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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27화 (27/184)

환생의 정석 27화

사사-!

빈첸의 몸이 가볍게 움직였다.

레일사 밑에서 수련해 왔던 설인 걸음이 그 진가를 발휘했다.

바르곤이 그것을 발견했다.

‘눈에 발자국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

보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현재 빈첸의 나이와 수준을 고려하여 저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특성은 몇 가지 없었다.

‘저건…… 설인 걸음?’

빈첸이 어떻게 특성을 발현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덴카가 레일사와 훈련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덴카 내에서는 꽤 유명했으나, 그 소문이 밖으로 퍼져 나가지는 않은 상태였다.

‘레일사 시종장의 도움을 받은 것 같군.’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될 수는 없었다.

빈첸은 특성을 익힐 수 없는 몸이니까.

‘어떻게 특성을 익혔지?’

바르곤이 바람은 그저 ‘지나친 실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오해였다.

실망을 하지 않는 정도의 바람은 틀렸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아덴카의 직계가 음성전달 속도를 계산하여 ‘중앙 집결 요소’의 위치를 파악할 줄은 몰랐다.

마법사인 그는 저 수학적인 계산에 몹시 흡족했다.

지금 빈첸은 정확하게 해당 요소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또 다른 청안 백호가 있다.’

중앙 집결 요소는 절대 혼자 두지 않는다.

공격 경로에 반드시 ‘가디언’을 둔다.

빈첸이 청안 백호를 향해 스르르 움직였고, 청안 백호는 자신을 지나간 빈첸을 향해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후웅-!

앞발은 속절없이 허공을 스쳤다.

빈첸은 가디언의 역할을 떠안은 청안 백호를 스쳐 지나갔다.

‘피했잖아?’

단순히 달린 것이 아니었다.

빈첸은 분명 백호의 움직임을 보았고, 피했다.

청안 백호는 사냥감을 놓친 것이 분한 것 같았다.

크아아앙!

백호는 포효하고 빈첸의 뒤를 쫓았다.

청안 백호는 결코 느린 마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빈첸 공자를 쫓지 못하고 있다.’

설인 걸음 특성을 활용한 빈첸은 청안 백호보다 더 빨랐다.

빈첸이 검을 뽑아 들었다.

붉은 빛을 내는 검이었다.

저 검의 이름은 홍련.

현 가주의 첫 시작을 알렸던 검이 빈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아덴카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헛소문인 줄 알았다.

붉은 요새의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바르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히 ‘홍련’이었다.

한편,

‘중앙 집결 요소’인 백호를 바라보는 빈첸이 씨익 웃었다.

‘보인다.’

저 가짜 마물들은 생명이 없다.

‘검로를 만들지 않아도 돼.’

생명을 베어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검로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요소를 인위적으로 배합하여 이능검격을 펼쳐야만 한다.

그러나 저 마물은 아니었다.

검은 실선이 보인다.

이능검격은 ‘이능’을 베는 검이다.

마법은 이능이다.

자연스레 보이는 저 선을 베어내면, 마물은 소멸할 것이다.

‘벤다.’

빈첸이 검을 휘둘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 번.

아래에서 위로 다시 한 번.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연격.

아무런 특성의 발현도 없었으나 그의 움직임은 유기적이었고 자연스러웠다.

청안 백호의 몸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빈첸의 등 뒤에 쫓아온 백호가 빈첸을 향해 다시금 앞발을 휘둘렀다.

-혀, 형님 뒤요!

‘알아.’

빈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법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것을.

오히려 찔끔 놀란 것은 바르곤이었다.

‘젠장!’

입성식은 정식 시험은 아니었다.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관행이었고, 여기서 입성자가 지나치게 크게 다치면 곤란해진다.

그래서 진짜 마물이 아닌 허상 마물을 사용하는 것이었고.

다행히 마법의 연결이 끊어졌다.

인공적으로 구성했던 안개와 눈보라가 사라졌다.

백호의 앞발이 빈첸의 등에 닿기 직전, 사라져 버렸다.

‘하아.’

바르곤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내가…… 뭘 본 거냐?’

아덴카의 직계들 중 ‘중앙 집결 요소’만 쏙 골라 파괴한 경우는 없었다.

그들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보이는 족족 청안 백호를 베어냈다.

그렇게 요새의 입구까지 도달했었다.

‘백호를 베어낸 기세조차, 다른 직계들에 비해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났다.

빈첸이 보여준 것은 완벽한 소멸이었다.

단순히 허상을 파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마법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렇기에 마지막 일격도 그냥 내버려 둔 거다.’

마지막 공격이 자신에게 닿지 않을 것을 확신했기에.

‘빈첸 공자는…… 확신하고 있었고. 나는 몰랐다.’

빈첸은 지체없이 걸어와 요새의 문 앞에 섰다.

요새는 거대했고 그 입구는 웅장했다.

“요새의 문을 열어라.”

* * *

붉은 요새는 태양검제 아슬란이 대악마의 신전을 파괴하고 그것을 기념하여 만든 요새였다.

이 요새는 산맥 너머 대악마 추종자들을 막아내는 천혜의 요새였으며, 아덴카의 수호방패 중 하나였다.

그곳의 거대한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저만치 멀리 있던 윌슨도 문이 열리는 걸 발견했다.

“우, 우리 안 죽은 거지?”

“정신 챙겨. 얼른 공자님께 가자.”

바로 직전, 윌슨은 청안 백호를 보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사실 포효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 살았다.”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리는 이미 저만치 앞서서 걷고 있었다.

윌슨이 그 뒤를 쫓았다.

“가, 같이 가, 누나!”

윌슨은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누군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나타났다.

마법사였다.

“으악!”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해 있던 윌슨이 놀라 나자빠졌다.

마법사는 윌슨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서는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네가 빈첸 공자를 모시는 시종이냐?”

“그, 그렇습니다.”

빈첸도 마법사가 나타났음을 알았다.

‘저자가 바르곤이겠군.’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윌슨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 바르곤은 윌슨을 일으켜준 뒤 물었다.

“왜 그리 겁에 질려 있느냐?”

“무시무시한 호랑이 마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래? 지금은 안 보이는데?”

“그, 그건…….”

윌슨은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마물이 인위적으로 구현되었다는 것조차 몰랐다.

‘진짜 몰랐군.’

바르곤은 이 입성식의 내용이 외부로 퍼져나갔음을 의심했다.

그래서 빈첸이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놓았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했다.

일단 시종의 태도에서는 증거를 찾기 어려웠다.

시종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고 그는 앞서가는 세리를 불러 세웠다.

“너는 겁을 먹지 않았구나.”

“공자님의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호오.

바르곤은 세리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녀에게서 무예를 익힌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분명 기개는 단단했다.

바르곤은 조금 더 둘을 떠보았다.

“너희가 맞닥뜨린 마물은 청안 백호였다. 그리고 놈은 마나에 매우 민감한 마물이지.”

그래서 마나가 없는 일반인보다, 어중간하게 마나를 익힌 무인에게 더 위험한 마물이기도 했다.

“빈첸 공자는 일부러 마나를 흘리면서 움직였어.”

바르곤은 마법사의 예리한 눈썰미로 시종과 시녀를 살폈다.

시종은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고, 시녀에게서는 흔들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너희가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종에게 물었다.

“너희 공자는 이러한 내용을 미리 숙지하고 온 것이냐?”

“…….”

윌슨은 잠시 고민했다.

그는 겁쟁이였으나 빈첸에 대한 믿음이 없지는 않았다.

“알았다면 저희한테 언질이라도 주셨을걸요?”

“전혀 몰랐단 말이냐?”

“일단 전 몰랐습니다요.”

바르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세리는 확신했다.

“다만, 그 마물이 나타난 이후로는 모든 것을 아셨을 거예요.”

“모든 것을 알았다?”

“네. 그러니 안심하고 저희를 두고 앞으로 나아가셨을 거예요.”

“어찌 그리 확신하지?”

“공자님은 제 사람을 아끼는 분이니까요. 그런데…….”

세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그 앞길에 방해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요.”

적어도 지금, 자신의 존재가 빈첸에게 방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고려해야 할 변수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니까.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법사님. 저도 강해질 수 있을까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건네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순수한 질문이었다.

* * *

붉은 요새 안에 들어섰다.

아무도 빈첸을 마중 나오지 않았다.

-저자가 바르곤이 맞겠네요.

부책임자인 바르곤이 직접 나섰으니 다른 안내자가 붙을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빈첸은 세리와 윌슨. 그리고 바르곤을 기다렸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붉은 요새의 부책임자, 부요새장 바르곤입니다.”

“총책임자는?”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렇군.”

굳이 율리안이 뒷배경을 얘기해 주지 않아도 빈첸은 총책임자가 왜 자리를 비웠는지 알 수 있었다.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 빈첸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표현이겠지.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숙소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불편하지 않다.”

일행 앞에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가 섰다.

마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하여 붉은 요새에서는 직계와 방계. 그리고 아덴카의 혈육과 아덴카의 혈육이 아닌 자들과의 구분이 의미 없어질 것입니다. 모두가 생도라는 이름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직계의 7공자로서 대우해 주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얘기였다.

“붉은 요새의 모든 생도는 [급]으로 구분될 것이며, 공자님은 내일부터 9급 생도라 불릴 것입니다.”

“급을 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기본적으로 승급시험이 존재하며, 승급시험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업적을 달성하면 승급이 가능하게 됩니다. 1급이 되시면 최종시험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를 통과하면 파성무인의 자격을 획득합니다.”

최종시험을 통과한 생도를 일컬어 ‘파성무인(破城武人)’이라 부른다.

별로 의미 없는 말이어서 흔히 쓰이는 표현은 아니었다.

역사상 모든 아덴카의 직계들은 붉은 요새의 최종시험을 통과하였고, 파성무인이라는 말 대신 그냥 ‘무인’이라 불렸으니까.

“파성무인의 자격을 획득하면 아덴카의 상징인 ‘태양 문양’이 수여되며, 아덴카의 ‘무인’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설명이 끝난 뒤, 마차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바르곤도 아주 친절한 타입은 아니었고 빈첸도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은 아니었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

빈첸이 입을 열었다.

사실 그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정말 이곳에서 천과(天果)를 얻을 수 있나?”

바르곤의 몸이 움찔했다.

천과.

하늘에 열리는 과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영약보다 효과가 뛰어나다 들었다. 죽은 자도 되살린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붉은 요새가 사실은 ‘천과’가 열리는 ‘천과수’를 지키는 요새라는 우스갯소리도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파성무인들 중 아주 극소수가 이곳에서 ‘천과’를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바르곤이 대답했다.

“그것은 스스로 알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천과수는 천과를 얻을 자를 스스로 정한다고 하니까요.”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바르곤도 정말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묻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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