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21화
빈첸이 어깨를 으쓱하고서 검집을 주워 올려 다시 건네주었다.
“좋은 검을 얻은 것을 축하한다.”
그 말에 제론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방금 빈첸의 행동.
이것은 곧 용서를 뜻하기도 했다.
검을 받아 든 제론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14살의 빈첸에게는 품격이 있었다.
‘나는 누구를 마주하고 있는가.’
자신의 모습이 그와 너무나 대비되어 느껴졌다.
부끄러워 그 검을 받아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받아. 그래야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을 테니.”
“감사합니다.”
“오늘의 부끄러움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자님.”
그 모습을 보며 한센은 호오-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소문으로 알고 있던 빈첸과는 사뭇 다른 모습과 태도였다.
이런 빈첸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혼을 내는 방식이 상당히 품위가 있구만? 으하핫! 이거, 내가 소문으로 들어온 빈첸이 아닌데.”
한센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사이, 율리안이 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한센. 명검 ‘백익’의 제작자이며 아버지의 오랜 친구라고 해요. 뭐, 명검 제작을 포기한 이후로 아버지와의 교류도 끊어졌지만요. 아무튼 명인의 정신을 버렸다고 알려진 야장이에요. 야장계에서는 거의 퇴출되다시피 했어요.
‘어째서?’
-질이 썩 괜찮은 다량의 검을 공산품처럼 찍어냈기 때문이죠.
그 말은 곧 많은 무인들에게 골고루 질 좋은 병장기가 지급될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 한센이라는 뜻이었다.
‘훌륭한 분이시구나.’
빈첸은 한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덴카의 칠공자 빈첸 아덴카입니다.”
“아주 못난이 겁쟁이라더니. 그건 전부 헛소문이었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장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장이 아니라 변신인 것 같은데?”
“칭찬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율리안으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형님 성격에, 저 영감님한테도 예의 없다고 면박 줄 줄 알았더니?
자정에 가까운 시각.
미리 언질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와 홍련을 내놓으라 하였다.
제론의 잘못은 분명히 언급했고 제론으로부터 사과도 받아냈다.
한센은 빈첸이 자신에게도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그건 한센 역시도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나한테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고.”
한센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화를 내지 않는 거냐?”
“그건…….”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당신께서 명예로운 야장공이기를 포기하신, 누구보다 명예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뭐?”
한센이 어이없다는 듯 웃고서 말했다.
“비겁한 배신자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야장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빈첸은 담담한 눈으로 한센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센을 힐난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신기한 놈일세.”
“본인의 명예를 버리신 대가로 수많은 무인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또한 그들을 살렸을 것입니다.”
무인들에게 질 좋은 병장기는 또 다른 생명이다.
야장으로서의 명예를 버린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무인들에게 생명을 선물해 준 사람이니 예의는 이쪽에서 차리는 게 맞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 같은 야장이 계셨더라면, 훌륭한 무인이 많이 배출되었을 텐데요.”
아쉽게도 500년 전에는 이런 야장이 없었다.
당시의 마나는 지금보다 정제되지 않은 마나였고, 마나를 잘못 다루면 검이 깨졌다.
본인의 검에 찔려 죽거나 큰 부상을 입는 무인들도 부지기수였다.
“어린놈이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온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러고서 한센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기분이 영 요상하네.’
이내 투박하게 말했다.
“어차피 나도 돈 벌기 위해 하는 거니 너무 띄워줄 필요 없다.”
“그랬다면 명검을 제작하셨겠지요.”
무려 아덴카의 가주 칸이 사용하는 명검 ‘백익’.
그 백익을 만들어낸 야장이 새로이 제작한 검이라면 그 값어치를 감히 산정할 수 없을 정도다.
“백익 같은 검을 구하기 위해 천만금을 바칠 부자들은 널리고 널렸다고 생각합니다.”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얘기가 많이 다르다.
실력이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공산품을 찍어내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센처럼 최상위급 실력을 가진 극소수의 야장들에게는, 명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좋았다.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쥘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한센은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나 참.’
한센은 괜스레 뭉클해졌다.
그의 스승이 가르쳐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한센. 나의 가치를 진실로 알아주는 무인 한 명만 있으면 성공한 대장장이라 할 수 있느니라.
젊은 날에는 그 ‘한 사람’이 칸이었다.
황혼 무렵에 또 한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쯤 해라. 난 이제 퇴물이라서 명검을 못 만들 뿐이다.”
반쯤 투덜거린 한센이 화제를 돌렸다.
“네 나이가 몇이라고?”
“열넷입니다.”
“너를 보면 과거의 누군가가 떠오르는구나.”
이 아이의 눈빛을 보니 과거의 칸이 떠올랐다.
그때의 칸은 야장의 가치를 알아보았었다.
지금의 빈첸도 그러했다.
“감사합니다.”
“누굴 떠올렸을 줄 알고?”
“좋은 뜻이겠죠 뭐.”
“헹!”
“거 보십시오. 아니란 말씀은 안 하시네요.”
한센은 어이없다는 듯 빈첸을 바라보았다.
빈첸에게는 열네 살 어린애답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한센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됐고. 홍련을 줘봐라.”
“여기 있습니다.”
빈첸은 홍련을 넘겨주었다.
한센은 홍련을 받아 든 뒤, 홍련을 빈첸에게 겨누었다.
“무인이 검을 이렇게 쉽게 내주어서야 쓰나?”
그랬더니 빈첸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무인의 검은 상대를 가립니다.”
무인의 검은 적으로부터 나와 내 소중한 것들을 지킨다.
무인의 검은 악의를 가진 모든 것들을 베어낸다.
무인의 검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자를 존중한다.
“그 상대가 명예로운 야장공이기에 넘긴 것입니다.”
“…….”
한센은 다시 한번 흥, 하고 코웃음 쳤다.
“말을 잘하는구나.”
어이가 없는 건 율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말 잘 못하는 타입 아니었어요? 한평생 무예만 익혀서 다른 건 모른다면서요? 혀에 기름 발랐는데?
‘이건 달변의 영역이 아니잖냐?’
-그게 달변이 아니면 뭐예요? 봐요, 지금, 저 영감님 엄청 감동했잖아요.
이건 달변의 영역이 아니라 진심의 영역이었다.
평소 생각하고 몸으로 체득한 것이니 깊은 생각이나 뛰어난 화술이 필요 없었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지.’
-진짜 통해버리니 할 말이 없네, 쩝.
한센은 검을 거두고서 홍련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세월의 흔적은 묻어 있으나, 격렬한 검투의 흔적은 없다.’
그가 물었다.
“최근 제론과 대련을 많이 했다지?”
“예.”
“이걸로 붉은 악귀도 토벌했고?”
“그랬습니다.”
검과 검이 부딪치면 검에도 상처가 생긴다.
야장들은 이를 일컬어 검의 ‘검상’이라 부른다.
‘홍련에 검상이 전혀 없어.’
붉은 악귀야 영체니 그렇다 치더라도, 제론의 검은 영검이 아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분명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제론의 검은 수명을 다할 만큼 큰 상처를 입었다.
그렇다면 홍련에도 큰 검상이 존재해야 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있는 거니까.
“도무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그렇다면 결국 스스로 부딪쳐봐야 알 것 같았다.
“네 검술을 좀 보여줄 수 있나?”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은 좀 곤란한데.’
현재 빈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하루에 안정적으로 이능검격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단 두 번.
이미 체력을 모두 소모한 상태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은 기회다.’
이 역시 육감의 영역이었다.
빈첸은 오늘의 만남이 커다란 ‘기연’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세리였다.
세리는 빈첸의 잠자리를 살피고 따뜻한 정수를 가져다 놓으려 하던 찰나, 우연히 빈첸과 한센의 대화를 엿들었다.
“들어와.”
세리는 문을 열고 들어와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한센 쪽을 바라보았다.
“한센 아. 저. 씨.”
늘 상냥한 세리였지만 오늘은 목소리가 조금 달랐다.
한센의 몸이 움찔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자정에 아덴카의 직계는 거리낌 없이 찾아왔으면서, 묘하게 세리의 눈치는 살폈다.
-아참! 그러고 보니, 몰락한 히슬리가에서 세리를 직접 데려온 사람이 한센이라고 했어요. 아덴카에 세리를 소개해 준 사람도 저 아저씨고요. 세리가 아주 어렸을 때에는 한센 아저씨가 키웠다고 했어요.
둘은 반쯤 부녀관계에 가깝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꼬장꼬장해 보이던 한센의 눈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서렸다.
빈첸은 저 희미한 미소를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세리도 빈첸 자신을 향해 저런 미소를 종종 지었다.
‘나를 향한 세리의 맹목적인 사랑은…… 한센에게 배운 건가?’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다.
세리의 이유 없는 사랑은 한센에게 배운 것 같기도 했다.
빈첸은 배워보지 못한 종류의 생소한 것이었다.
“공자님은 주무실 시간이 이미 한참 지났잖아요. 지금 몇 시인지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저 녀석의 검을 꼭 봐야겠는데.”
“내일 봐도 되잖아요!”
“내일은 내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알고? 난쟁이족의 변덕이야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세리는 빈첸의 몸 상태를 잘 알았다.
오늘 낮에도 제론과 대련을 치렀고, 지금은 쉬어야 할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자님이 지금은 힘들다고 말씀하시기 곤란할 거야.’
그래서 엿듣고 있다가 일부러 나섰다.
“공자님은 주무셔야 해요.”
“아직 해가 중천인데?”
“중천? 중천이라고요? 아저씨 지금 중천이라 그랬어요?”
세리가 도끼눈을 떴다.
“눈 그렇게 뜨지 말아라. 무섭구나.”
“아저씨도 제가 열네 살 무렵에 일찍 자라고 그렇게 잔소리했으면서.”
“…….”
“자정 넘어가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뭐라고 했잖아요.”
“그건 다 너를 위해…….”
“공자님을 위하는 것이 제 일이예요.”
한센은 반박하지 못하고 세리를 바라보았다.
세리는 성인이 되었지만, 한센의 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요즘 아저씨 공방에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미안해요. 앞으로는 자주 들를게요.”
“흥.”
“네?”
“헹! 난 그런 것쯤은 별로 안 바란다.”
한센은 코웃음 쳤으나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그러고는 세리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럼 내일. 몇 시쯤 오면 되겠느냐?”
빈첸이 대답했다.
“9시에 뵙도록 하지요.”
세리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빈첸은 한 차례 명상을 통해 마력자전을 끝낸 뒤 잠을 청했다.
이윽고 아침이 되었다.
빈첸은 차가운 물로 몸을 씻어냈다.
-진검회동 때보다 더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긴장되지.’
-왜요?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야장 중 한 명을 정식으로 만나 뵙는 자리가 아니냐.’
무인으로서 극의에 오르기 위해서는 명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빈첸의 입장에서 이번 기회는 무인으로서 아주 좋은 기회였다.
‘현시대의 명인이 평가하는 나의 검술은 어떤 모습인가.’
빈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