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7화
‘붉은 악귀’ 한 마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오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놈은 아마도 레일사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빈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만큼 내게는 여유가 있다.’
신중한 성격의 개체인 듯했다.
‘이능검격’을 펼치기에 꽤 괜찮은 대상이었다.
‘가까이 왔군.’
붉은 악귀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붉은 악귀의 안면은 붉은색 기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콧구멍 벌렁거리는 게 더러워요.
이쪽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율리안에게는 빈첸 같은 경험은 없었다.
그러나 빈첸보다 구체적인 이론이 있었다.
-코를 많이 쓰는 놈이에요. 놈은 꽤 신중한 타입이고, 아마 탐색전부터 펼치려 들 거예요.
빈첸은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예? 뭐가요?
‘신중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몰랐거든.’
그 이유를 율리안이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코를 많이 쓰는 저 모습으로부터 빈첸은 본능적으로 ‘신중함’을 읽어냈던 것이었다.
율리안은 율리안 나름대로 혼란스러웠다.
-이유를 모르고 그냥 느끼는 걸 천재라고 해야 할지, 느끼면서도 이유를 모르는 걸 바보라고 해야 할지…….
빈첸은 본능적으로 붉은 악귀가 신중한 성격임을 간파하였고, 율리안은 이론적으로 그것을 읽어냈다.
‘저런 놈들은 보통 독무를 사용하던데.’
직접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상태.
율리안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맞아요. 독무. 통계에 따르면 그래요.’
빈첸에게 통계를 바탕으로 한 자료는 없었지만, 수많은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과 율리안의 지식이 만나 시너지효과를 일으켰다.
빈첸이 마나를 일으켰다.
‘배꼽 부근에서 독을 생성하는 것 같다.’
-맞아요. 그렇다고 알려져 있어요.
빈첸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들을, 율리안이 이론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빈첸은 홍련으로 붉은 악귀의 배꼽 부근을 가볍게 찔렀다.
3성 이상의 심상을 맺어야만 타격할 수 있다고 알려진 7급 유령종.
빈첸의 검이 유령종의 영체를 타격했다.
레일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마나를 사용하셨다?’
단순한 공격으로는 타격할 수 없다.
마나를 분명 사용했는데, 빈첸에게는 심상이 없었다.
‘심상 없는 마나야. 약해.’
레일사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공격은 마물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한 공격은 아니었다.
신중한 마물답게 붉은 악귀는 거리를 조금 벌렸다.
율리안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독무가 안 나오잖아요?
독무는 낮은 심상의 무인에게 꽤 큰 피해를 입힌다.
1성의 무인은 독무를 마시면 죽을 수도 있고, 2성의 무인은 몸이 굳는다.
3성의 무인은 가벼운 호흡곤란과 함께 몸이 평소보다 무거워진다.
-어떻게 했어요?
‘흐름을 뒤틀었어.’
독무가 생성되어 나오는 길을 선점하여 길이 꼬이게 만들었다.
본인의 마나를 상대의 마력회로에 밀어 넣어, 상대의 마력운용을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긴 시간을 벌지는 못한다.’
결국 ‘흐름’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빈첸이 원했던 건 이 잠깐의 시간이었다.
‘이능검격은, 상대가 당황했을 때에 발현되기 쉬워.’
연거푸 홍련을 내질렀다.
안면을 한 번 찔렀다.
붉은 악귀가 그오오오- 하고 귀곡성을 내뱉었다.
붉은 악귀가 낫을 휘둘렀다.
후웅-
파공성이 일었고, 빈첸은 가볍게 몸을 숙여 낫을 피해냈다.
거리를 벌리는 대신 오히려 더 가까이 붙었다.
레일사는 차분한 태도로 빈첸을 관찰했다.
‘놈의 무기는 크고 무겁다. 오히려 가까이 붙는 것이 유리해.’
너무 쉽고 당연한 얘기였다.
‘그러나 오늘이 첫 실전 아니었던가.’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이론을 잘 알아도, 실전에서 이렇게 잘 써먹을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그것도 첫 전투에서.
‘아무리 이론을 알아도, 붉은 악귀에게 저렇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열네 살의 무인이 몇이나 있겠는가.’
레일사는 빈첸의 무위 자체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태도는 놀라웠다.
‘몸놀림이 가벼워.’
몸에 힘을 빼고 있다.
긴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저 위험천만한 마나를 다루면서 말이다.
‘붉은 악귀’를 이미 여러 번 토벌해 본 사람 같은 태도군.’
이건 단순히 무력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레일사의 상식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틈을 만들고, 호흡을 유도하고 있다.’
그 기이한 검로를 만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빈첸의 기이한 검로가 빛을 발했다.
붉은 악귀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으으으으윽……!”
빈첸은 후우- 하고 깊은 호흡을 들이마시며 숨을 정돈했다.
이내 몸을 돌려 레일사 쪽을 바라보았다.
“보았는가?”
“…….”
레일사는 순간 갈등했다.
말을 해주어야 하나.
말을 해주지 말아야 하나.
‘‘붉은 악귀’는 두 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죽인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반으로 갈라진 저 영체는 다시금 하나가 되어 빈첸을 공격할 것이다.
역시 애는 애인가.
잠깐의 성공에 취한 것인가.
잠시 그렇게 생각했으나 레일사는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니.’
아까부터 거슬리던 기운이 하나 있었다.
‘레반 아덴카.’
레일사는 레반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레일사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았다.
‘혹여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패배감에 눈이 멀어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레일사는 지체없이 레반을 베어버릴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벌어진 상황은 레일사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레반이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내질렀다.
“하아압!”
그의 검이 향한 방향은 빈첸이 아니라 ‘붉은 악귀’였다.
붉은 악귀의 온몸이 시뻘건 붉은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이것이 ‘붉은 악귀’의 진짜 모습이었다.
광령화(狂靈化)가 진행되었다.
광령화과 진행된 ‘붉은 악귀’는 오로지 상대를 파괴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악령이 된다.
그 악령이 레반을 향해 낫을 빠르게 휘둘렀다.
“윽!”
레반은 2성의 무인이었고 방계였다.
그에게는 직접 ‘붉은 악귀’를 토벌할 힘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철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강인한 체력과 단단한 몸을 지니고 있었으며 붉은 악귀를 막아내며 시간을 버는 것은 할 수 있었다.
빈첸은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레일사는 그 장면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정신입니까?’
현대무인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을 하고 있었다.
마물 토벌을 하고 있는 와중에 명상을 하고 있다.
그것도 심상조차 없는 무인이 말이다.
저 상태에서 자그마한 충격이라도 전해진다면, 빈첸은 죽을 수도 있다.
‘이 무슨 무식하고 비상식적인 일이란 말입니까?’
레일사는 ‘그분의 아들’인 빈첸이 이곳에서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빈첸은 마력자전을 끝낸 뒤 눈을 떴다.
레반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수고했다, 레반.”
빈첸은 눈을 뜨자마자 이능검격을 펼쳤다.
광령화가 진행된 붉은 악귀는 이능검격을 펼치기에 너무나 좋은 상대였다.
두 번의 이능검격.
그 이능검격으로 붉은 악귀를 토벌해 냈다.
붉은 악귀는 기체가 되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검붉은 마나석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 *
레일사는 다소 싸늘한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빈첸 공자님의 방법이었습니까?”
“이 임무의 의도는 아덴카의 격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습니다.”
레일사는 이 방법이 틀렸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빈첸은 빈첸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붉은 악귀를 토벌했으니까.
그러나 이 방법이 아덴카의 격을 ‘제대로’ 증명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제가 오해한 것이 있습니까?”
“내가 방금 보인 것은 내가 증명하려했던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니.”
레반은 얼마 전까지 빈첸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랬던 레반이 이제는 빈첸을 위해 거리낌 없이 ‘붉은 악귀’에게 달려들었다.
한때 적이었던 자를 포용할 수 있는 포용력을 보여주는 행위였다.
레일사는 그것을 알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도중에 명상을 하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레반을 향한 신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시종장에게 똑바로 보라고 하였다.”
이곳은 레일사의 검력(劍力)이 통제하는 곳.
오직 한 마리의 마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제어되고 있다.
한 마리의 마물이 사라졌으니 인간의 냄새를 맡은 또 다른 붉은 악귀가 다가오고 있었다.
빈첸이 마나를 일으켰다.
한 번은 포용력을 보여주었으니 한 번은 무력의 격을 증명해야 했다.
‘두 번의 이능검격.’
지금의 몸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무인이라면 때로는 위험을 무릅쓸 줄도 알아야 했다.
멈추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그때가 지금이었다.
“나는 시작이 많이 늦었고, 그것은 다른 직계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일부러 명상을 하며 체력을 조금 회복시켜두었다.
또 한 마리의 붉은 악귀를 사냥하기 위하여.
“내게 충성을 맹세한 자를 이용하여 한 마리를 토벌하는 것까지는 누구나가 할 수 있다.”
그 예상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래야 격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누구나가 예상하는 것을 만족시켜 주었으니, 그 다음을 보여주어야겠지.”
또 한 번 이어진 이능검격.
붉은 악귀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지금이요. 지금 깨물어요.
꽈득.
빈첸이 ‘기적석’을 깨물어 삼켰다.
어차피 언젠가는 삼킬 기적석이었다.
그 기적석을 사용할 최고의 타이밍이라 판단했다.
일시적이지만 온몸에 활력이 느껴졌다.
마력회로 구석구석에 기적석의 힘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광령화가 진행된 악귀를 향해 또다시 이능검격을 펼쳤다.
마력회로가 불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심장이 터질듯 부풀어 올랐다.
난폭하게 날뛰는 마나가 온몸의 마력회로에 생채기를 내었다.
‘헉…… 헉……!’
빈첸은 정신을 집중하며 몸에서 날뛰는 마나를 다스렸다.
‘위험했다.’
중간에 명상이 없었다면.
또한 앞선 세 번의 이능검격으로 마나를 끝까지 소진시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마나가 폭주했을 것이다.
‘여전히 위험하고.’
몸 안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단 한 움큼의 방심이 빈첸 자신의 몸을 파괴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했다.
빈첸은 온몸을 집어삼키는 작열감을 뒤로한 채 레일사 앞에 섰다.
“이 정도면 시종장의 예상을 뛰어넘었는가?”
율리안은 미칠 지경이었다.
빈첸이 느끼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율리안은 약간은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형님은 괜찮아요?
겉으로 보기에 빈첸은 평온했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럭저럭. 특성이란 것이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훌륭한 무학이군.’
‘강화된 신체’ 특성은 과연 새로운 시대의 산물다운 힘을 발휘했다.
그 힘은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무너져가는 빈첸의 몸을 빠르게 회복시켰고, 기적석에 담긴 힘이 네 번의 이능검격을 버티게 만들어주었다.
빈첸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더욱 놀란 사람은 레일사였다.
“많은 것을 보여주셨군요.”
빈첸은 다른 직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저 신비한 검을 그냥 사용했다면 한 마리 정도는 쉽게 토벌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먼 길로 돌아왔다.
이 간단한 임무로 많은 것을 증명하여 보여주었다.
스스로 피투성이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은 레반도 그 증거 중 하나였다.
‘공자님?’
빈첸이 눈을 감고 있었다.
수많은 경험을 지니고 있던 레일사조차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기절하셨군.’
그러나 왼손에 쥔 검은 놓치지 않았다.
기절을 했으나 넘어지지도 않았다.
입가에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지경이 되어서도 넘어지지 않는다라.’
그 자리에 곧게 선 채 의식만 잃었다.
그 모습은 레일사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어쨌든 빈첸의 임무는 성공이었다.
그런데 레일사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뭐지?’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붉은 악귀’들의 몸이 기체가 되어 사라지고, 여기저기 그들의 마나석들이 떨어져 땅에 흡수되었다.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 전체에서 강렬한 마나흐름이 느껴졌다.
‘마법진?’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무언가 새로운 것이 펼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