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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29화 (29/184)

환생의 정석 29화

온갖 소식지에서 속보를 전했다.

-바르넬리 사망.

-6마탑의 별이 지다.

6마탑과 붉은 요새는 멀지 않기에 몇 시간 만에 그 소식이 닿았다.

어둠계열 속성의 마나를 연구하다가 너무 무리했고, 그 어둠에 집어삼켜졌다고 알려졌다.

-말도 안 돼.

율리안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계획이 망가졌다.

분산 투자보다는 집중 투자를 선택했었다.

그래야만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했었으니까.

사실 ‘못난이 빈첸’의 입장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먼저 애도하는 것이 순서이고 예의이지 않겠느냐?’

-지금 제가 예의 차리게 생겼어요? 우리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생겼는데?

그런데 유서의 소식지에 마지막 부근에는 유산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그녀의 모든 마법적 연구결과와 유산을 하나뿐인 동생인 바르곤에게 남긴다는 유서가 있었다.

그 유서는 무려 10년 전에 작성된 유서였고, 바르넬리와 계약한 법관에 의해 공증되어 있었다.

‘바르곤이라면 아까 그 마법사 아니냐?’

-응? 그러게요.

마탑 측에서는 바르곤과의 연결고리를 대부분 끊어내고 기록을 지웠다.

바르넬리도 그렇게 했었다.

-오래전 실종된 남동생이 있었다……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그게 바르곤 경일 줄은 몰랐네요.

사실 율리안은 ‘바르곤’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깊이 공부한 적이 없었다.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에 대해 공부를 좀 해볼게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그 구멍이, 율리안에게는 보이는 듯했다.

* * *

하루가 흘렀다.

빈첸에게는 ‘9급’을 상징하는 하얀색 배지(badge)가 주어졌다.

이제 빈첸은 7공자 빈첸이 아니라, 9급 생도 빈첸이 되었다.

다시 하루가 흐르자 그의 숙소가 배정되었다.

9급 생도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생활관이었다.

이 생활관을 ‘9급 생활관’이라 불렀는데, 빈첸에게 배정된 방은 그중에서도 5생활관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빈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다들 바짝 긴장하고 있네.’

자신 때문에 긴장한 건 아닐 것이다.

보아하니 ‘5생활관’은 9급 중에서도 가장 급이 낮은 초보 생도들인 모양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예전에도 이렇게 모여서 단체 수련을 했었다.

‘6개의 방이 있으니 9급 생도의 전체 숫자는 대략 30여 명인가.’

나이는 대다수가 열넷, 열다섯 정도였다.

침상은 5개.

모두가 모서리 부근에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수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명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각을 잡고 앉아 시간을 버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생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들 딱딱하게 굳었어.’

그때.

5생활관의 문을 누군가가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인데 누군지 모르겠군.’

그가 들어오자 다른 생도들이 벌떡 일어섰다.

완전히 굳은 자세로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게 이곳의 예의인 모양이었다.

‘율리안. 이곳 생활수칙에 저런 예의 규범 같은 게 있나?’

-없어요.

그래서 빈첸은 그냥 가만히 앉아 짐을 정리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아덴카의 직계였다.

아덴카의 5공자이자, 9급 생도들의 실질적 리더들 중 한 명인 말론 아덴카.

‘쟨 누군데 이렇게 내 기분이 더럽지?’

-형 새끼요.

‘형 새끼?’

-저 새끼, 나한테 똥물 먹였어요.

‘왜?’

-날이 좋아서요. 그리고 저 새끼는 내 손가락을 부러뜨리기도 했어요.

‘그건 또 왜?’

-날이 안 좋아서요.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다.

그는 다른 9급 생도들에 비해 덩치가 상당히 컸다.

“오랜만이다, 빈첸. 반갑구나, 흐흐.”

빈첸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이름을 알고 그를 보자 몇몇 기억들이 떠올랐다.

율리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유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 짓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낄낄대던 장면이 떠올랐다.

빈첸이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가 반가운 사이였던가?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도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던지 생활관의 분위기가 차게 가라앉았다.

다들 겁먹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빈첸이 거기에 한술 더 떴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형은 아직도 9급을 벗어나지 못한 거네.”

“뭐?”

빈첸의 눈에 말론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아덴카의 직계라고 해서 모두가 대단한 건 아닌 모양이군.’

몸은 단단해 보였으나 그뿐이었다.

그에게서는 무인의 날카로운 기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빈첸의 눈으로 본 말론은 스스로 애송이임을 인정하지 않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저보다는 좀 나았어요.

그래서 말론은 빈첸을 괴롭혔다.

빈첸이 더욱 밑바닥에 있어야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더 낮은 자가 있어야만 하니까.

“이럴 시간 있으면 수련이나 조금 더 해라.”

이곳의 대부분은 열넷과 열다섯.

말론은 열여섯 살이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승급하는 동안 말론은 9급에 남았고, 9급의 폭군이 되었다.

“말년 9급.”

말론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적어도 이곳.

9급 생활관에서만큼은 주역 중 하나였고, 두 명의 대표생도 중 한 명이었다.

“시젠. 나와.”

이곳에서만큼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호명 받은 생도 하나가 재빨리 움직여 말론 앞에 섰다.

“아직도 막내 교육을 안 했어?”

“미, 미안해. 아직 잘…….”

짝!

말론은 가차 없이 그의 뺨을 때렸다.

시젠의 뺨이 부풀어 올랐다.

분명한 부조리였으나 아무도 말론을 말리지 못했다.

빈첸은 별다른 반응 없이 말론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말론은 기세등등해졌다.

“이제야 현실 자각이 좀 되나?”

“…….”

말론은 시젠을 거칠게 밀쳤다.

시젠은 침상 쪽으로 넘어졌다가 곧바로 다시 일어섰다.

말론은 빈첸 앞으로 다가와 볼을 툭툭 쳤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빈첸이 입을 열었다.

“말.”

“뭐?”

“말하라며.”

말론은 이를 꽉 깨물었다.

“다시 말해봐.”

“다시 말.”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얼마나 가진 것이 보잘것없으면 폭력으로 생도들을 지배하려 드는 거냐?”

딱히 말론만 탓할 생각은 없었다.

무인들의 세계는 냉혹하다.

약자는 짓밟힌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외팔이 데이븐은 누구보다 더 철저히 짓밟혔었다.

다른 생도들이 말론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약해서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곧 옳음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옳지 않았다.

겁에 질려 침묵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무인에게 허락된 두려움은 경외뿐이다.”

그 외의 다른 두려움은 극복해 내야 한다.

불의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외팔이였던 데이븐은 그렇게 살아왔다.

이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 * *

9급 생도들의 리더를 꼽으라면 누구나가 두 명을 꼽는다.

한 명은 열여섯 살인 말론.

또 다른 한 명은 열네 살인 셀비라였다.

그녀는 아덴카의 혈육이 아니었으나 쾌검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실력과 온화한 포용력으로 생도들을 제 세력으로 만들었다.

현재로서는 8급으로 승급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오늘 꽤 좋은 말을 들었다.

“무인에게 허락된 두려움은 경외뿐이다.”

셀비라는 5생활관 문 밖에 서서 빈첸의 말을 기다려 보았다.

아덴카의 대표적인 못난이.

말론보다 더 실패한 낙오자.

셀비라는 빈첸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뿐이라면 의미 없어.’

멋있는 말.

좋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저 달변가에 불과하다.

아덴카라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무게를 증명해야 한다.

‘근데…….’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이 빛은 뭐야?’

그녀에게는 남들에게 알리지 않은 특성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희귀 특성 중 하나인 ‘안목’이었다.

무인들의 가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성이었다.

이 ‘안목’ 특성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발현되었는데 대부분 색깔을 가진 빛으로 표현되었다.

‘지금 생활관 문이 닫혀 있는데.’

그 닫힌 문을 비집고 새어 나올 정도로 강한 빛이 있었다.

‘색깔이 붉은색.’

그녀는 여지껏 붉은색을 본 적이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붉은색’은 현재 안목 특성 소유자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잠재력.’

그 잠재력이 뛰어날 수도 있고 뛰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자신이 가진 ‘안목’의 힘으로는 빈첸을 파악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문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 * *

‘대표생도가 두 명이라 했지?’

-맞아요. 한 명은 셀비라에요.

율리안은 보지 않고도 많은 것을 이해하고 파악했다.

-이 정도 소란이면 분명 셀비라도 문 앞에 있을 거예요. 들어올 타이밍을 노리고 있을…….

‘안다.’

-어떻게요?

‘기척이 느껴져.’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요. 뭐 어련하시겠어요. 아무튼 셀비라를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셀비라는 정치적인 머리가 비상한 애거든요.

마냥 실력만 뛰어나서는 세력을 만들기 어렵다.

세력을 구축하고 형성하는 것.

그 세를 불리는 것.

그것 역시 ‘붉은 요새’에서 생도들에게 바라는 모습이었다.

셀비라는 그 모습을 착실히 연출해 냈고.

-그러니까 셀비라를…….

율리안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요, 뭐. 마음대로 해요.

율리안은 늘 순리적인 절차와 최상의 결과를 이론적으로 계산해 왔다.

그러나 빈첸은 아니었다.

다짜고짜 말론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율리안.’

빈첸의 돌발 행동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시젠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머릿속으로만 수천 번 상상했던 것을, 빈첸이 직접 해버렸다.

‘지, 진짜 쳤잖아!’

그리고 아주 잠깐 상상했다.

말론이 저 주먹에 얻어맞고 쓰러지는 통쾌한 상상을.

그러나 그건 상상에 불과했다.

말론이 피식 웃는 게 보였다.

“가려운데. 지금 친 거냐?”

그렇다.

적어도 이곳, 9급 생활관에서 무력으로 말론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젠은 짙은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끝났어.’

자신은 빈첸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교육할 시간도 없었지만- 또다시 험한 꼴을 당할 것이 뻔했다.

말론은 거대한 벽이다.

넘을 수 없는.

율리안도 약간 당황했다.

-괜찮은…… 거죠? 타격이 전혀 안 들어갔는데요.

‘당연하지. 일부러 그랬으니까.’

체중을 전혀 싣지 않았다.

마나도 쓰지 않았다.

생활관 내에서 폭력을 위한 마나 사용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마나란 육체적인 한계를 뛰어넘도록 고안된 힘.

그 힘이 없다면 육체적인 우월함이 곧 강함이었다.

빈첸을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빈첸이 그것을 건드려주었다.

‘그래야 방심할 거 아니냐?’

빈첸은 결투에 잔뼈가 굵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길 수 있을지,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경로가 보였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알았다.

빈첸의 생각대로, 말론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먼저자초한 것이다.”

후웅-!

말론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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