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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2화 (12/184)

환생의 정석 12화

홍련.

검신이 온통 붉은 빛깔인 이 검은 아덴카 내에서 상당히 상징적인 검이었다.

가주 칸이 어린 시절 직접 사용했었던 검으로, 칸의 시작을 함께했고, 그의 시작을 알렸던 병장기였다.

‘대단한 검이냐?’

-아버지의 시작을 알린 상징적인 검이에요.

현 아덴카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빈첸은 복도를 걸으며 홍련을 살펴보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날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붉은색 검신이 상당히 눈에 띄었다.

‘솔직하게 기뻐해도 된다. 뭘 자꾸 안 기쁘다 되뇌어?’

-제 마음이 읽혀요?

‘그래.’

-쓸데없이 동조율이 높아지고 난리람.

율리안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검을 하사한 직계는 여덟 명 중 겨우 둘뿐이었다.

그중 한 명이 된 것이다.

-겨우 이 정도로는 하나도 안 기쁜데요.

‘그래야지.’

-예?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룰 것이니까.’

칸 아덴카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검 말고.

아덴카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문의 명검 같은 것.

이를테면 명왕검(冥王劍)이나 백익(白翼) 같은 것들.

‘그러니 이 정도로 기뻐하지 말거라.’

율리안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정령신이 아닌 이상한 영감이 들어왔다.

여전히 이게 최선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미래를 꿈꿀 수는 있게 되었다.

빈첸이 그 미래를 보여주었다.

-아무튼 허세는 엄청나다니까요.

빈첸은 확신했다.

지금 율리안에게 육체가 있었다면 활짝 웃고 있었을 것이었다.

* * *

이동관문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기 직전.

베르사가 빈첸을 불렀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와 빈첸과 마주 섰다.

“하루아침에 네가 변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을 쌓아왔겠구나.”

변화는 하루아침에 벌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시간이 쌓여 마침내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진검회동의 우승자를 이겼으니, 관례대로 ‘붉은 요새’에 입성해야 할 것인데.”

붉은 요새.

아덴카에 우호적인 무가의 자제들이 성장을 위해 파견되는 요새였다.

아덴카의 몇 없는 실전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다른 가문들과 달리, ‘아덴카의 직계’가 붉은 요새에 입성하려면 두 가지 선결 조건이 필요했다.

진검회동의 우승자를 꺾을 것.

그리고 붉은 악귀를 토벌하여 직계로서의 격을 증명할 것.

“붉은 악귀는 어떻게 토벌할 셈이냐?”

빈첸은 잘 모르는 내용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

-잘 모른다고 해요.

율리안은 율리안 나름대로 묘책을 내던 중이었다.

본래는 정령신을 받아들여 진검회동에 우승한 뒤 ‘붉은 악귀’마저 토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빈첸은 정령신이 아니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은 의외였다.

방금까지 보여준 빈첸의 모습이라면 분명 계획이 있을 줄 알았는데.

베르사는 한동안 빈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네가 펼치는 검술은 한 번이 한계일 것이다.”

“…….”

“내 말이 틀렸느냐?”

“정확히 보셨습니다.”

“한 번의 공격으로는 붉은 악귀를 토벌할 수 없다.”

이번에는 빈첸이 베르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언해 주시는 건가요?”

“그래.”

빈첸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빈첸은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아래층으로 이어진 이동관문으로 향했다.

베르사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왜냐고 묻지 않는군.”

왜 ‘한 번의 공격’으로는 붉은 악귀를 토벌할 수 없는지.

‘물어보면 대답해 주려 했건만.’

그러나 빈첸은 묻지 않았고, 다른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다.

빈첸의 모습에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모처럼 설레는구나.”

아덴카의 못난이로 불렸던 빈첸.

이제는 그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 * *

빈첸은 칸과 베르사에게 인사한 뒤 이동관문을 통해 1층으로 내려왔다.

“바로, 저, 공자님의 직, 속, 시종 윌슨이 안내하겠습니다, 엣헴.”

윌슨은 또다시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앞서 걸었다.

‘내가 바로 빈첸 공자님의 시종이시다’를 온몸으로 주장 중이었다.

“아니. 근데. 못 보던 검이 생겼네요?”

“그래.”

“어디서 나셨어요?”

“아버지께서 주셨다.”

“헐? 진짜요?”

윌슨은 입을 쩍 벌렸다.

뒤를 돌아 빈첸을 쳐다보다가 앞 기둥에 부딪쳤다.

“으악!”

윌슨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리에 앉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룰루.”

“뭐하냐?”

“잠시 쉬던 중입니다. 이제 다 쉬었으니 일어나볼까요?”

윌슨의 이마에 커다란 혹이 생겼다.

그러나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검을 하사받았다는 영광에, 그는 고통을 잊은 모양이었다.

“가주께서 검을 하사하셨다는 거지요?”

“그래.”

“그 검의 이름이 혹시 뭔가요?”

“홍련.”

“홍련이요? 가주님이 어릴 때 사용했다는 그거요? 가주께서 그 검을 주셨다고요?”

윌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거야말로 현 아덴카의 시작을 알린 역사적이고도 훌륭하고 멋지고 엄청나고 음,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검 아닌가요?”

윌슨은 빈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빈첸의 얼굴에서 번쩍번쩍 광이 나는 것 같았다.

“그만 쳐다봐라. 얼굴 닳겠다.”

“제가, 공자님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500년 전 무인이었던 빈첸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당시 기준으로, 남성이 남성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거의 죄악이었다.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했다가는 혀를 잘라버릴 줄 알아라.”

윌슨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그는 꽤 겁쟁이였고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어쨌든 둘은 별채로 돌아왔다.

“편히 쉬십시오, 공자님.”

윌슨은 바람 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조심스레 문을 닫아 주었다.

빈첸은 방으로 돌아왔다.

율리안이 참고 참아왔던 것을 물어보았다.

-근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목검으로 팔을 잘라내는 게 가능한 거예요? 진짜 영웅왕의 검은 아니죠?

“그럴 리가.”

스승 네디아가 가르쳐준 검로다.

또한 외팔이 데이븐이 네디아와 함께 만들어간 검이기도 했다.

오로지 사미온의 카진을 극복하겠다는 일념하에 만들어간 이능의 검.

그런데 그게 영웅왕 카진의 검으로 둔갑되어 있었다.

‘제기랄.’

도대체 500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가.

게다가 아슬란은 어떻게 ‘대악마의 재림’을 예언했는가.

-그럼 좀 가르쳐줘요. 우린 동반자잖아요.

“내게 이 검술을 가르쳐준 사람은 흑발 흑안의 여인이었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강했고,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그녀는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은인이었다. 우리의 검은, 사미온을 극복하기 위한 검이었으며, 그녀는 이 검로를 일컬어 이능검격이라 불렀다.”

-이능검격이라고요?

그것이 바로 이능검격이었다.

“왜?”

-뭐야, 그럼 영웅왕의 검이 맞네요.

“뭐?”

-이능검격이야말로 영웅왕 카진을 대표하는 검술 중 하나잖아요?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악마 데이븐의 ‘사검’을 제압한 영웅왕의 검술이 ‘이능검격’이라고.

* * *

빈첸은 한참 동안이나 잠을 설쳤다.

분명 베르사는 대악마 데이븐도 이능검격과 비슷한 검을 구사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검은 사검(死劍)으로 기록되었다고 했다.

‘정작 내 스승의 검은 사검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불을 꽉 말아 쥐었다.

‘스승의 검로를 훔쳐서 제 검이라고?’

스승의 명예를 도둑질당했다.

‘대악마 데이븐’에 관해 들었을 때보다 더욱 기분이 나빴다.

‘사미온. 너희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냐!’

무엇을 노리기에.

무엇을 원하기에.

어째서 감옥에서 죽은 데이븐을 허상의 대악마로 기록하였고, ‘이능검격’을 카진의 것이라 하였는가.

아슬란은 왜 카진의 친구로 기록되었으며 아덴카를 남기며 대악마의 재림을 예언했는가.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3급 서고에 답은 없겠지.’

비밀이 담겨 있기에 3급 서고는 너무 급이 낮은 서고였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해내기로 했다.

‘자야 해.’

이 몸은 온전치 못했다.

진검회동 때 큰 힘을 소모했고,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잠이 오질 않았으나 억지로 잠을 청했다.

밤이 깊어갔다.

* * *

칸과 베르사는 ‘홍련’을 빈첸에게 선물했다는 사실을 공표하지는 않았다.

아직 그 소문은 나지 않았으나, 그래도 빈첸이 어마어마하게 변했다는 사실 자체는 유명했다.

방계의 신성인 레반 아덴카를 압도했다는 소식이 이미 가문 전역에 퍼진 상태.

그러나 아직 그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윌슨. 나 없는 동안 공자님께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세리는 윌슨부터 다그쳤다.

그녀는 하얀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여인이었다.

나이는 26세.

지금은 몰락한 ‘히슬리가’의 여식이었다.

빈첸이 태어나면서부터 배정된 직속 시녀였고 반쯤은 유모이기도 했다.

“어우, 내가 뭐, 무례하고 무식하고 그런 사람인 줄 알아?”

“공자님께 함부로 대하잖아. 내가 한두 번 본 줄 알아?”

“헹, 나는 그런 적 없는데.”

그러고서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야말로 빈첸 공자님이 그렇게 함부로 대했는데 왜 맨날 공자님 편 들어? 그러니까 누나가 호구 소리 듣는 거지.”

“윌슨!”

“아, 아오, 알았어, 알았어. 소리 지르지 마. 귀 아파.”

“됐고. 공자님은 어디 계셔? 돌아왔다고 인사 드려야지.”

“공자님에 대한 소문은 아무것도 못 들은 거야?”

“무슨 소문?”

세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혹시 편찮으셔?”

윌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튼튼하셔.”

“그럼? 로아 공녀한테 괴롭힘이라도 당했어?”

“누나. 말조심해. 로아 공녀라니. 로아 공녀님이지.”

“빈첸 공자님을 맨날 빈첸 공자라 부르던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시더라?”

“그 윌슨은 죽었어. 시체라고.”

윌슨은 흐흐 웃었다.

“아마 누나도 보면 깜짝 놀랄 거야.”

“왜? 무슨 큰일이 있는 건 아니지?

“큰일이라면 큰일이지.”

“아오, 답답해. 공자님 어디 계셔?”

“3급 서고.”

세리가 눈을 크게 떴다.

‘3급 서고라고?’

빈첸은 혼자서 그곳에 갈 수 없다.

그게 아덴카의 규율이었다.

“어떻게 그곳에 계셔?”

“누나가 직접 느껴봐. 후후.”

윌슨은 의미심장하게 웃은 뒤 손을 흔들며 멀어졌고, 세리는 황급히 3급 서고를 향해 뛰어갔다.

* * *

3급 서고 앞.

3급 서고는 별채보다 훨씬 큰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입구는 백색검대 소속 무인들이 순번을 정해 보초를 섰는데, 오늘은 공교롭게도 진검회동의 중재를 맡았던 제론이었다.

그리고 제론은 세리를 제법 귀여워하기도 했다.

“제론 경. 혹시…… 저희 공자님이 정말로 여기에 오셨나요?”

세리는 윌슨의 말을 반만 믿었다.

장난치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빈첸이 3급 서고에 올 리는 없으니까.

“빈첸 공자님 말이냐?”

“네. 저희 빈첸 공자님이요.”

“공자님은 2시간쯤 전에 들어가셨어.”

“……정말이었군요.”

“왜 그러느냐?”

“공자님이 어떻게 서고에 출입하신 거예요?”

제론은 허허- 하고 웃고 말았다.

‘소문을 못 들었구나.’

슬며시 장난기가 일었다.

“어떻게 들어가긴. 스스로 걸어 들어가셨지.”

“공자님은…….”

“그래. 심상을 맺지 못하시지.”

“그런데 어떻게 들어가신 건가요?”

“마침 저기 나오시는구나.”

도서관의 문이 열리고 한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부터가 이전에 세리가 알던 빈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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