을 잘라버렸다.

무인이 아닌 세리는 과정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빈첸이 말론을 이겼다는 사실이었다.

‘공자님이 이기셨어!’

말론이 빈첸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고 있다.

‘흥, 쌤통이다! 나쁜 놈아!’

그사이,

바르곤은 동결 마법을 사용하여 말론의 손목에 응급처치를 해놓았다.

“슬립.”

그러고서 말론을 재워놓았다.

손목이 잘릴 정도의 충격을 오래 기억하는 것은 무인에게 그리 좋은 건 아니었으니까.

빈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빈첸. 네 승리다.”

바르곤의 낮은 음성이 빈첸의 승리를 선포했다.

용병으로서 경험이 많았던 그는 손목의 절단면을 보고 침음성을 삼켰다.

‘어찌 이리 깔끔하단 말인가.’

이건 단순히 ‘실력’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정말로 사람을 베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단면이었다.

검에 단 한 순간이라도 주저함이 있으면 이런 깨끗한 단면이 나올 수 없다.

‘청안 백호를 사냥하던 모습부터 지금까지. 내 상상을 한참 뛰어넘는군.’

빈첸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그간 수많은 무인들을 만나 보았던 바르곤이었지만 오늘의 빈첸은 특별했다.

게다가 빈첸은 명패를 이용하여 신관을 미리 불러오라고도 했다.

오늘의 결투를 조율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빈첸이었다.

몇몇 생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비, 빈첸이 이겼어!”

“이긴 정도가 아닌데?”

그들 중 말론의 부상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시젠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말론을 저렇게 이길 줄이야.’

그는 늘 생각했었다.

14살인 자신은, 16살인 말론을 이길 수 없다고.

방계 중의 방계인 자신은,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빈첸이 보여준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은근슬쩍 셀비라가 시젠 옆에 섰다.

“빈첸에게는 심상도 없다는 걸 알지?”

“……알아.”

심상도 없고 가호도 없다.

어찌 보면 자신보다 더 열악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이겨냈다.

이겨낸 수준이 아니라 압도했다.

“무인에게 허락된 두려움은 경외뿐이랬어.”

“…….”

셀비라가 시젠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어때? 이제는 좀 극복할 수 있겠어?”

수많은 핑계에 갇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빈첸은 보란듯이 해내었다.

그것은 시젠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다.

빈첸을 보며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모르겠어.”

시젠이 셀비라를 바라보았다.

“……나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빈첸이 보여줬잖아. 우리한테.”

시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 자신감의 다른 이름은 희망이었다.

아덴카의 재능이 없어도.

가호와 심상이 없어도.

그래도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는 희망.

그때,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누, 누구요, 이 명패의 주인이?”

객원으로 머물고 있던 가이아의 5급 신관 ‘첼븐’이었다.

머리가 제법 희끗희끗했는데 나이는 4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접니다.”

빈첸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신관이 눈을 크게 떴다.

“엥?”

급수 자체는 높지 않지만 경력은 오래되었고, 가이아 신전 내에서 잔뼈가 굵은 자였다.

그는 가이아 신전 내부사정에 대해 꽤 잘 알았다.

‘저 어린 소년이 둘란 신관의 명패를 가지고 있다고?’

3급 신관의 명패는 귀하다.

그런데 그냥 3급 신관도 아니고 무려 ‘둘란’의 명패였다.

은퇴신관들이 밀어주는 신성.

대신관 후보들 중 한 명.

“어, 어떻게 이 명패를 얻었습니까, 소년?”

“답해야 할 이유는 없으리라는 것을 신관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체븐은 움찔 놀랐다.

소년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명패를 가지고 있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소년은 가이아의 3급 신관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예의를 차려야 하는 것은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며, 상급자에게 함부로 질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년은 그리 매섭지않은 어조였지만 품격 있게 사실을 짚었다.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신관 내에 잔뼈가 굵은 체븐이었다.

그리 뛰어나지 않은 실력으로 지금까지 대교단 중 하나인 ‘가이아 교단’에 교적을 올리고 있을 수 있던 것도 그의 빠른 눈치와 처세술 덕분이었다.

그래서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엄청난 녀석이 하나 튀어나왔군.’

저 소년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애초에 평범했다면 둘란의 명패를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겠지만.

그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제가 치료해야 할 사람은 누구…….”

손목이 잘린 채 잠에 든 덩치 큰 소년이 보였다.

하얀 배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9급 생도인 것 같았다.

‘9급 생도 중에 저 덩치면…… 말론인 것 같은데.’

힐끔, 빈첸 쪽을 보았다.

빈첸 역시도 하얀 배지를 하고 있었다.

‘9급 생도가 말론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9급 생도들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9급 대표 생도가 두 명이란 사실 정도는 알았다.

‘하나는 말론. 하나는 여자 생도라 그랬는데.’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저 소년은 ‘여자’가 아니었다.

대표생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대체 누구야?’

게다가 여기에는 바르곤 경까지 있는 상황 아닌가.

마법사가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어, 얼른 치료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르곤 경이 응급처치를 잘해주신 덕…….”

“우선순위는 그쪽이 아닙니다.”

빈첸이 세리를 불렀다.

“세리.”

세리가 엉거주춤 가까이 다가왔다.

빈첸은 세리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아 들어 올렸다.

“조심하지 그랬어.”

빈첸의 눈에 다림질을 서두르다가 화상을 입은 손이 보였다.

체븐에게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손목을 잃은 말론보다, 화상을 입은 세리의 상처가 훨씬 깊었다.

적어도 빈첸에게는.

“저, 저 아이는…….”

“제 시녀입니다. 먼저 부탁드립니다.”

5급 신관 체븐은 아덴카의 직계인 말론을 내버려 두고, 시녀인 세리를 먼저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바르곤과 생도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멋있었단 말이야.”

9급 대표생도 셀비라는 흐응, 흐응, 흐응, 하고 연달아 감탄했다.

그녀는 침상에 앉아 빈첸을 떠올려보았다.

빈첸이 그런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9급 생도 배지를 받자마자 이 정도면, 다음에는 또 무엇을 보여줄까.

“빈첸이라. 빈첸. 못난이 빈첸.”

셀비라가 가볍게 웃었다.

포효하지 않았던 사자는 승냥이를 물어 죽였다.

그녀의 눈에, 빈첸은 어엿한 사자였다.

“얘기를 좀 더 해보고 싶어.”

잘생겼던데.

그녀가 침상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빈첸과 대화를 좀 더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빈첸은 5생활관에 없었다.

“빈첸은 어디 있어?”

대답을 해준 사람은 시젠이었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바르곤 경을 만나러 간 것 같아.”

“너 왜 이렇게 흥분해 있어?”

“붉은 요새의 부요새장께서 일개 9급 생도와의 개인면담을 가지는 거잖아.”

“근데 왜 네가 그렇게 신났어?”

시젠의 얼굴이 붉어졌다.

빈첸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자신은 빈첸이 아니었고, 빈첸도 자신이 아닌데 말이다.

셀비라가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 이해해. 지금 다들 그런 상태니까.”

“그, 그래?”

“응. 나도 좀 그래.”

셀비라가 몸을 돌렸다.

“욕심나네, 증말.”

셀비라는 자신의 한계와 그릇을 정확히 인지했다.

아무리 자신이 날고 기어도, 무력으로는 결국 ‘제대로 된’ 아덴카의 직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진짜 꿈은 ‘무인’이 아니었다.

붉은 요새에 입성한 것은 무인으로 성장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섬길 주군을 스스로 선택하기 위함이었다.

‘2공녀 쪽 사람이 되어볼까 했는데.’

오늘 빈첸이라는 또 다른 직계를 보았다.

자신의 ‘안목’으로는 잠재력을 파악할 수 없는 기이한 소년.

‘빈첸과 함께라면.’

빈첸과 함께라면 진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을까?’

사실 그녀의 꿈은 역사학자였다.

잊혀진 역사의 발자취를 좇고 싶은.

* * *

빈첸이 말했다.

“이례적인 일로 알고 있습니다.”

“이례적이지.”

붉은 요새의 부책임자쯤 되는 자가 ‘9급 생도’를 면담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생도가 먼저 요청한 것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

“네가 나와 만나고자 한 정확한 이유를 듣고 싶었으나…… 알 것 같기도 하구나.”

빈첸은 세리가 깨끗하게 다려준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검 끝을 땅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검 끝이 땅에 살짝 닿았다.

내가 상대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

충성 맹세 시 무릎을 꿇고 검 손잡이를 상대에게 돌려놓는 행위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리고 오른팔을 들어 올려서, 오른손 주먹을 가볍게 쥐고 가슴에 대세요. 요즘 예법이에요.

50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풍습이었다.

예절과 품격은 시대가 지나면 함께 바뀐다.

모양새가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빈첸은 바르곤을 향해 경례했다.

-완벽하게,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하는 경례의 방식이에요.

바르곤은 잠시 침묵했다.

이제는 바르곤도 빈첸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다.

검은색 제복.

그리고 경례.

“친애하는 누이를 잃으셨다 들었습니다.”

“…….”

빈첸이 오른손을 내렸다.

바르곤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생도가 그토록 격식을 차릴 일은 아니다. 생도가 내게 하는 행동치고는 지나치군.”

편의상 ‘붉은 요새’의 관리자들을 ‘교관’이라고 부르기는 한다.

직책상으로도 생도보다 교관이 더 높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굉장히 애매한 서열 관계였다.

-붉은 요새 안에 있으면 분명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지만요, 파성무인이 되면 그 위치가 바뀌기 마련이거든요.

이곳에는 아덴카의 혈육들.

혹은 그를 추종하는 무가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명문가의 자제들이다.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어지간한 교관들보다는 사회적으로 훨씬 더 우위에 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좀 애매한 관계이긴 하죠.

겉으로 보이기에 상급자와 하급자가 맞기는 하지만, 서로에게 미묘한 선을 지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빈첸이 보여준 행동은 바르곤의 ‘서열’을 완벽히 인정하는 꼴이었다.

붉은 요새 내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피붙이를 잃은 상급자에게 예를 취했을 뿐입니다.”

“…….”

바르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신기한 건…… 저 모습이 비굴하거나 구차하지 않다는 것.’

빈첸의 모습은 당당했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자세를 낮추면서도 명문가의 품위와 위신을 잃지 않았다.

바르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궁금해졌다.

“왜 내게 친애하는 누이라고 표현했지?”

바르넬리의 유서가 소식지에 발표되면서 바르곤과 관련된 소식도 많이 쏟아졌다.

바르곤이 가족과 마탑에게 버림받았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인상을 찡그러고서 물었다.

“나를 조롱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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