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5화
빈첸은 레반을 호출해서 어떻게 ‘철인 특성’을 발현시키고 갈고닦아왔는지를 들었다.
“……하여 두 번째 발가락 쪽의 혈도를 자극하는 것이 기본이야. 나는 이렇게 처음 특성을 발현시켰어. 정확히는 철인이 아니라 ‘강화된 신체’로 출발했어.”
율리안이 알고 있는 이론과 레반의 실전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럼 내가 흉내를 내볼 테니, 한 번 봐줘.”
“무슨 말이야?”
레반은 빈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명상할 거야. 네가 ‘강화된 신체’를 발현시킨 그 길을 따라서.”
“명상한다고? 넌 심상을 맺지…….”
레반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설마 마나를 본격적으로 수련하기 시작한 거야?”
“그래.”
“심상 없이 마나를 심장에 직접 쌓는다고?”
“그러고 있어.”
“그 상태에서 명상을 한다는 거야?”
심상이론에 기초하여 명상을 하고 마나를 운용하면 안전하다.
명상 중에 누가 건드리거나 정신을 흐트러뜨려도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심상 없이 하는 명상은 달랐다.
“혹시 누가 건드리거나. 정신집중이 깨지면? 어쩌려고 그래?”
“안 그러면 되지.”
“마나가 역류하거나 마력회로가 꼬이거나 터질 수도 있다던데.”
지극히 위험하여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방식이다.
“아덴카의 직계 중에 이런 미친 인간이 있을 줄이야.”
빈첸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네게 호법을 맡기는 거야. 호법을 봐주면서 내 흐름을 체크해 줘.”
호법.
명상을 할 때 옆을 지켜주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율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이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너도 동의한 거 아니었나?’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해놨어요?
비록 충성을 맹세하기는 했으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적에 가까웠다.
그런데 명상을 하겠다니.
‘믿는 건 내 몫이라며?’
-이렇게 급진적이지는 않기를 바랐죠.
‘쟤는 진심이라니까.’
-아무튼, 안전장치 같은 거는 일절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래서? 그럼 이제 와서 하지 마?’
-하아. 마음대로 해요.
‘뭔가 대비를 해놓은 모양이지?’
율리안도 빈첸에게 말해주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사실 율리안은 레반이 충성맹세를 맺을 당시 없는 신력을 긁어모아 ‘맹세’를 발현시켰다.
-왠지 영감님이라면 이럴 것 같았으니까. 나는 내 할 일을 해야죠.
이 맹세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레반의 마력흐름이 꼬인다.
율리안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안전장치였다.
-근데 그게 발현되면 나 안 그래도 없는 신력 왕창 박살 나요. 나 신력 다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죠? 우리 다 죽는 거예요.
‘걱정 마라. 그럴 일 없을 테니.’
-저 근거 없는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거람.
율리안만 어이없어 한 것은 아니었다.
제안을 받은 레반조차 황당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심상조차 없는 위험한 마나를 다루는 명상을 하면서 호법을 서달라니.
‘그만큼 날 믿어주는 건가.’
레반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굳이 내 앞에서 명상을 하겠다는 건 이상해.’
빈첸에게 정말 ‘철인 특성’으로 활성화시킨 마력회로의 흐름이 필요할까?
아니, 필요 없다.
‘빈첸에게는 가호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길을 알려달라며 제 앞에서 명상을 하겠단다.
이 이상한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빈첸은 정말로 눈을 감고서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레반의 가슴에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가득 차올랐다.
‘마나 흐름을 알고 싶다는 건 핑계인 거다.’
그는 확신했다.
‘이건 충성을 맹세한 내게 믿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빈첸은 요란한 말 대신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레반에게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레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빈첸의 옆에 섰다.
주위의 마나가 빈첸 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을 깨물었다.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나?’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난 못 해.’
그는 상대를 저토록 믿을 수 없었다.
상대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레반은 빈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와는 그릇 자체가 다른 거야.’
진검회동에서 패배했을 때보다, 더한 패배감이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이 패배감은 굴욕적이지 않았다.
‘기분이 좋구나.’
이 패배감이 레반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다.
* * *
레반은 체계적인 공부와 더불어 어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 어른들을 일컬어 ‘가이드’라 부르는데 레반은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강화된 신체’를 발현시켰었다.
수백 번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했었고, 그때의 모든 것들은 몸이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허리의 마력회로를 스쳐 지나가도록 유도해야 해.’
빈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빈첸의 흐름에 집중했다.
집안의 어른들은 도와주었듯 레반도 똑같이 했다.
다만, 율리안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뇨. 영감님아. 그게 아니라 오른쪽 허리 아래라니까요.
율리안은 소리치고 싶었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혹시라도 명상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뭐가 이렇게 체계가 없어?
빈첸의 마나 유도는 본능에 의거한 방식이었고, 현대의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빈첸이 율리안의 이론을 실시간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레반이 올바른 마나흐름을 유도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명상을 하면서 체내의 마나를 온몸 구석구석, 한 바퀴 돌리는 것을 ‘마력 자전’이라 부른다.
한 번의 마력 자전을 끝낸 빈첸이 눈을 떴다.
레반의 뒷덜미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크게 놀랐다.
“진짜로…… 마나를 익혀서 마력 자전까지 시켰네. 진짜로 해버렸어.”
교과서에서 봤다.
이렇게 하다가 잘못하면 죽는다고.
그런데 빈첸은 이걸 태연스레 해냈다.
“일단 감은 잡았으니까 앞으로도 종종 부탁한다.”
율리안이 빼액- 소리 질렀다.
참고 참았던 분노의 일갈을 내뱉었다.
-감을 잡긴 뭘 잡아요!
빈첸이 잘하는 것이 있고 율리안이 잘하는 게 있었다.
빈첸은 본능적인 유도에 능했고, 율리안은 체계적인 분석에 능했다.
-그렇게 마음대로 하다가는 진짜 심장 터져요. 죽는다고요!
‘많이 티 났냐?’
-하아.
사실 빈첸도 위험을 직감했었다.
특성 발현을 위한 마력 자전은 일반적인 명상과 느낌이 달랐다.
잘못하면 심장이 터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오랜만에 느낀 상태였다.
율리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으로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알려드릴게요. 복습에 복습에 복습을 한 이후에 진행하는 걸로 해요. 알았죠?
빈첸도 딱히 토를 달지는 않았다.
율리안의 말이 모두 맞았기 때문이다.
‘특성 발현’을 위한 ‘마력 자전’은 여지껏 빈첸이 해왔던 것과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도록 하지.’
-진짜요? 무인은 응당 그런 위험을 짊어진다, 그럴 줄 알았는데?
‘방금은 진짜 죽을 뻔했으니까.’
-맙소사. 근데 왜 그렇게 태평해요?
‘아무튼 살았잖냐?’
-이러다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빈첸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이야.’
-왜요?
‘내 말이 맞지?’
-뭐가요?
빈첸의 눈이 레반을 향했다.
‘거봐라. 쟤는 진심이래도.’
율리안이 준비한 최후의 안배는 발동되지 않았고 신력도 크게 소모되지 않았다.
결국 빈첸의 말이 맞았다.
-하아.
* * *
율리안은 스스로 공부해 온 것들을 토대로 하여 ‘빈첸’의 몸에 맞는 특성 발현 이론을 창안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운데요. 지금 형님의 마나를 제가 마력 미분하여 그 결괏값의 증감을 토대로 산출해 보면…….
‘쉽게 좀 말해라.’
-마나의 양만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1성 무인에 준한다는 뜻이에요. 레반이 1성 무인이 되고 6개월 정도 흘렀을 때 ‘강화된 신체’를 발현시켰단 말이에요? 레반의 수련시간과 현재 마나의 질을 역산하여 계산해 보면 1성 심상의 1/3 정도의 마나가 쌓인 상태였고…….
‘율리안. 본론만 쉽게 얘기하는 법은 배운 적 없나?’
-지금 이것도 엄청 쉽게 풀어 얘기하는 건데요. 더 이상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좀 알려줄래요?
‘똑똑하다는 거 거짓말이지?’
아무튼 결론은 간단했다.
빈첸의 몸 상태에 따라 ‘익힐 수 있는’ 특성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결론은 간단하잖아. 지금 내 몸이 ‘강화된 신체’를 발현시켜도 되는 상태라는 뜻 아냐?’
-그, 그건……!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돌아와?’
-끄응.
율리안의 계산에 따르면 앞으로 2달 이내에 ‘강화된 신체’를 발현시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보수적으로 잡아서 2달. 빠르면 1달이면 될 거예요. 그렇지만 몸이 워낙에 허약하니까 넉넉히 2달로 잡고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율리안의 목소리가 조금 들떴다.
-‘붉은 요새’ 입성까지 5개월 정도 남았으니까, 그 전에는 충분히 돼요. ‘강화된 신체’를 획득하면 이능검격 횟수를 늘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중이에요. 그러면 ‘붉은 악귀’를 토벌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
이러한 것들은 율리안에게 일임했다.
율리안에게 맡겨놓았으니, 빈첸도 율리안의 말을 잘 따랐다.
‘느낌이 새롭구나.’
-뭐가요?
‘옛날의 내 옆에 네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을 생각해 보았다.’
500년 전.
외팔이 데이븐.
그는 우직하게 무인의 길만 걸었다.
그때도 만약 율리안 같은 책사가 곁에 있었다면, 가문에게 배신당할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고, 대악마로 기록되는 치욕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와서야 의미 없는 생각이겠지만.
-그러니 제 말을 좀 잘 들어줘요. 제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빵이 생겨요.
‘꼭 그런 건 아니던데.’
-예?
‘내가 [물레방앗간과 첫사랑] 봐야 한다고 했냐, 안 했냐?’
-또 결과론적인 얘기 한다.
‘결과가 모든 걸 증명하는 거야.’
대악마 데이븐을 비롯한 500년 전 과거의 역사가 다 날조된 것도 결과인데요? 천골도 마력체도 역사에서 다 지워진 게 결과인데. 어떻게 생각해요?
율리안은 그렇게 말을 하려다 말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것이 빈첸의 역린 같았고, 그것만큼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근데 진짜로 육감이란 게 있기는 한가 봐요.
비상식보다는 상식을.
희망과 역발상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했던 율리안의 정신세계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3주 후.
레반은 허- 하고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의 기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 버렸다.
레반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심상 없이…… 정말로 특성을 발현시켰네.”
계속된 마력 자전을 통해 해당 회로에 마나를 계속해서 각인시키면, 어느 순간 특성이 발현된다.
그것을 ‘각인’이라 부른다.
각인이 완료되면 최소한의 마나 주입을 통하여 빠르게 특성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것도 3주 만에.”
빈첸은 3주 만에 ‘강화된 신체’ 특성을 각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