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28화
바르곤에게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의문점이 있었다.
“시종들을 왜 그냥 두셨습니까?”
“언제 말이냐?”
“그곳에는 십여 마리의 청안 백호가 있었습니다.”
바르곤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했다.
‘청안 백호의 습성을 알고서 그리 움직인 것입니까, 아니면.’
만약 빈첸이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시종과 시녀의 안녕 따위는 상관없이, 그저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면.
빈첸에 대한 보고의 내용이 많이 달라질 것이었다.
빈첸이 말했다.
“마법사는 무인의 자부심이 어디에서 온다 생각하지?”
“강함에서 온다 말하더군요.”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무인의 자부심은 지키는 것으로부터 온다.”
“…….”
“내가 그렇게 하여야 저들을 지킬 수 있었다.”
결국 빈첸은 최상의 결과를 끌어냈다.
그게 율리안과 빈첸이 찾아낸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것들이 실제 청안 백호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랬다면 나의 방법도 달라졌겠지.”
바르곤은 입을 다물었다.
빈첸은 모든 요소를 고려했고 최적의 결정을 내린 게 맞았다.
행운이 아니었다.
‘소문이 잘못되었군.’
그가 본 빈첸은 결코 못난이가 아니었다.
그는 빈첸을 임시 숙소로 데려다 준 뒤, 곧바로 총책임자 헤르카에게 보고를 올렸다.
“무인의 자부심이 지키는 것에서 온다고 말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로는 그 어떤 아덴카의 직계들보다 진일보된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군.”
헤르카는 바르곤의 보고를 걸러 들었다.
7성 무인 헤르카.
붉은 요새의 수장인 그녀는 뛰어난 무인이었으나 마법사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헤르카가 유별난 것이 아니라 많은 무인들이 그랬다.
“바르곤 경, 콩깍지 너무 씐 거 아냐? 내가 생각하는 아덴카의 직계라면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모조리 베어 넘겼을 거야.”
그녀가 생각하는 무인은 그랬다.
바르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또! 무식한 소리 한다.’
마법사들은 무인을 이해하지 못했고, 무인은 마법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두 집단 사이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벽이 있었다.
“빈첸 공자가 이걸 직접 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요소들을 고려했는지,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은 변수들을 통제했는지! 그걸 모르십니까?”
“에이, 그걸 알면 내가 마법사 했지.”
“…….”
“가끔 바르곤 경은 너무 당연한 소리를 열 내면서 하더라. 그러지 마. 빨리 늙어.”
“……하아.”
바르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다면 저 얄미운 인중을 향해 마법을 퍼붓고 싶을 정도였다.
“그의 스승은? 구해졌어?”
엄밀히 말해서 ‘요새’이지 ‘아카데미’가 아니었다.
승급을 시키고 임무를 부여하기는 하지만 성취까지 도와주지는 않는다.
이곳에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보통 아덴카의 직계들을 위해서는 아덴카의 장로원에서 장로가 파견된다.
“아직 기별은 없습니다.”
“지원한 장로가 아무도 없다고? 한 명도? 아예?”
“예.”
문제는 그 파견이 ‘자원’의 형식이라는 것.
장로원 내에도 여러 파벌이 있으며 그들이 지원하는 후계자가 다들 달랐다.
“진짜 없어?”
“없습니다.”
“열넷이 되도록 우호적인 장로 하나를 만들지 못했나 보네.”
“…….”
“하긴 그 여우 같은 늙은이들이 뒷배도 없는 빈첸을 도울 리는 없겠지. 그래서? 빈첸 공자는 어떻게 한대?”
“본가로 서신을 보내 놓았다고 합니다.”
“서신? 이제 와서?”
헤르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정도면 바르곤 경이 잘못 본 거 아니야? 무인치고 똑똑해서 지나치게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태껏 스승 한 명 구하지 못한 직계가 어찌 후계 경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있어 빈첸은 이미 패배자였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농땡이 치지 마십시오.”
보고를 끝낸 바르곤은 다시금 빈첸을 찾았다.
빈첸은 그에게 할당된 방에서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어쩐 일이지?”
“오늘까지 공자님을 공자님으로 대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내일부터는 ‘빈첸 공자’가 아니라 ‘9급 생도 빈첸’이 된다.
오늘의 존중은 없어진다.
그래서 그는 확인해야 했다.
“아덴카의 검식을 어떻게 수련하려 하십니까?”
“좋은 스승을 섭외할 것이다.”
지원이 아니라 섭외란다.
바르곤은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마땅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누구입니까?”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쉬고 싶으니 자리를 비켜주면 좋겠는데.”
바르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첸은 멀어지는 바르곤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바르곤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호감에는 호감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계획의 일부를 말해주었다.
“붉은 요새에 입성 이후 치르는 공식적인 일정이 있다고 들었다.”
“예. 맞습니다.”
이것은 아덴카뿐만 아니라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일정이기도 했다.
검을 상징하는 두 가문이 친선을 명분으로 격돌하는 행사였으니까.
이 행사의 이름은 ‘친선교류회’였다.
마치 이번에는 아덴카의 직계와 사미온의 직계가 맞부딪치는 행사다.
빈첸도 자신의 경쟁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사미온의 6공자.’
그와 경쟁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의 승리 이후, 나의 스승이 정해질 것이니 두고 보아라.”
바르곤은 한 단어에 집중했다.
‘승리?’
참고로 ‘친선교류회’에서 아덴카가 사미온을 넘어선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2공녀 데이아.
오로지 그녀만이 사미온의 2공녀를 이겨내고 친선교류회의 우승자가 되었다.
“……건승을 빌겠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빈첸이 말한 승리가 정말로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로 빈첸이 승리하게 된다면.
바르곤은 밖으로 나가기 직전 한 마디를 더했다.
“원하신다면, 저를 후원자로 신청하셔도 됩니다.”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제안이었다.
* * *
바르곤은 본래 마탑이 고향이었다.
마법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있어 ‘마탑 출신’은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마탑 출신의 마법사들에게는 온갖 지원과 혜택이 주어지고 배움의 기회도 훨씬 더 많았다.
마탑에서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바르곤에게는 얘기가 좀 달랐다.
-네 누이를 좀 봐라, 이 녀석아.
바르곤은 마탑 출신이지만 비교적 평범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났다.
마도계열의 중급 신 중 하나의 가호를 가졌고, 마법 이해도나 습득력은 딱 중간 정도.
그에 반해 그의 누나는 천재였다.
-네 누이의 반만 좀 닮아보거라.
처음 그는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다.
자신의 누이처럼 되기 위해서.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마탑을 나가겠습니다.
이론과 학문으로는 결코 누이를 넘어설 수 없었다.
모두가 꿈꾸는 마탑이라지만 그에게는 지옥이었다.
-그것이 네 뜻이라면 존중하마.
그의 부모는 바르곤을 잡지 않았다.
잡는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았을 텐데.
바르곤은 마법 연구를 하는 대신 실전경험을 쌓는 데에 주력했다.
용병 마법사가 되어 수많은 마물들과 싸웠고, 또 공성전에서 마법사의 위력을 톡톡히 보여주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마탑으로 되돌아가려 했으나 출입을 거부당했다.
출입거부 이유는 명확했다.
-마법을 사적인 영달을 위해 사용한 파렴치한.
마법사들은 지고지순한 존재이고 인류의 번영과 공적인 영역에서의 발전을 이룩해야만 한다.
그러나 바르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용병으로서는 성공했고,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몰라도, 마법사로서의 명예는 박탈당했다.
어느 순간,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누이와의 연락도 완전히 끊겼다.
‘그래도 잘들 있어서 다행이구나.’
누이는 6마탑의 부탑주의 자리에 오르며 집안의 명예를 드높였다.
수많은 마법적 이론과 공식을 창안했고, 그녀의 소식이 가끔 마법 소식지에 실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인터뷰에 참여하기도 했다.
‘건강히 잘들 지내십시오.’
마법사로서의 명예는 포기했다.
철저히 실리를 위해 움직였다.
어느덧 그는 40대가 되었고 아덴카 가문과 아주 좋은 조건에 계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었다.
‘탑 외 마법사’라 불리는 이들 중에는 꽤 성공한 편이었다.
그러나 돈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껏 그는 그것을 외면하며 살아왔다.
-요새의 문을 열어라.
빈첸을 보자 억눌려왔던 욕망이 다시금 비집고 올라왔다.
그도 사실은 인정받고 싶었다.
누이만큼은 안 되어도, 누이의 발자취 정도는 좇을 수 있는 마법사가 되길 원했었다.
그러나 이제 너무 멀리 왔다.
‘왜인지 빈첸 공자를 응원하게 되는군.’
빈첸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고, 아마 지금도 같은 처지일 것이다.
최근 급격히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는 했으나 여전히 가문 내에서 그의 입지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잘해주길 빕니다. 진심으로.’
빈첸에게 자신을 투영했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렇지만 빈첸이 보다 높은 곳으로 도약하길 바라는 것은 진심이었다.
빈첸은 분명, 바르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또 무엇인가를 자극했다.
-그 날의 승리 이후, 나의 스승이 정해질 것이니 두고 보아라.
바르곤 자신은 현실에 굴복했지만 빈첸은 그렇지 않았다.
빈첸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그 날의 승리를 장담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빈첸 공자는 직접 해내고 있어.’
그러니 이제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정말로 빈첸이 ‘승리’를 거머쥔다면, 그는 남은 인생을 빈첸을 위해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소명인 것처럼.
* * *
빈첸은 임시 숙소로 들어왔다.
사실 빈첸은 바르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후견인 제도에 대해 설명 좀 해봐.’
-예전에는 이런 커리큘럼이 없었어요?
본가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이들과 합숙하며 수련하고 임무를 할당받는 것.
분명 이전에도 존재했던 성장방식이었다.
‘있었다. 그렇지만 후견인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어.’
-그럼 숙식이며 의복이며 병장기 같은 건 어떻게 했어요?
‘그런 건 응당 가문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냐?’
500년 전에는 수련과 임무에만 몰두하면 됐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바야흐로 자급자족의 시대가 되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현대 무인들의 필수 능력이라나 뭐라나.
‘수련과 대련은 그렇게 온실 속 화초처럼 시키더니. 이런 부분은 아주 각박하고 혹독해졌구나.’
-어때요? 자본 위주 세상의 쓴맛이?
‘제법 쓰고 무섭구나.’
임무 할당비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으니, 그들에게는 ‘후견인’이 필요했다.
후견인을 구하는 것 역시 생도의 능력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
빈첸은 환생 이래 최초로 위기 아닌 위기를 맞이했다.
‘나는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
-걱정 마요. 당분간 쓸 돈은 쟁여뒀으니.
아덴카는 본래 부유한 가문이고 율리안에게는 각종 수당들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율리안은 그 수당들을 꾸준히 모아 아덴카와 가장 가까운 ‘6마탑’에 투자했고, 그 투자는 성공적이었다.
투자 대상이 바로 몇 년 전 부탑주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넉넉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인 생활비 정도는 나올 거예요. 그걸 배당금이라고 해요.
‘신기한 세상이군.’
-부탑주는 여전히 젊은 축이고, 어쩌면 탑주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제게 지급되는 돈이 두 배는 늘어날 거예요.
‘이런 시스템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어렵지 않아요. 저는 돈으로 그녀의 시간을 산 거예요. 그 돈을 삼킨 그녀는 계속해서 제 대신 일을 해줄 건데.
단점도 있었다.
부탑주가 죽으면 투자금은 사라진다.
-6마탑의 부탑주가 그렇게 쉽게 죽진 않겠죠.
‘그건 그렇겠군.’
빈첸도, 율리안도 그럴 줄로만 알았다.
그날 밤.
6마탑의 부탑주 바르넬리의 부고 소식이 대륙에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