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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25화 (25/184)
  • 환생의 정석 25화

    레일사는 이 기대감이 벅찼다.

    이 아이가 평생 제 구실을 못할까 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칸의 시작을 알린 검을 들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와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기세만 보고 있노라면 어엿한 무인이었다.

    그것이 무척 기뻤다.

    ‘특이한 검로.’

    레일사는 빈첸의 검을 쉽사리 읽어냈다.

    특별한 검로를 만들어, 강력한 절단력을 구사한다.

    그 원리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레일사는 빈첸에게 단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지친 것은 빈첸이었다.

    “헉…… 헉……!”

    제론과 대련할 때와는 달랐다.

    정신력으로도 숨을 참지 못했다.

    반면, 레일사는 옷자락 하나 구겨지지 않았다.

    방금 격한 대련을 치렀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평온함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실망감을 감춘 채 물었다.

    “제게 무엇을 보여주신 겁니까?”

    빈첸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지금의 레일사가 보기에는 그랬다.

    “내가 뭘 했는지, 정말 모르겠어?”

    “모르겠군요.”

    레일사는 목검을 늘어뜨렸다.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인가.’

    괜찮다.

    빈첸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레일사는 기뻤다.

    그러니 너무 극적인 변화는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기대가 적어야, 실망도 적은 법이니까.

    지난 14년간 레일사는 그렇게 실망을 견뎌왔다.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다만, 이 정도의 대련이라면 제론으로도 충분할 것 같군요.”

    “특성.”

    “예?”

    “시종장의 특성이 무엇이지?”

    레일사는 극한의 냉기를 다루며 ‘빙검(氷劍)’의 대가였다.

    얼음속성의 많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제 특성은…….”

    그때, 레일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몸속에 각인되어 있는 특성들이 잠시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그 느낌은 분명 진짜였다.

    “제 특성이 일시적으로 사라졌……군요.”

    정확히 말하면 주변의 마나가 흐트러지면서, 특성발현을 방해했다.

    레일사는 7성의 무인.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거의 안 받았다.

    그런데 만약 7성이 아니라 그 이하 급의 무인이라면?

    ‘더 큰 영향을 받게 되겠지.’

    제일 무서운 건, 자각하는 그 순간까지 7성 무인인 레일사조차 특성발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공자님께서 하신 것입니까?”

    빈첸이 했다면,

    “어떻게 하셨습니까?”

    빈첸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7급 무인 레일사에게도 이 방법이 통했다.

    “시종장은 나의 검로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능검격.

    본래의 빈첸의 몸으로는 한 번이 한계였다.

    ‘강화된 신체’를 획득하고 나서는 두어 번으로 늘었다.

    “나는 그 검로로 시종장을 베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레일사에게서는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틈을 아예 만들어낼 수 없으면 ‘이능검격’도 펼칠 수 없다.

    오늘의 빈첸은 레일사를 꺾기 위하여 지도대련을 부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주변은 가능하더군.”

    레일사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나의 흐름이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공간’을 잘라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 힘이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공간을 잘라내기는 했으나 그 공간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주변 마나가 흔들렸고.

    레일사는 7성급 무인답게 쉽게 원리를 이해했다.

    ‘공간을 베어 마나 흐름을 뒤틀고, 그를 통하여 특성발현을 방해했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내 검은 이능을 벤다.”

    마법이든 특성이든.

    ‘특별한 힘’을 베어내는 힘을 가졌다.

    “이 힘이 7성의 무인을 상대할 때에도 통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위력을 조절하실 수 있게 된 거군요.”

    레일사의 눈으로 본 ‘이능검격’은 반쪽짜리 검술이었다.

    이적을 일으키는 힘인 것은 맞으나, 그 위력을 조절하지 못했었다.

    “검 덕분에.”

    용골을 머금은 홍련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시대는 참으로 편리해진 시대였다.

    홍련은 ‘이능검격’의 힘을 일부 머금기도 했고, 필요한 경우에는 머금었던 힘을 다시 풀어주기도 했다.

    사실 율리안도 적잖이 놀랐다.

    -이게 이렇게 될 줄이야.

    가호와 특성을 마나석에 저장했다가 적재적소에 꺼내 사용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상식이었다.

    그러나 빈첸이 가진 이 ‘이능검격’의 힘도 같은 방식으로 이용하게 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기야 특성도 이능의 영역이니까 원리는 같네요.

    필요한 만큼의 이적만 꺼내 쓰다 보니 효율이 무척 좋아졌다.

    약한 수준의 이능검격을 여러 번 나눠서 쓸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곧 체력적인 부담을 훨씬 덜어주었다.

    한 번에 100㎏를 들 수 없다면, 10㎏씩 10번 나눠서 들면 된다.

    “기연을 얻으셨군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기연이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는 것이겠지.”

    “…….”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강화된 신체’ 특성을 획득했어. 특성을 획득하니까 오히려 가호가 생성되더군.”

    본래는 가호를 타고나는 게 먼저다.

    가호를 자극하여 특성을 발현시킨다.

    그런데 빈첸은 반대였다.

    특성을 만드니 가호가 만들어졌다.

    “그럼 공자님께서 얻게 된 가호는…….”

    “맞아. 소인왕(小人王). 레반의 가호야.”

    “공자님께는 가호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그게 핵심이지.”

    빈첸이 홍련을 들어 올렸다.

    홍련의 검신에 소인왕의 가호가 새겨져 있었다.

    빈첸의 눈에는 보였지만, 레일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는 보여.”

    땅에 문양을 그렸다.

    작은 원 하나.

    큰 원 두 개를 바탕으로 하여 무수히 많은 고리들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율리안의 말에 의하면 20퍼센트 정도 완성된 가호라고 했다.

    “가호가 검에 각인되었어.”

    빈첸이 레일사를 바라보았다.

    오늘 얻게 된 것이 컸다.

    “7성의 무인조차도 나의 가호를 읽어낼 수 없다는 점과, 내 비밀을 알게 된 7성의 무인이 나의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는 점이 가장 큰 수확이겠네.”

    한참 후,

    레일사가 입을 열었다.

    “왜 저를 그렇게까지 믿으시는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용골에 대한 비밀을 지켜주었다는 것.

    용골을 한센에게 내주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싫지 않군요.”

    레일사는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멀어졌다.

    * * *

    레일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빈첸의 말을 곱씹었다.

    -7성의 무인조차 나의 가호를 읽어낼 수 없다는 점과, 그 7성의 무인이 나의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는 점이 가장 큰 수확이겠네.

    한참 동안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가주.’

    오늘 일은 가주에게도 비밀로 하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저는 그분의 종입니다.’

    빈첸의 어머니.

    사르비나를 따르는 사람이었다.

    사르비나가 사랑했던 사람이 칸이기에, 그래서 칸을 섬기고 있다.

    그리고 빈첸은 사르비나의 아들이었고.

    ‘그러니 저는 빈첸 공자를 위한 선택을 하겠습니다.’

    빈첸이 가진 능력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될 능력이었다.

    검에 가호를 입혀 저장할 수 있다니.

    심지어 그것이 다른 무인에게 읽히지 않는다니.

    잘만 활용한다면 빈첸에게 커다란 무기가 되어줄 것이었다.

    하루 뒤.

    레일사는 빈첸을 찾아 한 가지 조언을 건넸다.

    “공자님의 검로는 기이한 권능을 품고 있습니다.”

    이능검격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그것이 무척 위험한 검이라는 것도.

    “너무 함부로 다루면 검은 물론이거니와 공자님의 몸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말했잖아. 내게 벌어진 기연은 우연이 아니라고.”

    우연들을 엮어 필연으로 만들었다.

    사실 이 문제는, 율리안이 지적해 주었던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찾아냈다.

    “다행히 가호의 일부가 검에 저장되어 나와 연결되어 있어. 다시 말해 홍련에도 [강화된 신체] 특성이 이식되었다는 뜻이야.”

    레일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저런 게 가능하려면 검과의 교감능력이 뛰어나야 할 텐데.

    몸과 검이 하나 되는 신검합일의 경지에 들어서야 가능하다.

    그게 레일사의 상식이었다.

    “덕분에 홍련은 굉장히 단단해졌고.”

    게다가 이 검은 40년 전에 만들어진 검이었다.

    율리안은 이렇게 표현했다.

    -게다가 40년 전에 제작된 검이잖아요? 당시의 검은 좀 무식하게 단단한 재료를 때려 넣은 경향이 있어요. 덕분에 그런 무시무시한 힘을 머금고도 안 깨지는 거죠.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합쳐져서 지금의 홍련과 빈첸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우연이 아닌 것들을 만들어가려 해.”

    여태까지의 모든 과정들이 단순한 우연은 결코 아니었다.

    ‘누군가’의 안배가 분명 작용했다.

    그러나 시종장 레일사의 존재는 ‘누군가’가 안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배와는 상관없이, 빈첸은 시종장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내게 특성을 가르쳐줘.”

    “……제 특성을 말입니까?”

    “그래, 네 초기 특성. 기왕이면 보법과 관련한 것이면 좋겠어.”

    율리안은 혀를 내둘렀다.

    -무인한테 특성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걸 대놓고 알려 달라니.

    레반이야 기적석까지 소모하며 팔을 회복시켜주었으니 그렇다 쳐도, 레일사가 왜 그런 무리수를 둔단 말인가.

    심지어 레일사는 아주 전투계열 상급 신이라 알려진 야니에스.

    ‘은하수의 유랑자’라 불리는 신의 가호를 지닌 무인이었다.

    -그런 요구가 먹힐 리가…….

    “붉은 요새에 입성하기 전까지, 매일 오전 5시에 뵙겠습니다.”

    -있죠. 그럼요. 있고 말고요.

    ……있었다.

    율리안은 이제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 * *

    레일사가 마나의 흐름을 잡아주자마자 빈첸은 신세계를 보았다.

    ‘마나의 길이 또렷하게 보인다.’

    레일사의 냉기(冷氣)가 마력회로 일부를 차갑게 만들었다.

    그것은 명확하게 길을 보여주었다.

    수만 갈래로 나뉜 마력회로에 정확한 표식을 남겨준 것 같았다.

    레반이 알려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빈첸은 별다른 말없이 곧바로 명상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일사는 레반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곧바로 명상식이라니.’

    레일사는 저도 모르게 가볍게 웃고 말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 믿음에 부응해 주는 것이겠지.’

    그런데 레일사는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빈첸이 특성을 각인시키는 데 불과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일사가 처음 발현시켰던 특성은 ‘설인 걸음’이라는 특성이었다.

    눈 위를 걸어도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움직임을 도와주는 특성.

    “정말로…… 획득하셨군요.”

    또다시 하루가 흐르자, 홍련의 검신에 새로운 가호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은하수의 유랑자’는 ‘소인왕’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상급신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현재 새겨진 가호는 그저 구름 모양의 단순한 문양이었다.

    레일사는 홍련을 만져보았다.

    홍련은 더 이상의 가호와 특성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였다.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나도 그렇게 느껴.”

    홍련은 현재 빈첸과 상당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공자님이 더욱 강해진다면…….”

    “나도 더 많은 가호와 특성을 획득할 수 있겠지.”

    레일사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하나를 물었다.

    “즐거우십니까?”

    “즐거워.”

    레일사의 눈으로 본 빈첸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강해진다는 것.

    그것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했다.

    레일사가 모셨던, 빈첸의 어머니와 똑같았다.

    ‘그분의 아들이 틀림없군요.’

    그날 밤.

    레일사는 달을 올려다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14년 동안 포기하지 않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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