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16화 (16/184)

환생의 정석 16화

빈첸이 고개를 갸웃했다.

“빠른 건가?”

“난 어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6개월이 걸렸어.”

그에 반해 레반은 전문적인 ‘가이드’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기억하는 길을 유도해 주고 안내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난 심상이론과 가호의 도움도 받았지.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네 방식보다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건 알아.”

레반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가호 없이 특성을 발현시킬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

“너처럼 하면 심장이 터진다고 배웠는데.”

레반의 상식이 뒤흔들렸다.

“좋은 선생이 둘이나 있어서.”

“둘?”

빈첸이 가볍게 웃었다.

“그런 게 있다. 아무튼 고마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다행이다.”

“그리고 하나를 더 도와줘야겠는데.”

레반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돕지.”

“뭔지 듣지도 않고?”

“네게 충성을 맹세했으니까.”

흥분한 레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기회다.’

그는 예전 빈첸에게 크게 충격을 받았었다.

호법을 제안함으로써 신뢰를 증명했다.

레반은 그 날 새로운 세계를 보았었다.

‘나도 증명하겠어.’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곧바로 제안을 승낙했다.

이것이 빈첸이 가르쳐주었고 레반이 배운 방식이었다.

“그러니 돕겠다.”

율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어, 내 상식이 무너진다.

그가 알고 있던 세계는 철저히 힘과 이성과 논리로 돌아갔었다.

그가 공부해 왔던 방식도 그러했다.

그런데 빈첸과 레반의 만남은 그러한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빈첸이 레반에게 먼저 신뢰를 보여주었고, 레반은 그 신뢰에 응답했다.

율리안이 바라보고 있던 관점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던 일이었다.

‘그래서, 싫으냐?’

-싫다기보다는 놀라운 거죠.

율리안이 보지 못했던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아무튼 형님은 형님의 일을 하였으니, 이제는 제가 제 일을 해야겠네요.

레반의 충성은 증명되었다.

증명된 명제를 가지고 계획을 짜는 것.

그것이 율리안의 일이었다.

그가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붉은 악귀’를 토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빈첸이 말했다.

“이 특성에 익숙해지면 붉은 악귀를 토벌할 거야.”

“붉은 악귀?”

“그래.”

“내가 아는 그 7급 유령종 말이냐?”

현시대는 마물을 ‘급’과 ‘종’으로 분류해놓았다.

붉은 악귀는 7급 유령종 마물이었다.

7급 마물부터는 ‘진짜’ 마물이라 불리며 일반적으로 3성 이상의 심상을 맺어야만 토벌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맞아. 아덴카의 직계라면 모두가 토벌했던 그놈.”

해당 임무는 오로지 아덴카의 ‘직계’에게만 주어진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덴카의 직계가 아니면 수행하기 불가능한 종류의 임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

“왜? 두렵냐?”

“아니.”

레반이 씨익 웃었다.

“오히려 고맙다. 난 무엇을 하면 되지?”

* * *

율리안이 말했다.

-뭐, 잘못되어도 죽지는 않을 거예요. 시종장 레일사가 함께할 테니까요.

시종장은 아덴카 직계의 보호자이자 감독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시종장이 함께해 준다는 것은, 적어도 죽을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직계의 공식적인 첫 임무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직계들 중 실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덴카의 직계라면, 그것도 열네 살의 직계라면, ‘붉은 악귀’ 토벌은 당연해야 했다.

‘근데 시종장쯤 되는 자가 따라붙는단 말이야?’

‘공식적인 임무’에 보호자 겸 감독관이 존재했다.

500년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왜요?

‘온실 속 화초도 아니고.’

당시, 가문의 일원들은 모든 것을 임무 수행자에게 맡겼다.

‘붉은 악귀’ 토벌이 임무였다면, 임무를 수행하고 증거를 가져오면 그만이었다.

이를테면 붉은 악귀의 마나가 담긴 마나석 같은 것 말이다.

-마나석을 사 올 수도 있잖아요. 그럼 어떡해요?

‘그런 놈은 무인이라 할 수 없지.’

-그래도 그게 효율적인 증명이 될 텐데요?

‘그런 머저리들이 존재하겠냐?’

율리안은 허- 하고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500년 전 세상은 외계가 틀림없어.

그때, 시종장 레일사가 다가왔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레일사는 검은색 단조로운 무도복을 입었다.

치장은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 도복이었고 왼 허리춤에는 가느다란 검 한 자루를 매고 있었다.

‘마치 잘 벼려진 명검 같은 느낌이군.’

그녀가 말했다.

“한 시간 후, 출발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이 흘렀다.

마차 안.

레일사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공자님께서 첫 임무를 수행하실 줄이야.’

아덴카 직계의 첫 임무.

사실 레일사는 빈첸이 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아덴카의 모두가 그러했다.

그런데 진검회동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심지어는 장로원에서도 빈첸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레일사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붉은 악귀’에 대해서 공부는 하셨습니까?”

“공부가 필요한 종류의 마물인가?”

사실 빈첸은 이미 ‘붉은 악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외팔이 데이븐이었던 시절.

처음으로 홀로 토벌했던 마물이 바로 ‘붉은 악귀’였다.

“자신이 있어 보이는군요.”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저는 공자님의 신비로운 검로를 견식한 상태입니다.”

빈첸에게 기이한 힘이 있다는 건 안다.

목검으로 레반의 팔을 잘랐다는 것도.

“그러나 3성의 심상을 맺지 못하면, ‘붉은 악귀’를 타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빈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레일사는 빈첸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그토록 재치 있는 사람이었나요?”

“시종장은 왜 날 도와주려 하는 거지?”

“저는 보호자 겸 관리자로 파견되었습니다. 응당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율리안이 말해주었다.

“시종장. 하나만 묻겠다.”

“예.”

“내가 지적하기 전까지, 정말 예산착복을 몰랐나?”

“…….”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빈첸이 그 말을 똑같이 읊었다.

레일사는 부정하지 않고 잠자코 빈첸의 말을 들었다.

“그건, 일부러 내게 약점을 잡혀준 것이 아니었던가?”

“제가 부족한 탓이었을 뿐입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종장 레일사는 빈첸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마차를 타고 계속 달렸다.

얼마간 달렸을 때.

폐허가 된 신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악귀’가 출몰하는 곳입니다. 정확한 명칭은 없으나 ‘옛 신전’들 중 하나라고 불립니다.”

“그래. 초대가주님께서 업적을 세운 곳이라 들었다.”

아주 오래전.

아덴카의 초대 가주 ‘아슬란’은 ‘대악마 데이븐’을 모시는 신전 중 하나였던 이곳을 정화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렇습니다. 악마들의 신전이었던 이곳에서 악귀들의 왕 바할을 토벌하셨습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붉은 요새를 건축하셨지요.”

그 이후, 아덴카의 직계에게 내려지는 ‘붉은 악귀 토벌’ 임무가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빈첸은 마차에서 내려섰다.

‘아슬란이 정화한 곳이라.’

500년 전,

아슬란이 무슨 짓을 해놓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토벌했던 마물이 붉은 악귀였다는 걸, 아슬란도 알고 있었지.’

아슬란은 대악마 데이븐의 재림도 예언했다.

또한 아덴카 직계의 ‘첫 임무’는 붉은 악귀 토벌이었다.

정리하자면,

데이븐의 재림인 빈첸이, 또다시 첫 임무로 ‘붉은 악귀’를 사냥하게 되었다.

전통이란 이름 아래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이고 기분 탓인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내려서 판단해 보기로 하지.’

아덴카의 직계에게 내려지는 ‘첫 임무’는 단순했다.

그저 ‘붉은 악귀’를 토벌하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3성 이상의 심상을 맺어야만 타격할 수 있는 유령형 마물.

그러나 2성 심상의 아덴카 ‘직계’쯤 되면 붉은 악귀를 타격할 수 있었다.

심상의 질 자체가 일반적인 기준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 임무는 아덴카 직계의 격에 걸맞은 마나를 지녔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시험하는 단순한 관문이에요.

어려운 트랩이나 속임수 같은 건 없었다.

단순명료한 임무였고, 그 과정과 결과 또한 단순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그래.”

레일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집에서 얇은 검을 꺼내 들었다.

낭창낭창 휘어지는 연검이었다.

레일사가 마나를 끌어 올려 검을 한 차례 휘두르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나방벽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마치 마법처럼 주변을 감싸 안았다.

빈첸은 보자마자 직감했다.

‘한 마리의 마물만 들어올 수 있도록 조절했어.’

이 임무는 한 마리의 ‘붉은 악귀’를 토벌하는 임무.

그러니 오로지 한 마리의 마물만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인위적인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세상 참 좋아졌구나.’

500년 전이었다면 이런 배려 같은 건 없었을 텐데.

물론 다른 점이 있기는 했다.

그때였다면, 열네 살 소년에게 ‘붉은 악귀’를 토벌하라는 어이없는 임무는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무인들은 성장속도가 매우 느렸고 열네 살이면 이제 겨우 고블린 같은 마물을 토벌할 수 있을까 말까 한 나이였으니까.

“첫 임무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레일사는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의 빈첸 공자님에게 붉은 악귀는 무리다.’

한 번의 기이한 검로를 선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많은 것이 있어야 했다.

‘그분의 아들인 당신께서, 첫 임무에 실패하는 최초의 직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윽고 사람의 냄새를 맡은 ‘붉은 악귀’ 한 마리가 폐허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악귀는 유령형 마물이었고, 손에는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몸 전체에서 불길한 붉은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빈첸이 말했다.

“이 임무의 의도는 아덴카가 가진 마나의 격을 증명하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2성 심상으로, 3성 심상 이상의 것을 보여라.

그것이 핵심이다.

“누구에게 보고를 올리게 되어 있나?”

“1차로 장로회. 그곳에서 보고로서의 가치를 판단한 뒤 가주에게 전달됩니다.”

“그래.”

빈첸이 홍련을 꺼내 들었다.

이 검은 아덴카의 가주 칸이 첫 시작을 알렸던 검이었다.

“홍련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일 것이니.”

빈첸의 시선이 ‘붉은 악귀’를 향했다.

이 검은 칸의 첫 시작을 알렸던 검.

그리고 ‘붉은 악귀’는 외팔이 데이븐의 첫 시작을 알렸던 마물이었고 아덴카 직계들의 첫 임무다.

그 ‘첫 시작들’의 마주치는 교차점이 이곳이다.

“시종장은 똑똑히 보아라.”

빈첸은 시작이 많이 늦었다.

평범하게 해서는 높이 갈 수 없다.

외팔이로 태어났던 데이븐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범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본 바를 정확히 전하라. 내가 어떻게 아덴카를 증명하였는지를.”

다른 직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아덴카의 격을 증명하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