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8화
레일사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대한 마나흐름.
그로 인해 활성화된 정체 모를 마법진.
그녀 역시 마법사들을 많이 만나본 무인이고 지금의 이 마법진이 현대의 마법진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붉은 악귀’가 사라지고 마법진이 생성된다라.’
이미 이곳은 대대로 아덴카의 직계들이 시험을 치렀던 곳이었을뿐더러, 레일사는 본인조차도 이곳에서 두 번이나 같은 임무를 수행했었다.
다른 직계들과 함께 왔을 때에는 이런 현상을 보지 못했었다.
‘우연의 일치가 아냐.’
레일사는 분명히 보았다.
붉은 악귀가 빈첸의 검로에 의하여 소멸되면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했다.
빈첸의 특수한 검로가 이 마법진을 구동시켰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레일사는 이 마법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소환진이야.’
무엇인가를 소환하기 위한 마법진.
“레반 공자. 빈첸 공자님을 부축하여 내 뒤로 서시길.”
레반은 잠자코 빈첸을 업고서 레일사 뒤로 섰다.
레일사는 연검을 꺼내 들고서 소환진을 주시했다.
마법진의 범위가 점차 줄어들며 한 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빛의 기둥을 만들어내어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팟!
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물?’
이곳은 대악마 데이븐을 모셨던 신전.
사이한 곳이니 마물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아니. 마물이 아냐.’
인위적인 빛이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건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크기의 상자였다.
레일사는 조심스레 그 상자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이 문양은……!’
태양과 닮은 문양.
태양검제 아슬란의 표식이 그곳에 있었다.
상자는 빛이 바랬으나 표식만큼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레일사는 직감했다.
‘태양검제의 성유물이다!’
구구궁-
진동과 함께 살기가 느껴졌다.
‘성유물을 지키는 가디언인가.’
보물이 있는 곳에는 보물을 지키는 가디언이 있기 마련이었다.
태양검제 아슬란의 성유물이라면 그에 걸맞은 가디언이 있을 터.
‘땅속.’
강대한 파동을 가진 무엇인가가 땅 아래에 있었다.
그녀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파동이었으나 ‘마물’의 한 종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고대종인가.’
거대한 덩치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정도 파장이라면 거대 고대종일 확률이 높았다.
‘가디언으로 세뇌된 고대종.’
아슬란의 성유물이라면 약 500년간 이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그사이 자아는 모조리 소실되었을 것이고, 지금은 보물을 ‘지킨다’라는 개념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성유물에 손을 대는 순간이, 고대종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될 터.
레일사의 심상이 회전했다.
그녀의 심상은 가장 완벽하다 알려진 ‘별(星)’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7개의 심상이 충만한 힘을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아슬란이 남긴 상자에 손을 대는 순간, 땅 아래에서부터 거대한 입이 솟구쳐 올라왔다.
벨라디온 검식 제7장.
현대의 검술 중 어떤 검술은 ‘구결’을 필수로 한다.
레일사의 검이 그러한 종류의 검술이었다.
“불어라 북풍이여.”
레일사가 땅을 향해 연검을 내리꽂았다.
연검은 수백 가닥으로 갈라져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덤벼드는 거대한 구렁이를 토막 내었다.
순간, 주변이 얼어붙었다.
7개의 심상이 내뿜어낸 냉기(冷氣)가 주변의 마나를 동결시켰다.
먼발치서 지켜보던 레반은 눈에 힘을 주고 레일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것이 시종장의 힘……!’
책에서만 접해보았지, 진짜배기 7성 무인의 힘을 처음 견식했다.
레반이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레일사 주변의 마나가 레일사의 마나와 공명하며 함께 호흡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파동을 지니고 있던 가디언은 수백 토막 나서 사라졌으나 피는 단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그녀의 구결대로.
이 극렬한 냉기는 극한지대에서 불어온 북풍 같았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어느덧 정신을 되찾은 빈첸의 목소리였다.
“기생종이다.”
기적석은 과연 기적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강화된 신체’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빈첸의 몸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마지막 한 번의 이능검격을 펼칠 수 있을 만큼.
-형님. 제발요.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빈첸의 몸은 한계에 이른 상태.
그러나 빈첸은 멈추지 않았다.
‘공간을 베어낸다.’
실제로 공간을 베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의지를 담아 이능검격을 펼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을 베었고, 결국 그는 아무것도 베지 못했다.
율리안과 레반은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레일사는 달랐다.
‘내게 가르쳐주려 한 것이다.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베려 했어.’
무엇을?
‘저것인가.’
아주 작은 날벌레가 보였다.
눈에 힘을 주고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날벌레.
그것은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구렁이는 놈의 숙주였다.
레일사가 검을 휘둘렀다.
빈첸은 베지 못했으나 레일사는 베어냈다.
레반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나갔다.
‘위험했어.’
그대로 두었다면 놈은 레반의 몸에 기생했을 것이다.
기생종.
고대에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기는 했으나 직접 눈으로 본 건 레일사도 처음이었다.
‘내게 마물의 마력이 읽히지 않았어.’
분명 기생종은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알고 보면 보였다.
그러나 몰랐을 때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고대 기생종은 현대의 마물과는 달랐다.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을 빈첸 공자는 느꼈단 말인가?’
물어보고 싶었으나 물어볼 수 없었다.
빈첸은 또다시 기절한 상태였다.
그는 이번에도 넘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검을 놓치지도 않았다.
아까와 같은 자세로 의연히 서 있었다.
* * *
레일사는 빈첸을 직접 부축하여 돌무더기에 기대 앉혀 놓고 호흡을 확인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군.’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입니다.’
빈첸의 안위를 확인한 뒤, 레일사는 앞으로 걸었다.
태양검제의 성유물이라 추측되는 상자 앞.
그녀는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이건…….’
커다란 뼛조각이었다.
레일사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용골(龍骨).’
현재는 멸종되었다 알려진, 혹은 스스로 모습을 숨겨서 사라졌다 알려진 용의 뼈.
그 뼈에는 신묘한 힘이 담겨져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많은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마법공학 재료이기도 했다.
가격 자체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기도 했다.
‘대략 2㎏은 되어 보이는군.’
어느덧 빈첸도 정신을 차렸다.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앉은 상태 그대로 레일사에게 물었다.
“안에 무엇이 담겨 있지?”
레일사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용골입니다.”
그녀는 상자 안에서 용골을 꺼내 빈첸 앞으로 가져왔다.
“무게는 대략 2㎏쯤 되어 보이며 태양검제 아슬란 님의 성유물로 보입니다.”
“…….”
빈첸은 잠자코 용골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아까까지는 우연으로 치부했던 요소들이, 이제는 필연으로 다가왔다.
이것은 아슬란이 자신에게 남긴 안배였다.
“용골을 어찌할 생각이냐?”
“이것은…….”
레일사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이것을 장로회에 가져가면 시종장은 ‘총 시종장’이 될 수도 있었다.
혹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장로로 승격되는 것도 가능했다.
용골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보물이었으니까.
“공자님의 것입니다.”
레일사는 용골을 내밀었다.
이 임무는 빈첸의 것이었고, 빈첸이 아니었다면 이 성유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빈첸은 물끄러미 용골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장의 배려는 잊지 않겠다.”
빈첸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았다.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그대는 곤욕을 치르겠지.”
이 귀한 보물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이유로.
못난이 빈첸에게 넘겨주었다는 이유로.
장로회의 문책을 견뎌내야 할 것이었다.
“제가 감당할 문제입니다.”
“공범이 되도록 하지.”
빈첸이 피식 웃었다.
받아 든 용골에 힘을 주어 반으로 부쉈다.
“절반은 시종장의 것이다.”
“받을 수 없습니다.”
“시종장이 없었다면 나 역시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시종장 정도 되는 무인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모두 죽었을 것이다.
“임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쓰임새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레일사 본인의 영달을 위해서 사용하든.
장로회에 보고를 올리든.
가주에게 가져가든.
어떠한 것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받아라. 시종장은 나의 은인이니.”
결국 레일사는 용골 반쪽을 받아들었다.
빈첸은 그제야 가볍게 웃었다.
“이제야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구나.”
레일사는 용골을 받아든 채, 한참동안이나 빈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지금껏 알아왔던 빈첸과 지금의 빈첸은 너무도 달랐다.
‘사르비나.’
본래 그녀가 모셨던 주인의 이름을 떠올렸다.
아덴카의 진정한 안주인이자, 칸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당신께서 살아 있어 지금의 아들을 보셨다면 몹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못난이 빈첸을 보며 아덴카를 떠나야 한다고 수천 번도 넘게 생각해 왔다.
그 길었던 인내를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 * *
본가로 복귀한 레일사는 장로회를 찾지 않고 곧바로 가주를 찾았다.
가주는 아덴카가의 성지인 ‘검의 무덤’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시종장 레일사는 검의 무덤에 들어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명상을 하던 칸이 한쪽 눈을 가볍게 뜨고 말했다.
“본래 해당 보고는 장로회를 통하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다.”
“제가 보고 들은 것이 그보다 위대했기 때문입니다.”
레일사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상세히 보고를 올렸다.
어느새 가주는 두 눈을 모두 뜬 상태.
명상을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칸이지만 오늘 그의 얼굴에서 싫은 내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적대적이었던 레반이 충성을 증명하였습니다. 붉은 악귀에게 꽤 깊은 상처를 입었고 현재 치료는 완료된 상태입니다. 빈첸 공자는 레반의 행동에 신의로 답하였습니다. 결국 둘은 붉은 악귀를 토벌하였습니다.”
“혼자서는 어려우니 잔꾀를 부렸단 뜻인가?”
“이후 혼자서 붉은 악귀를 토벌했습니다.”
“…….”
“아덴카의 무인으로서도 격을 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얘기들이 남아 있었다.
“초대가주의 성유물을 획득한 듯합니다.”
“성유물이라.”
칸은 별다른 언급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레일사는 빈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답지 않게 조금 흥분해서 말했다.
“그분께서 살아계셨다면 분명 자랑스러워하셨을 것입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기절했으나 검을 쥐고 굳건히 서 있던 그 모습이.
“평가가 매우 후하구나. 그대는 본래 평가가 박하지 않은가?”
“제가 보고 들은 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시종장조차 모르는 것이 있군.”
“……무엇입니까?”
“용골을 부숴보아라.”
레일사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용골을 부수라니.
그래도 가주의 명이니 수행은 하기로 했다.
살짝 힘을 주어보았다.
용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서지지 않는다?’
힘을 조금 더 주었다.
마나를 사용해 보았다.
1성 수준의 마나.
2성 수준의 마나.
이내 7성 수준의 마나를 끌어내 보아도 용골은 부서지지 않았다.
빈첸이 반으로 동강낸 용골이건만, 레일사는 부수지 못했다.
“……이 현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네가 본 그대로다. 나 역시 초대가주의 뜻을 모르겠군.”
칸은 잠시 침묵했다가 명령을 내렸다.
“장로회에는 함구하도록.”
장로회를 통하지 않고 곧바로 가주에게 찾아온 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칸은 레일사에게 비밀스러운 명령을 하나 내렸다.
“그대가 보고 들은 것을 파헤쳐보아라. 내 아들에게 신비로운 것이 숨겨져 있는 것 같구나.”
레일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칸이 직접 빈첸을 ‘아들’이라 언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레일사는 고개를 숙이고 역대 가주들의 검이 꽂혀 있는 이곳.
검의 무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