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22화
세리는 새벽부터 일어나 프렌치 토스트와 따뜻한 코코아를 준비해놓았다.
세리는 은근슬쩍 한센의 편을 들어주었다.
“공자님. 아저씨가 변덕이 심하고 억지를 많이 부리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 좋은 분인 것 같더군.”
세리와 같은 눈을 한 사람이었다.
세리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이기도 했고.
‘너무나 새로운 세계구나.’
빈첸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계.
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꽤 좋아 보였다.
빈첸은 기분 좋게 일어나 대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제론이 먼저 와 있었다.
“제론 경?”
“세리! 좋은 아침.”
“순찰 도실 시간 아닌가요?”
“새벽으로 순번 바꿨어. 지금은 비번이다.”
“늦잠쟁이 제론 경이요?”
“이상하니?”
“네, 엄청요.”
“왜?”
“제론 경은 게으름뱅이잖아요.”
세리는 제론과 상당히 친했지만 평가 자체는 꽤 박했다.
“하하하, 나답지 않긴 하지? 공자님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지 기대돼서 잠을 잘 수가 없더라고.”
실제로 제론은 지금 굉장히 설렜다.
오늘은 빈첸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한센 영감은 왜 빈첸 공자님의 검술을 따로 보자고 하는 건지.’
얼마 후, 한센이 도착했다.
오른쪽 눈에는 노란색 렌즈가 들어간 편안경(렌즈가 한 개인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이것 역시 마도문명의 산물로서 상대의 마나 흐름을 시각적으로 읽어내는 마도공학기계였다.
공방마다 편안경에 축적된 데이터가 다른데, 한센 공방의 편안경에는 비교적 많고 정확한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었다.
빈첸은 허수아비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왼팔로 검을 쓰는 거냐?”
“예.”
“신기한 놈일세.”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능검격.
호흡.
점.
선.
타이밍.
모든 것을 고려하여 새로운 검로를 만들고, 검은 선을 만들어내 베어내는 검술.
“다섯 번째 호흡입니다.”
숨을 들이마셨다.
희미한 선이 보였다.
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진한 선이 보였다.
다섯 번의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벤다.’
스승 네디아의 것이었으나 영웅왕 카진의 것으로 둔갑된 이능검격이 펼쳐졌다.
대악마 데이븐의 사검(死劍)과 닮았으나 사검을 제압되었다 기록된 검술.
사악-
허수아비를 베었다.
허수아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제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깔끔하게 베어내서 미동조차 없는 거야.’
저런 것들이 가능하기는 하다.
신속절단(神速絶斷)과 같은 특성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빈첸에게 그러한 것은 없었다.
특성 없이 특성의 효과를 내었다.
빈첸과 대련하면서 계속해서 느꼈던 것이지만, 빈첸의 검로는 확실히 특별했다.
한센이 말했다.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느냐?”
“…….”
율리안이 경고했다.
-형님, 아직 몸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건 알죠?
그렇지만 난쟁이족은 변덕이 심하다.
빈첸은 오늘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강화된 신체.
그 특성이 빈첸의 몸을 보호했다.
“이번에는 세 번째 호흡입니다.”
아까와는 달랐다.
똑같은 검술인데, 검로는 달랐고, 결과는 같았다.
빈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 번 더 보여주면 좋겠는데.”
세리가 버럭 소리 질렀다.
“아저씨!”
세리는 율리안만큼이나 빈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센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아이고, 귀 떨어지겠다 요 녀석아.”
“두 번이나 했잖아요. 저는 무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아요.”
“뭘 말이냐?”
“빈첸 공자님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요. 아저씨 눈엔 그게 안 보이나 보지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한센에게 있어서 세리는 딸이나 마찬가지였고, 아버지는 딸을 이기지 못했다.
“알았다, 알았어. 그놈의 도끼눈은. 눈 그렇게 뜨지 말라니까?”
“아저씨가 그렇게 만들잖아요.”
“하지 마라. 알았다. 잘못했다.”
빈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저 광경이 낯설고 신기했다.
저 변덕쟁이 난쟁이가 세리에게 쩔쩔매는 것도 한심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보이는구나.’
빈첸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꿨던 세계가 이곳에 있었다.
빈첸이 중재했다.
“근시일 내로 대장간을 찾아뵙고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
“세리와 함께 가겠습니다.”
그 말에 한센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러도록 해라.”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아니라니까?”
그사이.
‘마도 편안경’이 분석을 끝냈다.
분석 결과를 살펴본 한센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이게 뭐냐?’
사실 아까 눈으로 봤을 때도 이미 놀란 상태였다.
단순히 허수아비를 벤 것이 아니라, 허수아비의 ‘존재’를 베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빈첸의 검은 확실히 특별하고 이상했다.
그런데 분석 결과가 더 이상했다.
‘마도 편안경’에는 착용자에게만 보이는 마도문명의 글자가 보였다.
[분석불가.]
검술의 특성, 연원, 특징 등을 한 번에 잡아내는 현시대의 문명은 빈첸의 검술을 거의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작은 단서가 분석 편안경에 잡혔다.
[유사검술 발견.]
[유사검술 : 이능검격]
이능검격.
역사에 기록된, 영웅왕 카진의 검술이었다.
* * *
‘영웅왕 카진의 검술과 유사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 이능검격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대악마 데이븐을 베어낸 영웅왕의 검술 아니던가.
기록에만 존재하는 검술.
실제로 익힌 자는 영웅왕이 유일했다던 그 검술과 비슷한 검술이 펼쳐졌다.
‘우연이겠지.’
전설처럼 전해지는 그 검술이 빈첸에게 전수되었을 리는 없다.
이건 우연의 일치이리라.
‘마도 편안경’은 어디까지나 정보에 의거하여 확률적인 분석을 내놓는 것이니까.
‘아무튼 신기한 놈이야.’
칸의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눈으로 겪었을 때의 그 기분.
“제론. 빈첸이 이 검으로 너와 대련한 것이냐?”
“예.”
“너는 아무것도 못 느꼈고?”
“[절단]류의 특성을 익히신 것 같은 느낌을 받기는 했습니다.”
“그러냐?”
한센은 더욱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제론은 그래도 제법 괜찮은 무인인데.’
저 정도 무인은 빈첸의 검술을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빈첸이 지나치게 뛰어나서?
그건 아니었다.
현대 무인의 기감에는 잡히지 않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요상한 기분이었다.
‘특성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왜냐하면 빈첸은 심상을 맺을 수 없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심상이 없고, 가호가 없는데, 어떻게 특성이 있단 말인가.
‘[마도 편안경]으로는 아무것도 안 잡힌다만.’
그렇지만 분명 특성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철인’ 등, 신체를 강화하는 등의 특성이 말이다.
제론의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았으나 한센의 눈에는 보였다.
‘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점점 더 흥미로웠다.
‘제론을 다룰 때의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어쩌면,
저 나이대의 칸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이것은 오랜 세월 야장으로 갈고 닦아온 그만의 ‘육감’이었다.
‘간만에…… 검을 만들어주고 싶은 아이가 생겼군.’
나의 검을 통해, 세상을 호령할 검술이 펼쳐지는 상상.
젊은 시절에는 수없이 했던 상상이었다.
강렬한 열망의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네게 검을 만들어주고 싶구나.”
“감사한 제안이군요.”
한센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감사하다? 야장들의 배신자가 검을 주고 싶다는데? 내게 검을 받으면, 너는 평생 다른 명인들의 검을 손에 쥐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책임지셔야지요.”
빈첸에게서는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냐?”
한센은 조금 실망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다?
이건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리라.
야장들의 배신자 한센은 이러한 거절에 익숙했다.
너도 결국 똑같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을 무렵, 빈첸이 말을 이었다.
“제가 한센의 이름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춘 무인이 되었을 때. 그때 검을 주세요.”
“…….”
“아직 제가 당신의 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명검 제작은 오래 걸린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헹! 그때 내가 살아 있을 줄 누가 알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빈첸이 말했다.
“그때가 오면, 힐트에 당신의 이름을 양각으로 새겨 주십시오.”
한센의 몸이 움찔 떨렸다.
워낙 거대한 근육 덩어리여서 굉장히 티가 많이 났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
“무인이 야장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존경표식이지 않습니까?”
500년 전에는 그랬다.
무인들은 자신이 존경하는 야장을 위하여 야장의 이름을 양각으로 새겼다.
당시에는 제법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랬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조금 변질되었다.
여전히 근본적인 의미는 같았으나, 지금 시대에 이르러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병장기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머저리로 인식되어도 괜찮다는 뜻이냐?”
요즘은 그러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양각으로 이름을 새겨 넣는 양식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입니다.”
야장들이 만들어내는 병장기 역시 무학의 일종이다.
좋은 병장기를 손에 넣는 것 역시도 무인의 능력이었다.
“됐다, 네 마음만 받으마.”
한센이 킥킥대고 웃었다.
요 맹랑한 꼬맹이의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저는 진심입니다.”
그쯤 되니 율리안이 말렸다.
-병장기에 형님 실력이 묻혀요. 명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애송이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그게 틀린 것이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세상이 그렇다니까요?
‘틀린 것이 두려워 굴복한다면,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지?’
율리안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아.
율리안은 빈첸과 정신적으로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고 빈첸의 마음을 읽어냈다.
빈첸의 생각은 확고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율리안이 말을 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되게 별로인 거 알죠?
분명히 별로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이 시대를 살아온 율리안은 옛사람 빈첸을 보며 조금 색다른 기분을 느꼈다.
‘왜 멋있고 난리람.’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빈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양각으로 당신의 이름을 새겨 주십시오. 반드시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무인이 되겠습니다.”
한센은 빈첸의 진심을 느꼈다.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게 되었을 때, 당신의 검을 찾겠습니다.”
명검을 얻기 위한 사탕발림이나 아부 따위가 아니었다.
‘이놈은, 진짜배기다.’
60년간 사람을 상대해 왔다.
수많은 무인을 만났고, 그 과정에서 진상도 많이 만났다.
그는 스스로의 안목을 믿었다.
이토록 단단한 눈빛을 가진 소년은 별로 보지 못했었다.
‘정말로 몇 년 후에는, 일을 치를지도 모르겠어.’
이 소년을 위해 마지막 작품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쉬운 게 하나 있다.”
“무엇입니까?”
“내가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검이 하나 있는데.”
만들 수만 있다면 최고의 걸작이 될 것이라 자부했다.
“아주 특별한 재료가 하나 필요한데, 요즘은 통 구할 수가 없어서.”
“그것이 무엇입니까?”
“됐다. 네게 불가능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들어는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빈첸의 눈에 지극히 무인스러운 욕심이 가득 찬 것이 느껴졌다.
한센은 푸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게 있다. 용골(龍骨). 그중에서도 백룡의 뼈가 필요한데, 백룡은 이미 500년 전에 멸종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