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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3화 (13/184)

환생의 정석 13화

“공자님!”

세리가 헐레벌떡 빈첸에게 달려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방금 복귀했어요. 빨리 오지 못해 죄송해요.”

세리는 조심스레 빈첸의 눈치를 살폈다.

빈첸을 향한 세리의 눈에는 맹목적인 사랑이 담겨 있었고, 그러한 사랑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빈첸은 조금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누구지?’

-세리예요. 내 직속시녀 겸 유모.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착한 사람.

율리안의 목소리는 조금 들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율리안은 세리에게 미안해하고도 있었다.

이상하기는 했다.

기쁨과 미안함을 함께 느끼고 있다니.

‘세리라…….’

‘세리’라는 이름을 듣자 그녀에 대한 기억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그러자 율리안의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제론이 말해주었다.

“가주께서 공자님의 서고 출입을 허가하셨다. 공자님이 레반을 이기셨거든.”

“……네?”

세리는 혼란스러웠다.

차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빈첸의 태도도 평소와 달랐고, 제론의 말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레반 아덴카를 이기셨다고?’

레반은 진검회동의 우승 내정자.

그리고 빈첸은 그 레반에게 패배할 예정이었던 직계였다.

진검회동에서 최초로 패배한 직계.

빈첸은 그 오점을 짊어지게 될 운명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말했었다.

“빈첸 공자께서 더없이 무인다운 태도와 신념을 보여주셨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승리였어. 모두가 감탄했었다. 나 역시 감탄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

세리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제론의 말이 너무나 비상식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또 제론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 말이…… 모두 사실인가요?”

세리는 간절함을 담아 빈첸을 바라보았다.

제발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빈첸에게 정말 기적이 일어났기를.

그래서 공자님이 행복하기를.

세리는 그 짧은 순간, 수많은 꿈을 꾸었다.

빈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영 적응이 안 되는군.’

-뭐가요?

‘저 맹목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 너는 저 여인에게 무척이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요. 나도 이해 안 돼요.

‘그렇지만 이 어색함이 싫지 않구나.’

부모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기에 더욱 크게 느껴졌다.

빈첸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직도 얼떨떨하기는 했으나 빈첸의 변화는 세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무인이 아닌 자가 울 때에는 어떻게 위로해야 하지?’

-그, 그건 저도 몰라요.

‘헛똑똑이로구나.’

-마도공학과 정령강림학에 그런 내용은 없거든요!

빈첸이 세리 앞으로 다가갔다.

화려한 언변과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기술은 없지만 담담하게 진심을 전했다.

“그간 많이 미안했어.”

세리를 마주하고 있자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다.

아덴카의 못난이 빈첸이 괴롭히는 딱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리였다.

그건 율리안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자신에게 호의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대상에게 함부로 대하고 못되게 구는 것이 ‘못난 인간’의 표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형인 말론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에도, 로아에게 뺨을 맞았을 때도.

옆에 있어 주었던 세리에게 화풀이를 했었다.

“네게 많은 상처를 줬다.”

세리는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한참 동안 울었다.

빈첸은 세리가 편하게 울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물었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하신 거예요?”

사실 빈첸도 이유를 설명할 길은 없었다.

대악마 데이븐의 영혼이 들어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구구절절 많은 것을 설명하고 이유를 말하는 대신, 미래를 약속했다.

“앞으로는 많이 달라질 거야. 고마움을 잊지 않을게.”

그게 지금의 빈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방으로 돌아온 빈첸은 율리안을 나무랐다.

‘모름지기 무인이라면 반드시 은원관계를 확실히 해야 한다. 원한은 두 배의 복수로 갚아야 하고, 은혜는 열 배의 감사로 갚아야 하는 법이다.’

세리는 무조건적인 빈첸의 편이었다.

그것은 은혜를 입은 것이고, 빈첸 역시 세리의 편에 서주어야 했었다.

그러나 율리안은 반대로 행동했었다.

유일한 내 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모자란 놈’의 특성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또한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무인 아니었거든요?

‘그것조차 네 생존방식이었을 테니 더는 나무라지 않으마.’

율리안과 정식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빈첸이다.

누구보다도 율리안 본인이 가장 속상했다는 사실을, 빈첸은 잘 알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율리안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고마워요. 세리도 적잖이 위로가 되었을 거예요.

빈첸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영감님, 사람이 고맙다고 말하면 반응이 있어야죠?

‘사람 아니잖아.’

-아이, 그래요. 신이 고맙다고 말하면 반응이 있어야 하잖아요.

‘신도 아니잖아.’

-잡신도 신이거든요? 신으로 치거든요? 지금 계시 내리는 거 안 보여요?

‘신으로 친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걸 좋아하는 성격 아니었나?’

-아, 짜증 나!

율리안은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마음 한편으로는 빈첸에게 다시 한번 고마웠다.

빈첸의 계속되는 시비는 율리안의 민망함을 다독이기 위한, 빈첸의 대화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영감님, 솔직히 말해요. 낯간지러운 말에 약한 타입이죠? 그런 거 안 해봤죠? 연애도 못 해봤을 거야. 그렇죠?

‘네가 이루고 싶다던 업적이 뭐더라, 기억이 안 나네.’

-저는 진작부터 형님이 진짜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빈첸은 피식 웃었다.

율리안과 대화하고 있으면 제법 재미있었다.

놀리는 맛도 있고.

‘그런데 율리안.’

-네, 형님.

‘세리는 무인이 아닌 것이 확실하지?’

-당연하죠.

‘그런데 마나를 익히고 있더라.’

재미있는 사실은 5성 무인인 제론 역시도 세리가 마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건 율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소리예요? 세리가 어떻게 마나를 익혀요?

‘심장에 마나를 담고 있었어.’

심상을 맺지 않은 형태의 덜 가공된 마나였다.

율리안의 표현에 따르면 ‘야만적인 마나’를 체내에 담고 있었다.

‘이 시대의 무인들은 그 마나를 읽어내지 못하는 모양이고.’

500년 전.

사실 세리 같은 사람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명상식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마나를 받아들이고 체내에 쌓아가는 체질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녀는 마력체(魔力體)란 말이야.’

백 번 양보해서 ‘천골’이 사미온 내에서만 유명했던 사실이라 할지라도, ‘마력체’는 그렇지 않았다.

500년 전에는 마력체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었고, 인위적으로 마력체를 발현시키는 기술까지 발전해 있었다.

무인이 아닌 사람들도 ‘마력체’라는 단어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 마력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모양이네.’

이걸로 확실해졌다.

단순히 영웅왕 카진의 업적을 기리고 외팔이 데이븐을 대악마로 만들기 위해 역사가 왜곡된 게 아닌 듯했다.

사미온의 명예만을 위하였다면 ‘마력체’라는 단어마저 없애버릴 이유는 없었다.

‘500년 전, 무인이 아닌 자들도 알 만한 단어와 개념이 사라진 건 무엇을 의미할까?’

율리안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공부했던 세상에 이런 내용은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기록을 지웠다는 것이겠지요. 아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하는 자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양심적인 역사학자들도 많았을 것이고.

율리안이 분석을 내놓았다.

-양심을 버리지 못한 자들은 모조리 죽었을 거예요. 500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 *

며칠이 흘렀다.

세리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덜어낼 수 있었고, 빈첸의 변화에도 적응했다.

세리는 이전보다 더 밝아졌고 보다 행복한 마음으로 빈첸을 챙겼다.

오늘은 빈첸이 좋아하는 -좋아하리라 생각되는- 코코아 우유를 만들어서 가져왔다.

“따뜻한 코코아예요. 좋아하시죠?”

아니.

난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라고 말하려다가,

“마침 마시고 싶었는데, 고마워.”

그냥 세리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실제로 어린 몸이라 그런지 단 음료가 입맛에 잘 맞기도 했다.

세리는 이런저런 음료를 잘 만들었고, 차(茶)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물과 차를 다루는 것에 익숙한 가문 출신 같았다.

문득, 세리의 가문이 궁금해졌다.

율리안이 가르쳐주었다.

-몰락가문, 히슬리가(家) 출신이에요.

빈첸의 몸이 움찔했다.

히슬리가라니.

-왜 그래요?

빈첸은 세리에게 직접 물었다.

“세리. 네 성이 무엇이었지?”

“제 성은…….”

세리는 머뭇거렸다.

몰락해 버려 잊혀진 가문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 부끄러웠다.

“괜찮으니 말해보아라.”

“……히슬리. 히슬리가 출신이에요.”

진짜 히슬리가였다.

히슬리가는 단순히 물과 차를 잘 다루는 가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체 연구에 특화되어 있었으며 무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가문이기도 했다.

‘그 히슬리가 몰락했단 말이냐?’

‘천골(天骨)’이라는 체질 역시 사실은 히슬리가에서 연구한 산물이었다.

그들은 500년 전부터 이미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가문이 몰락했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는 있어야 했다.

‘마력체라는 단어는 지워졌고. 히슬리가도 몰락했어.’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조작인가.

‘정말로 많은 것이 사라졌구나.’

일단은 현재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네 성에 당당해도 된다. 필시 훌륭한 가문이었을 테니.”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세리도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만 너무 의젓하지 말아주세요.”

세리는 어머니의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빈첸은 아직 어렸다.

빈첸의 성장이 감격스러운 한편 아쉽기도 했다.

빈첸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자신의 역할과 도움은 필요 없어질 테니.

빈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가 만든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

“정말요?”

“응. 햄 많이 넣어서.”

그 말에 세리는 활짝 웃었다.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만들어서 올게요!”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빈첸의 방문을 열고 나갔다.

무척 행복한 발걸음으로 걸었다.

방문이 닫히고, 빈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히슬리가는 사실 명문이었다. 다른 의미로 사미온에 버금가는.”

-확실해요? 그냥 이름만 같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세리는 마력체(魔力體)지.”

과거.

인위적으로 마력체를 발현하는 시술도 있었다.

그 시술을 만들어낸 가문이 바로 히슬리가였다.

“히슬리가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아이나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마력체 시술’을 해줬어.”

신관의 기적으로도 회복시키지 못한 몸을, ‘마력체 시술’을 통해 회복시킨 사례도 많았다.

그래서 500년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히슬리가를 존경했었다.

“그 히슬리가 출신의 아이가 하필이면 마력체라는 건, 너무 공교롭지 않나?”

율리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공교롭네요. 모든 것이 다. 짜 맞추어진 각본처럼.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율리안이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히슬리가가 맞다고 한다면. 그럼 지금 우리 몸에도 인위적으로 마력체를 이식할 수 있겠죠?

“히슬리가의 연구결과가 남아 있다면.”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거예요.

누군가 역사를 왜곡했다면, 그러한 세력이 존재한다면.

마력체 시술 같은 고급 연구 자료들을 모조리 없애버렸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걸 찾는 건 너무 오래 걸리겠죠.

그러면 아마 몸이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릴 것이다.

다행인 건 ‘마력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단서는 조금 찾은 것 같아요.

빈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율리안의 학구열이 불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천생 학자를 했어야 할 운명을 지닌 아이 같았다.

-방법. 찾아볼게요.

몸을 회복시킬 단초를 찾은 것 같았다.

“붉은 악귀 토벌 건도 생각하고 있지?”

-그럼요!

놓여진 난제들 앞에 율리안은 꽤 기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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