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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31화 (31/184)

환생의 정석 31화

“본래 두 생도는 징계대상이나.”

붉은 요새는 사적 결투를 금지하고 있다.

결투를 하고 싶으면 보고라인을 통해 보고하고 중재자를 파견 받아 진행해야 했다.

혹은 ‘스승들 간 합의’가 있거나.

“대표생도 셀비라의 보고가 있었으므로 정식절차를 밟은 것으로 간주하겠다.”

징계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는 얘기였다.

셀비라가 빈첸 쪽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마치 ‘나 잘했지?’라고 묻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세상이 참으로 복잡해졌구나, 율리안. 무슨 결투에 이리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단 말이냐?’

무인들의 결투는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위다.

숨을 들이마실 때 누군가에게 보고 올리고 허락받지는 않는다.

-세상이 가혹해졌다니까요.

‘그런 것 같구나.’

500년 동안 세상이 많이 불편해졌다.

“결투 준비는 되었나?”

말론은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빈첸이 고개를 저었다.

“제 시녀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빨리 끝내도록.”

빈첸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세리를 불렀다.

“세리.”

“네, 네, 공자님!”

구석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세리가 뛰어왔다.

낑낑대며 무대 위로 올라와 빈첸 옆에 섰다.

빈첸이 세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했고, 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련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준비되었습니다.”

빈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결투라.’

진검회동은 빈첸 개인의 목표와는 크게 상관없이 치러진 결투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오로지 그의 의지로 치러지는 말론과의 결투였다.

게다가 상대는 아덴카의 ‘직계’이자 3성의 무인.

‘기쁘군.’

다시 한번 무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스릉-

빈첸이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붉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론은 그 검을 보고서 흠칫, 놀랐다.

‘홍련?’

그러나 그럴 리 없다.

“아버지의 흉내라도 내겠다는 거냐?”

“흉내처럼 보이나?”

“모조품이라는 데에 내 오른 손목을 걸겠다.”

“그 말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지.”

빈첸이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가이아 소속 3급 신관 둘란의 명패였다.

“윌슨. 받아라.”

빈첸이 명패를 던졌고, 윌슨이 헐레벌떡 뛰어와 명패를 받아들었다.

“신관을 불러와라. 객원으로 초빙된 자들이 있을 것이다.”

바르곤은 한눈에 명패를 알아보았다.

3급 신관의 명패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저건 어떻게 얻은 거지?’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빈첸의 심장이 뛰는 것만큼, 바르곤의 심장도 뛰기 시작했다.

“결투를 시작한다. 두 생도는 명예롭기를 바란다.”

* * *

빈첸은 왼팔로 홍련을 들어 올렸다.

왼팔로는 심상이론을 다루지 못한다.

말론이 그 모습을 비웃었다.

“반푼이 새끼.”

말론은 그의 오른팔로 검을 들었다.

가볍게 심상에서 마나를 이끌어냈다.

체내에 각인된 특성 중 하나.

‘위압’을 이끌어냈다.

‘어디 한번 내 위압에 저항해 보아라!’

이전부터 빈첸은 ‘위압’의 좋은 사냥감이었다.

단 한 번도 빈첸은 자신의 위압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위압의 마나가 주변을 잠식했다.

위압 특성은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한다.

생도들의 가슴 속에 불길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나 빈첸의 표정은 고요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해당 특성을 읽어냈다.

‘자신보다 성취가 낮은 자들에게 특효인 특성이겠군.’

말론은 3성의 무인이다.

말론의 심상보다 수나 질이 낮으면 저 특성에 쉽게 잡아먹힐 것이다.

-네. 위압 특성이에요.

‘안다.’

-또 알아요?

‘그래.’

-효과도 알아요?

‘대충 알 것 같다.’

-그래……요.

빈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과거의 뛰어난 무인들에게는 특성 같은 것이 없어도 주변을 압도하는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기백(氣魄)’이었다.

그것은 정신력의 영역이었다.

빈첸이 눈에 힘을 주어 위압의 마나를 밀어냈다.

말론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거력이 자신의 특성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될 것만 같다는 본능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3개의 심상에서 마나를 더욱 끌어 올렸다.

마력회로를 통해 마나를 뿜어내며 각인된 특성을 확장시켰다.

‘어째서?’

그러나 밀리지 않았다.

‘위압’ 특성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었고, 오히려 자신의 마나가 뒤로 밀렸다.

‘말도 안 돼!’

빈첸에게는 심상이 없다.

심상이 없는 자에게, 어떻게 3성의 위압이 먹히지 않는단 말인가.

사실 놀란 사람은 말론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형님,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전투 상황 중에는 어지간하면 끼어들지 않는 율리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했다.

그 역시 ‘위압’에 여러 차례 당해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밀어낼 수 있는 특성은 결코 아니었다.

‘기백이다.’

-기백이요? 마나를 쓰는 거예요?

‘마나와는 전혀 관계없어.’

-무슨 말이에요 그게? 지금 분명 특성효과를 밀어내고 있잖아요.

‘무인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기운이지.’

율리안이 공부한 이론에 이런 건 없었다.

무학은 단순히 힘과 마나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당연히 가호와 특성도 전부가 아니다.

-현대무학을 이론으로만 공부한 저한테는 이해하기 너무 어려운 말이에요.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형님 말대로, 결과로 모든 걸 증명하고 있네요.

결과가 빈첸이 가진 ‘기백’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상대를 무너뜨리겠다는 의지.

지지 않겠다는 굳은 심지.

위축되지 않는 단단한 심장.

그러한 것들이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특성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것이지.’

이것이 특성과 의지의 차이점이었고.

무인의 ‘격’에 따른 차이였다.

화악-!

눈에는 보이지 않는 폭풍이 일었다.

기백과 특성의 힘겨루기였고, 패배자는 말론이었다.

‘큭.’

특성을 운용하던 말론은 심장에 꽤 큰 통증을 느꼈다.

황급히 ‘위압’ 운용을 그만두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위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어디서 잔재주를……!”

아무래도 빈첸 놈은 자신과의 결투를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비한 것 같았다.

위압을 막아내는 아티팩트 등을 미리 가지고 왔겠지.

이것은 마도문명의 힘이 틀림없었다.

“후우.”

심호흡을 하고서 주변을 힐끗 바라보았다.

생도들의 시선이 빈첸을 향하고 있었다.

‘미친 것들이.’

그는 빈첸과 생도들과 이 상황을 용서할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빈첸이 보여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저들은, 빈첸을 향해 호감을 보이고 있는가.

‘너희들의 왕은 나란 말이다.’

그것을 증명해야 했다.

말론이 보법을 밟았다.

마나를 사용하여 움직였다.

꽤 큰 덩치였지만 움직임 자체는 가벼웠다.

‘내 특성을 이겨냈다 생각하지 마라!’

빈첸을 향해 파고들었다.

“내 검도 한 번 막아보아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빈첸은 겉으로 보기에 가까스로 그 검을 피해냈다.

‘율리안. 내가 보일 것은 설인걸음이다.’

율리안의 역할은 ‘생각’이다.

빈첸이 가진 역량을 총동원하여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역할.

그렇다면 더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빈첸은 가진바 모든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말론을 상대로 하는 오늘이 그에 적합한 날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내게 심상은 없어.’

말론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빈첸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 그 검을 피해냈다.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 심상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러나 실존하지 않는 심상을 그려낼 수 있다.’

빈첸에게 있어서 이 결투는 빈첸과 말론의 결투가 아니었다.

이것은 과거의 빈첸.

그러니까 말론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율리안이 과거의 말론을 극복해 내는 과정이었다.

그러니 더없이 완벽하게 압도하며,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성취해 주어야 했다.

율리안을 위하여.

그게 빈첸이 율리안을 위하는 방식이었다.

‘심상이 없으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모든 종류의 심상을 구현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예전에 봤던 [물레방앗간과 첫사랑] 속 내용 같네요.

마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노력만 동원된다면, 체질과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빈첸의 눈에 더 이상 말론은 보이지 않았다.

‘본래 [설인 걸음]의 마력흐름이 어떻게 되지?’

-2개의 심상에서 생성되는 마력을 하나로 모아 통합해야죠.

‘나는 통합하지 않을 거야.’

2개의 심상에서 각각 마력을 분리해냈다.

교차로 마나를 흘리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거예요?

이쯤 되자 율리안도 알아차렸다.

지금의 결투는 말론과의 결투가 아니라는 것을.

말론은 애초에 빈첸의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것을.

오늘의 결투는 율리안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첫 번째 심상의 마나를 양분하여 두 개의 마력흐름을 만들어낼 것이다.’

본래는 양분하지 않는다.

하나의 흐름으로 운용하는 것이 ‘설인걸음’ 특성이다.

모든 과정은 본능적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본능적인 과정을 율리안이 복기하고 기억했다.

‘이렇게 하여도 설인 걸음의 특성 자체는 유지돼.’

효과는 줄었다.

완벽한 설인 걸음은 아니었으나, 빈첸의 몸을 가볍게는 만들어 주었다.

그의 걸음걸이가 말론을 슬쩍 피해냈다.

여전히 겉으로 보기에는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리고 또 다른 심상의 마나를 왼팔로.’

본래는 허리로 향했을 마력흐름을 팔로 보내며 말론의 검을 막아냈다.

육중한 힘이 느껴졌다.

잘못하면 어깨가 탈골된다.

빈첸 다음가는 못난이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카의 직계였다.

그의 힘을 비스듬히 흘려보냈다.

-일반적이지 않은 흐름이네요.

특성의 발현은 이미 공식화되어 있다.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빈첸이 그 길을 마음대로 바꾸었다.

세상의 상식대로라면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으나,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상식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놀랍고 신기한 방식이에요.

율리안의 눈으로 빈첸의 몸을 살폈다.

빈첸이 본능적으로 해내는 모든 것들을, 율리안의 머리에 담았다.

그 길을 기록하고 원리를 파내기 시작했다.

-이렇게도 응용할 수 있는 거였구나.

그 이후, 율리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빈첸이 본능적으로 만들어낸 ‘현상’을 ‘이론’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집중하기 시작했다.

빈첸은 말론의 움직임을 읽어냈다.

‘놈이 또 다른 특성을 운용하는군.’

미약한 뇌력(雷力)이 느껴졌다.

이건 맞부딪치면 위험했다.

다만,

상성이 이쪽에 지나치게 유리했다.

저 검은 파괴력을 담은 대신 속도가 많이 느려졌으니까.

그의 움직임이 눈에 훤히 담겼다.

설인걸음은 가벼운 걸음이다.

그 걸음의 묘리를 검에 적용했다.

홍련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이 검은, 명인 한센의 숨결이 녹아든 명검이었다.

‘설인걸음의 가벼움을 검에 담을 수 있다.’

그래서 무학의 본질이 중요하다.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기 때문이다.’

현대 무인들은 할 수 없는 것을, 옛 무인인 빈첸은 해냈다.

가벼운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턱!

무엇인가가 땅에 떨어졌다.

검을 움켜쥔 말론의 오른 손목이었다.

아까 말론이 걸었던 조건이기도 했다.

“무인이 함부로 제 손목을 걸면 쓰나.”

바르곤은 순간 멍해졌다.

빈첸이 이 정도 움직임을 보여줄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무인이 아닌 그가 보기에 빈첸은 허겁지겁 막고 피하는 것에 급급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말론의 손목을 베어냈다.

“으아아아악!”

말론의 비명을 들은 바르곤은 정신을 퍼뜩 차렸다.

‘실책이다!’

때마침, 가이아 신전 소속의 신관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둘란’에 대해 아는 자였고 황급히 신성력을 발휘하여 말론을 치료해 주었다.

빈첸이 말했다.

“대련에 이골이 난 5성 무인도 같은 실수를 하였으니 그리 창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르곤 경.”

제론도 같은 실수를 했다.

빈첸은 저들을 이해했다.

방심하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세리도 대련장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무엇인가가 들려 있었고, 대련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세리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검은색 제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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