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24화
빈첸은 제대로 된 검식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외팔이 데이븐에게는 검식이 있었다.
현존하는 최강의 검술이라 알려진 사미온 검식.
사미온의 검술은 공방일체의 검술로 유명하며, 특히 초반 검식은 방어에 치중한 검식이 주를 이루었다.
사미온 검식 제1장.
유검제강(柔劍制剛).
유검제강의 뜻을 떠올렸다.
‘부드러운 검이 강한 것을 이긴다.’
영혼에 각인되어 있으나,
이 몸으로는 처음 구현한다.
다시 한번, 그 원리를 생각해 내었다.
‘부드러운 검이 강한 것을 이긴다.’
이것이 기본이었다.
레일사처럼 ‘구결’을 직접 읊을 필요는 없으나, 구결은 곧 검식의 원리다.
의지를 일으켜 심장에 잠든 마나를 깨웠다.
사미온 검식을 처음 익혔을 그때처럼.
기본으로 되돌아가 원리를 상기했다.
‘마나의 성질은 의지에 달린 것이니.’
유검제강은 부드러운 검이다.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움직인다.
그러니 마력회로를 흐르는 마력도 유순해야 한다.
‘나의 검은 한없이 고요하다.’
빈첸의 검이 부드러이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미온의 길을 따라 마나를 움직였다.
사미온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복기하며 마력회로에 의지를 담았다.
‘마나를 일으켜 검에 담으니. 나의 검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
율리안은 하마터면 ‘맙소사’라고 외칠 뻔했다.
빈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 사미온 검식이잖아!’
단순 이론으로도 접하기 어려운 사미온의 검식이 빈첸의 손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뜨거운 불길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빈첸의 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강대한 흡인력을 가진 무엇인가가 불길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이런 걸 진짜 할 수 있다고?’
심상을 맺지 않은 무인이, 심상으로 환산하면 이제 겨우 2성에 진입한 무인이 정말로 이걸 해내고 있었다.
‘불이 모여들고 있어.’
강대한 불의 흐름이 모여들었다.
빈첸의 검을 중심으로 불의 길이 생성되었고, 상대적으로 다른 곳의 화마가 약해졌다.
그리고 빈첸의 유검제강은 이 뜨거운 불길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의 검신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진짜로…….’
진짜로 이 불길을 막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율리안은 빈첸에게서 단단한 확신을 느꼈다.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
이것은 이깟 불보다 더욱 지고한 무언가를 극복한 자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확신이었다.
그것은 율리안에게도 거대한 약속이 되어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빈첸은 그 약속을 성취했다.
“헉…… 헉……!”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고,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빈첸이 들고 있던 검도 녹아 쇳물이 되었다.
툭!
하고 홍련이 땅에 떨어졌다.
아직 연기는 자욱했지만 불은 멎었다.
-진짜 해냈네요.
율리안이 떨떠름한 듯 말했고 이내, 한센이 점차 눈을 떴다.
그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째서…….”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한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겠지.’
그는 들었다.
사미온의 검명을.
‘헛것을 들은 모양이다.’
* * *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빈첸이었다.
“검명을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래.”
“검명이 어땠습니까?”
“네 검명은…….”
한센은 아덴카와 오래 함께해 온 명인이었다.
아덴카의 숙적은 곧 한센의 숙적이었다.
따라서 사미온은 한센에게 있어서도 넘어서야 할 대상이었다.
그는 야장의 눈과 귀로 사미온의 검을 담아왔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마나를 담은 검이 내지르는 특유의 소리.
“사미온의 소리와 비슷했다.”
그는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역시 그럴 리 없겠지.”
“제 검에서 사미온의 소리가 났군요.”
명장의 귀로 들어도 똑같은 소리가 났다면, 빈첸 자신이 제대로 된 검식을 구사했다는 뜻이 된다.
꽤 흡족했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
빈첸은 조심스레 한센을 부축해서 벽에 등을 기대게 만들어 주었다.
다행히 생명에 큰 지장은 없는 듯했다.
“얼른 회복하셔서 힐트(검 손잡이)에 이름을 새겨 주셔야 할 겁니다.”
한센을 앉힌 후, 빈첸은 반대편으로 걸어가 홍련을 집어 들었다.
“훌륭한 검이군요.”
“적당히 힘 좀 썼다.”
적당히 힘을 쓴 게 아니라 사실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빈첸이 말을 이었다.
“영감님 정도의 야장이 불에 잡아먹히는 건 영 이상하네요. 일평생 불을 다뤄온 난쟁이족인데.”
붉은 악귀 토벌부터 시작하여 용골을 얻게 된 과정.
한센이 홍련에 용골을 이식하다 불에 잡아먹힐 뻔한 상황.
그리고 사미온의 검식을 익힌 자가 한센을 구하게 된 상황까지.
모두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겠지.”
“예. 좀 더 정진하셔야겠네요.”
빈첸이 피식 웃었다.
빈첸은 이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슬란. 뭘 숨긴 거냐?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려 한 것이냐?’
빈첸이 물었다.
“아참, 백룡이 멸종된 게 언제라고 했었죠?”
“500년 전. 그건 왜 묻는 거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필이면 그것도 500년 전이었다.
빈첸이 홍련을 쥐고 검신을 바라보았다.
붉은 검신이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500년 전에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어.’
율리안은 한참 생각하다가 그 나름대로 분석을 내놓았다.
-이건 어쩌면, 예행연습이 아닐까요?
‘예행연습?’
-물어보세요, 새 검은 언제 만들어줄 거냐고?
‘방금 이토록 좋은 검을 얻었는데 무슨 염치로?’
-제발요. 부탁 할게요 형님.
빈첸이 물었다.
“새 검은 언제 만들어주실 겁니까?”
물으면서도 못내 찝찝했으나 한센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빈첸에게 새로운 검을 만들어줄 작정을 하고 있었다.
홍련은 빈첸의 시작을 알리는 검.
그리고 후에 만들 검은 자신의 마지막을 알리는 검이 될 터였다.
-사실 백룡의 뼈를 다루어 검을 만드는 작업이 연습 없이 완벽하게 될 수는 없잖아요. 아무리 한센 영감님이라도요.
한 덩이는 홍련을 제련하는 데 사용했다.
또 다른 한 덩이는 아직 레일사에게 남아 있었다.
-제가 아는 레일사 시종장이라면, 그 용골을 공자님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 틀림없어요. 용골을 두 번 사용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설계된 것이었다면, 이번 홍련은 예행연습이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왜? 홍련이 마음에 안 드냐?”
“아닙니다. 무척 마음에 듭니다.”
그럼 왜 벌써 새로운 검 타령이야?
한센은 그렇게 투덜거린 뒤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만들어주긴 할 건데…… 재료가 부족하구나.”
“용골 말입니까?”
“용골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영감님이라면 용골을 또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공고를 내보세요. 저를 위한 걸작을 만들 것이고 용골을 수소문하고 있다는 공고요.”
“농담하지 마라.”
“농담 아닙니다.”
“그래서 퍽이나 구해지겠다.”
이번에는 한센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그따위 방법으로 용골을 구할 수 있다면 이미 백 번은 넘게 구했을 것이다.”
* * *
하루 뒤.
아덴카의 시종장 레일사가 한센을 찾아왔다.
“오랜만이군, 레일사.”
“오랜만입니다.”
“여긴 어쩐 일이지?”
“당신께서 찾는 것이 있다 하여 가져왔습니다.”
“내가 찾는 것?”
빈첸의 말대로 공고를 하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잊은 상태였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공고였으니까.
“용골을 찾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
한센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거짓공고였습니까?”
“……얼마에 팔 거지?”
용골을 가져온 것이 신기하기는 했으나 이것을 구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용골은 그 가치를 산정하기 어려운 보물이었으니까.
“값은 이미 지불되었습니다.”
“……뭐? 누가?”
“빈첸 공자님께서 지불하셨습니다.”
“장난치지 마라.”
거짓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빈첸에게는 이 정도 크기의 용골을 구할 수 있는 재력이 없다.
“14년 전. 값은 이미 지불되었습니다.”
“…….”
14년 전.
‘사르비나’로부터 빈첸이 태어났다.
많이 못나기는 했었으나 빈첸은 분명 ‘사르비나’의 아이였고, 레일사는 빈첸을 안아 들고서 경탄의 눈물을 흘렸었다.
14년 전의 빈첸은 레일사 품에서 힘껏 울었었다.
그 아이가 변했고, 누구보다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좋은 검을 부탁합니다.”
레일사는 용골을 내려놓고 아덴카로 돌아왔다.
레일사는 붉은 악귀를 토벌했던 날의 빈첸을 떠올리며 걸었다.
어느덧, 그녀는 빈첸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왜…… 이곳으로 왔는가.’
윌슨은 우연히 레일사를 발견했다.
“시, 시종장님?”
그 목소리가 무척 커서 빈첸의 방문 안까지 들렸다.
“안에 알릴까요?”
그때, 방문이 열렸다.
빈첸이었다.
“안 그래도 시종장을 만나고 싶었다.”
“저를 말입니까?”
“그래.”
“어째서입니까?”
레일사는 빈첸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그분’과 많이 닮았다고.
“시종장의 도움이 필요해.”
“저는 시중을 드는 사람일 뿐입니다. 제가 무엇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한센 영감님의 공방을 갔다 왔다지.”
“……그렇습니다.”
“시종장의 선택이니 나는 미안함을 갖지 않을 거야.”
고마움을 갖되, 미안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미안해하는 것은 시종장의 선택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확실해진 것은 시종장이 아버지의 사람이라는 것과.”
“…….”
“나의 도움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용골까지도 선뜻 내어준 사람이다.
도움을 청하면 도와줄 것이다.
“저는 시중을 드는 자이니, 적법한 명령이라면 받들 것입니다.”
빈첸이 홍련을 꺼내 들었다.
용골을 머금은 홍련.
타인 앞에서는 처음 꺼내는 것이었다.
레일사는 본능적으로 홍련에 커다란 변화가 있음을 직감했다.
“홍련에 변화가 느껴지겠지?”
“느껴집니다. 좋은 검을 얻으셨군요.”
“이 검을 받아줄 사람이 필요해.”
“평소 제론과 대련을 치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론에게는 내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어.”
“…….”
“내게는 내 검을 온전히 받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레일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빈첸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제론이 감당해 주지 못할 정도의 성취를 지닌 건 아니었다.
“제론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렇지만 시종장이 받아주면 좋겠군.”
“…….”
레일사는 잠시 침묵한 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이 상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레일사와 함께 대련장으로 이동했다.
빈첸의 명령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대련장에는 레일사와 빈첸.
둘뿐이었다.
“분명 이유가 있겠지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레일사가 목검을 들었다.
빈첸을 상대하는 데에 이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레일사는 홍련을 든 빈첸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보여주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