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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30화 (30/184)

환생의 정석 30화

한 번의 주먹.

그것으로 빈첸은 말론의 거리를 정확히 인지했다.

‘현대의 무인들은 무투술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더군.’

이 한 번의 허튼 주먹질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상대와 나의 거리를 알려주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걸 알지 못하는 듯했다.

말론이 주먹을 내지르자 몸의 중심이 깨졌다.

‘공간은 넓지 않아.’

좌우로 침대가 있어 움직임에 제약이 많다.

단순 타격으로는 큰 데미지를 주기 어렵다.

말론이 재차 주먹을 뻗었다.

빈첸이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 어억, 괜찮은 거죠?

그야말로 종잇장 한 장 차이.

말론의 주먹이 빈첸의 얼굴에 닿을 뻔했다.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율리안은 기겁했고, 빈첸은 오히려 훨씬 편안해졌다.

‘저놈에게는 거리 감각이 전혀 없어.’

몸을 쓸 때와 검을 쓸 때의 거리감은 완전히 다르다.

말론은 그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쥐새끼 같은 놈.”

피하는 것은 제법이었다.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는 보여주어야 했다.

이 생활관의 제왕이 누구인지를.

그는 그의 방식으로, 그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다.

그가 다시 한번 주먹을 뻗었다.

‘또 뒤로 빠지겠지.’

그럼 스텝을 이용하여 앞으로 움직여 연격을 낼 것이다…… 라고 생각했으나.

‘응?’

빈첸은 말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무투(武鬪)는 무학을 바탕으로 한 ‘수읽기 싸움’이다.

상대가 무엇을 할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읽어내야 한다.

빈첸은 말론의 생각을 훤히 읽었다.

생각만 읽은 것이 아니었다.

‘느려.’

그 움직임마저도 수월하게 읽어냈다.

시종장 레일사를 떠올릴 것도 없었다.

그보다 한참 수준이 낮은 제론과도 시간이 날 때마다 대련을 해왔었다.

‘가까이 붙는다.’

밀착해서 붙었다.

순간, 말론이 뻗은 팔을 낚아챘다.

그것은 레반 아덴카와 싸울 때도 보여주었던 손싸움의 기예였다.

빈첸의 손가락이 말론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사냥감을 움켜쥔 맹금류의 발톱처럼.

그립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율리안에게 가르쳐주었다.

‘제대로 된 무인이었다면 뜯어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론은 뜯어내지 못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내 힘이 약하다면.’

빈첸은 말론이 주먹을 내뻗는 힘을 역이용했다.

‘상대의 힘을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감정동조를 통해 느껴졌다.

율리안은 지금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어어?”

말론이 허공에 떴다.

말론의 힘을 이용하여 말론을 집어 던졌다.

유술의 일종이었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말론의 몸이 땅에 떨어졌다.

마나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도, 육체적인 불리함이 있어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그것이 무학(武學)이다.

시젠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덩치의 말론이 날아갔어……!’

상대의 힘을 역이용했다는 것 정도는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것과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은 달랐다.

‘어떻게…….’

이건 단순히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빈첸에게 이곳은 낯선 곳이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제 실력을 뽑아내려면 정신적으로도 강자여야 했다.

힘에 굴복했던 시젠에게 있어서 오늘의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너희들이 두려워했던 폭력의 실체는 이렇게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

“그러니 극복해라.”

“……네?”

같은 9급 생도라는 것을 잊고서, 시젠은 저도 모르게 존대를 하고 말았다.

“우리는 약하지 않아.”

아니.

나는 약해.

시젠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공포조차 극복하지 못할 거면 그냥 포기하고.”

이곳은 빈첸이 아덴카의 무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곳이다.

그리고 빈첸답게 그 발을 내디뎠다.

“내게 겁쟁이 친구는 필요 없으니까.”

빈첸은 여전히 쓰러져 캑캑대는 말론을 내버려 두고서 문을 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저들의 몫이었다.

* * *

문 앞에 서 있던 셀비라는 빈첸과 눈이 마주쳤다.

셀비라는 당황하지 않고 싱긋 웃어 보였다.

“첫날부터 거하게 사고를 치네. 내 이름은 셀비라야. 반가워.”

셀비라가 손을 내밀었다.

“빈첸이다.”

빈첸이 그 손을 맞잡았다.

순간, 셀비라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지러워.’

사실 그녀는 ‘안목’ 특성을 최대한도로 활성화 중인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빈첸을 읽어내고 싶어서.

그러려고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몸을 지탱했고, 빈첸이 그녀를 가볍게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

“고, 고마워.”

셀비라는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붉은 빛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셀비라는 몸을 일으키고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왜 그렇게 봐?”

“생활관 내에서 특성 사용은 금지 아니었던가?”

“…….”

셀비라는 잠시 침묵했다.

‘안목’ 특성은 무인들이 거의 익히지 않았고, 잘 모르는 특성이다.

마나 흐름도 지극히 정제되어 있어서 거의 티가 나지 않는 특성이기도 했다.

“내가 특성 사용을 했다고 확신하는 거야?”

“확신할 것도 없이 너무 명확하던데.”

“어떻게 알았어?”

“그냥 느껴졌다.”

“……진짜?”

율리안은 셀비라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듯했다.

-황당하게도 진짜래. 이 영감님은 그냥 다 느끼고 다 보인대. 심상 없이 수련해서 그렇대. 어이없지? 사기적이지? 괜찮아, 나도 그랬어.

빈첸은 율리안의 혼잣말을 무시했다.

“특성을 사용한 접근이 썩 유쾌하지는 않군.”

셀비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셀비라는 분명 이상한 특성을 사용해서 자신을 살펴보았다.

손을 잡은 순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셀비라는 휴- 한숨을 내쉬고 사과했다.

“생활관 내에서 무력행사를 위한 특성은 금지되어 있어. 그러나 그 외 다른 특성은 사용 가능해.”

도대체 자신이 특성을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셀비라는 빠르게 판단했다.

빈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내게 겁쟁이 친구는 필요 없으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겁쟁이가 아닌 친구는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겁을 내지 않기로 했다.

“미안해. 내가 무례했어. 사과할게. 진심으로 미안해.”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셀비라라는 아이.

접근하는 방식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후의 태도와 대처는 꽤 괜찮았다.

생도들 앞에서 머리 숙여 사과한다는 건, 분명히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셀비라가 물었다.

“우리는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녀의 ‘안목’으로는 빈첸을 읽어낼 수 없었다.

빈첸에게서 뿜어져 나온 붉은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빈첸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빈첸이 대답했다.

“충분히 마음을 나눈다면.”

누구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

알량한 기술이 아니라 진심이 있다면 말이다.

사미온의 혈통이었던 ‘데이븐’이 동네 꼬맹이였던 아슬란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친구가 될 수 있겠지.”

빈첸이 복도를 걸었다.

셀비라는 그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런데, 소란은 아직 고요해지지 않았다.

“비켜!”

어느덧 기운을 차린 말론이었다.

그는 씩씩대며 일어섰다.

“거기 서!”

그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죽여 버릴 거니까.”

셀비라는 빈첸과 말론의 모습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직 포효하지 않은 사자와 품위가 손상된 승냥이.’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덴카 직계 둘이 정식으로 결투를 치르게 되었다.

9급 생활관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붉은 요새’의 부요새장.

바르곤은 누이의 부고 소식에 밤잠을 설쳤다.

‘피곤하군.’

그는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왜.’

왜 누이는 모든 유산을 자신에게 남기겠다는 유서를 쓴 것일까.

왜 그 막대한 유산을 자신에게 남긴 걸까.

‘누님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실종된 동생으로 치부하였고 자신과 마탑의 연결고리를 인위적으로 모두 끊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유산이라니.

‘나는 이런 걸 바라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데 그때, 보고가 하나 올라왔다.

“셀비라가 마나석 통신을 사용하여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셀비라가 누구지?”

“9급 생활관의 대표생도입니다.”

아아,

말론과 경쟁한다는 그 여자아이인가.

말론도, 셀비라도, 바르곤의 관심대상은 아니었다.

“나한테 보고가 올라올 정도의 일인가?”

애초에 그는 붉은 요새의 부책임자였고, 9급 생도와 얽힐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게…… 말론 공자와 빈첸 공자가 정식으로 결투를 한다고 합니다. 하여 중재무인이 필요한 상황이라 합니다.”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빈첸이 말론을 때려눕혔고, 말론은 그에 승복하지 못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상황이라 하였다.

“어쨌든 아덴카 직계 둘의 격돌이라 보고를 올려야 할 것 같아서…… 시답잖은 보고였다면 죄송합니다.”

“아니다.”

바르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거라.”

“……예?”

“빈첸 생도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내게 직접 보고하여도 좋다.”

보고자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부요새장과 독대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회다.

“알겠습니다.”

“결투 위치는?”

“레빙턴 대련장입니다.”

9급 생활관과 가장 가까운 대련장이었다.

보고자는 눈치껏 빠르게 말했다.

“중재무인으로 누구를 파견할까요?”

“그럴 필요 없다.”

바르곤은 빈첸과 말론의 관계에 대해 잘은 모른다.

그러나 말론이 빈첸을 무척이나 괴롭혔다는 풍문 정도는 들었었다.

“내가 가도록 하지.”

바르곤은 곧바로 워프를 사용하여 레빙턴 대련장으로 향했다.

보고자는 두 눈을 꿈뻑 거렸다.

“바르곤 경……?”

결투에 있어서 중재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보통은 상급 무인이 중재를 하였으나, 가문 대 가문 혹은 도시국가 대 도시국가쯤 되는 큰 규모의 행사에서는 마법사가 중재했다.

‘중재’에 있어서는 무인보다는 마법사가 유리하다는 것이 정론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무인에 비하여 그 숫자가 현저히 적었고 몸값도 더 비쌌다.

그들이 중재를 나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바르곤 경이 직접 중재를 가셨다고?’

바르곤이 생도들의 결투에 중재자로 나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한편, 바르곤은 레빙턴 대련장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군.’

레빙턴 대련장.

9급 생활관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이곳은 순수히 대련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보통은 9급 생도들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9급 생도들의 보편적인 힘과 능력을 감안하여 만들어진 곳이고, 특별한 마법적 처리는 되어 있지 않았다.

바깥에서부터 말론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네놈의 뼈를 통째로 씹어 먹어주마.”

어지간히도 화가 난 것 같았다.

바르곤이 입구를 거쳐 대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생도들의 시선이 바르곤으로 향했다.

다들 의아해했다.

‘바르곤 경?’

바르곤은 붉은 요새 내에서 보기 어려운 존재다.

상급생도가 되어야 만날 수 있는 붉은 요새의 상급 관리자.

바르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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