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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4화 (14/184)
  • 환생의 정석 14화

    얼마 후.

    레반 아덴카가 빈첸의 방을 찾아왔다.

    진검회동에서 빈첸에게 무너진 방계의 신성.

    그의 오른손에는 한 자루 검이 들려 있었다.

    빈첸은 딱히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그때 즈음.

    즐거운 마음으로 샌드위치를 만든 세리가 이쪽을 발견했다.

    ‘레, 레반 아덴카!’

    레반 아덴카.

    방계의 신성이면서 직계인 빈첸에게 온갖 열등감을 표출하는 못난 놈.

    그녀의 시선이 레반의 오른손에 닿았다.

    ‘검을 들고 있잖아!’

    보아하니 결코 평화로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멀리서 본 레반 아덴카는 사고라도 칠 것 같았다.

    ‘제론 경을 불러와야 하나?’

    너무 소란 떨지는 않기로 했다.

    검을 든 무인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세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레반 아덴카가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레반이 말했다.

    “네게 많은 것을 배웠다.”

    세리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네게 못난 모습을 보였어.”

    “그랬지.”

    “그러나 너는 나를 용서하였고, 너의 기적석을 소모하여 내 팔을 고쳐주었다. 나는 아무런 값도 치르지 않았다.”

    레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 날 이후로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 마귀들이 나타나 ‘비겁자’라고 놀려댔다.

    실제로 그는 비겁했었고, 그 날의 기억은 치욕이었다.

    “나는 그 날, 아버지의 팔을 희생시켜 내 팔을 회복시키고 싶어 했다.”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건 알고 있나보구나.”

    “그래.”

    레반이 고개를 떨구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비겁했다. 비록 방계라고는 하나, 아덴카의 피를 이었다 할 수도 없을 만큼 한심했다.”

    “…….”

    “오늘의 나는 비겁하고 싶지 않아.”

    과거는 지울 수 없다.

    레반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를 바꿀 수는 있었다.

    “여러 날 동안, 무엇으로 값을 치를 수 있을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

    “그래서. 답은 찾았냐?”

    레반은 잠시 침묵했다.

    깊게 호흡한 뒤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네게 내어줄 수 있는 건 없어.”

    “그러면?”

    “네게 충성을 맹세하고 싶다.”

    빈첸은 피식 웃었다.

    ‘뿌리부터 썩은 놈은 아니구나.’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한다.

    중요한 건 그 잘못을 바로잡느냐, 바로잡지 않느냐다.

    레반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비겁함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레반은 빈첸의 선고를 묵묵히 기다렸다.

    빈첸은 율리안에게 물었다.

    ‘어때? 속이 좀 시원하냐?’

    -아뇨. 후련하려면 저놈 목을 쳐야지요.

    ‘그럼, 목을 쳐주랴?’

    율리안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이내 말했다.

    -저는 저런 말뿐인 충성 같은 건 안 믿어요. 그러니까 믿는 건 형님이 하세요.

    율리안은 율리안의 일을 하기로 했다.

    -저는 쟤를 의심하고 이용할 거예요.

    레반의 충성맹세.

    그것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행동과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들기로 했다.

    -레반과 함께라면 ‘붉은 악귀’를 토벌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덴카 직계의 첫번째 공식 임무.

    율리안은 그 임무를 완수할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레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충성맹세를…… 받아줄 것이냐?”

    “말뿐인 맹세인가?”

    레반은 고개를 저었다.

    레반은 검의 손잡이를 빈첸 쪽으로 돌린 뒤, 오른쪽 아래에 내려두었다.

    “나 레반 아덴카는.”

    무인이 스스로 검을 내려 놓는다는 것.

    검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것.

    그것은 상대에게 목을 내놓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진실된 충성을 뜻하기도 했다.

    “검을 내려놓고 네게 충성을 맹세하겠다.”

    빈첸은 한동안 레반을 바라보았다.

    율리안은 레반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믿는 건 나의 몫이라 했지?’

    빈첸은 빈첸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그가 보는 레반은 진심이었다.

    ‘이 아이는 진심이다.’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유독 눈에 띄는 붉은색 검신을 가진 ‘홍련’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반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홍련?’

    홍련이 틀림없었다.

    목 뒷덜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가주와 베르사 부인의 인정을 동시에 받았었구나. 이미.’

    빈첸이 홍련의 검등으로 레반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언제라도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위치에서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상대를 용서하고 충성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네 맹세를 받아들이지. 나도 네 편에 서줄 것이다. 네가 배신하지 않는 한.”

    빈첸이 검집에 검을 갈무리하고서 손을 내밀었다.

    레반은 빈첸의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레반이 다시 말했다.

    “고맙다. 용서해 줘서.”

    “고마우면 앞으로 잘하고.”

    “……그래.”

    빈첸이 한 마디를 더했다.

    “마나의 첫 흐름을 유도할 때, 세 갈래로 나누지 말고 한 번에 쏟아내 봐.”

    율리안이 대답했다.

    -잘 화해해놓고, 엿 먹이는 거예요?

    심상의 첫 흐름 유도는 세 갈래다.

    그것이 기본이었다.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성취가 높아지면 자유로이 변형하게 된다.

    -세 갈래가 가장 안정적인 흐름이잖아요.

    세 갈래를 하나로 합치면 흐름이 너무 강해진다.

    마력회로가 손상될 수도 있었다.

    인류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발견한 가장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흐름이 바로 세 갈래 시작이었다.

    “넌 철인 특성을 지녔으니 그쪽이 훨씬 나을 거다.”

    율리안은 순간, 충격을 받았다.

    저도 모르게 빈첸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건 그렇네요.

    빈첸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헛똑똑이지. 이론과 실전은 달라.’

    듣고 보면 너무 쉬운 말이었다.

    철인은 몸이 단단하고 마력회로도 튼튼하다.

    그러면 굳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맞춘 공식인 ‘세 갈래’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이러니 무학의 근본에서 멀어졌다고 하는 거야.’

    무학의 기본적인 이해는 뒤로한 채.

    다들 공식만 외우고 있으니.

    공식이 있으면 빠르고 효율적인 계산이 가능하지만, 원리를 모르는 공식은 의미가 없었다.

    ‘원리 없는 공식의 폐해이다.’

    적어도 빈첸에게는 그랬다.

    한편, 세리는 샌드위치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은 채 두 손을 맞잡고 빈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참으로 멋진 날이네요.’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리고 이내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공자님!”

    세리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밝았다.

    “햄을 잔뜩 넣은 샌드위치예요.”

    그리고 레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솔직히 세리는 아직 레반을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우리 공자님께서 용서하셨으니까.’

    그럼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 맞았다.

    전에 없이 상냥하게 말했다.

    “공자님도 드시겠어요? 맛 좋은 샌드위치랍니다.”

    * * *

    빈첸은 3급 서고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3급 서고에는 수많은 책들이 종류별로 정리가 되어 있었는데, 개중에는 정확한 분류가 어려워 ‘비분류’ 로 모아놓은 책장이 여럿 있었다.

    쓸모없는 야사(野史), 민담으로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 허무맹랑한 검술식의 수련법 등.

    빈첸이 관심을 가진 것은 이토록 쓸모없는 책들이었다.

    -여기는 3급 서고예요. 아마 형님이 원할 만한 고급 정보는 없을 거예요. 만약 있다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책 속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겠죠.

    정식으로 발간되는 모든 역사를 왜곡했다고는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없애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허무맹랑한 이야기책이나 민담까지는 건드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빈첸은 여러 날 3급 서고를 찾았고 ‘비분류’ 섹터에서 많은 책들을 읽었다.

    ‘이거. 흥미가 동하는군.’

    [물레방앗간과 첫사랑]

    율리안은 진심으로 황당해했다.

    물레방앗간과 첫사랑이라니.

    -그걸 진짜 읽어요?

    ‘그래.’

    -왜요?

    ‘그냥.’

    빈첸은 잠자코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무인을 꿈꾸는 한 시골 청년과 요양을 하기 위해 찾아온 귀부인의 로맨스를 담은 소설이었다.

    ‘주인공이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

    그가 보기에는 이상했다.

    심상이 없는 무인인데 ‘강철체력’ 과 ‘세 번째 다리’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로맨스 소설이잖아요. 저건 허구라고요.

    ‘잘 좀 생각 좀 해봐. 내가 이걸 왜 끌려하는지.’

    율리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인도 모르는 본인의 심리까지 분석하라는 건 좀 너무하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율리안은 율리안 나름대로 소설을 분석해 보았다.

    소설의 절정 부분에 다다랐다.

    -로맨스 소설은 보통 주인공들의 사랑이 맺어지는 게 절정 부분인데요.

    그런데 이 로맨스 소설에는 그러한 내용 대신 악역을 처단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주인공은 작품 속 악역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심상이론을 통해 길을 알아내었으니, 이제는 심상 없이 마나를 유도하여 그 길을 재구성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율리안이 에휴- 한숨을 쉬었다.

    역시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애초에 심상 없이 마나를 유도하다가는 다 죽…….

    율리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심상 없이 마나를 유도하는 야만적인 인간을 한 명 알고 있었다.

    그 인간은 아주 잘 살아 있다.

    -……지 않네?

    [“특성을 통해 마나 흐름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나의 흐름을 만들어 특성을 발현시키는 것이다.”]

    지금의 상식과는 반대였다.

    지금은 특성을 사용하여 이능을 구현해 낸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반대였다.

    특정한 흐름을 만들어서 특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내용이었다.

    빈첸이 말했다.

    “난 마나흐름을 유도하여 특성을 발현시키는 법을 몰라.”

    그러나 그 길을 정확하게 외우고 이론에 통달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사람은 율리안이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기존 심상이론을 모두 버려야 한다. 심상 없이 자유로운 마나만이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모든 조건이 빈첸에게 딱 들어맞았다.

    ‘어떠냐? 한번 해볼까?’

    -저는 책으로만 특성발현을 공부했어요. 그래서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을 터였는데…….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주변에 전폭적인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연구가 많이 되어 있고 지금의 빈첸이 익힐 수 있을 만큼 등급이 높지 않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

    -하필이면 지금 이 타이밍에 레반 아덴카가 충성을 맹세했네요.

    철인 특성을 발현시켰으며 빈첸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인.

    율리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봐요.

    율리안의 목소리가 들뜨기 시작했다.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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