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1화
빈첸은 그다지 위축되지 않은 모양새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숨 막히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 압박감이 실제적인 물리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두려움만 극복할 수 있다면 이런 기운은 그다지 해가 되지 않는다.
무해한 기운에 겁을 집어먹는다는 건 빈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적인 만남이라 확신하느냐?”
“네.”
빈첸이 뒤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라 칭하셨거든요.”
베르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잘 알아차렸구나.”
베르사는 진심으로 빈첸이 궁금했다.
빈첸은 가주를 움직여 진검회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그 과정에서 예산착복을 언급했고, 그에 따라 시종장이 직접 칸을 찾아와 요청했다.
시종장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가주도 진검회동을 참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르사의 예리한 눈썰미가 빈첸을 훑어보았다.
“조력자가 생긴 건 아닌 것 같아요.”
“사도의 가능성은?”
“일단은 없어 보이네요.”
거인 베르사 헬라임.
그녀는 한때 사도를 따르는 ‘악마 추종자’로 통칭되는 흑마법사들과 악(惡)기사들을 토벌하는 사신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사도를 익힌 자들 특유의 기운은 없어요. 당신의 말씀대로, 빈첸은 스스로의 무예로 레반의 팔을 잘랐어요.”
빈첸은 왠지 모르게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거대한 눈이 자신의 몸을 훑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도 베르사의 ‘특성’과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했는데 그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게 적의는 없어.’
적의가 있었다면 진실을 날조했을 것이다.
사도를 익힌 악마의 자식이라고.
“그렇다면 어떤 무예였을까요? 심상을 맺지 못한 빈첸이 목검으로 2성 무인의 팔을 잘랐다라.”
빈첸은 직감했다.
이 자리에 초대한 사람은 칸이 아니라 베르사였다.
베르사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
“기록된 바 영웅왕의 검술과 비슷하군요.”
“어머니, 영웅왕이 이러한 검을 사용하였나요?”
“그래. 그는 기이한 검로를 만들어 모든 사악한 이능을 집어삼켰다고 기록되어 있지.”
어느새 베르사는 칸의 옆에 섰다.
이 상황은 이미 약속된 상황인 듯, 베르사가 자연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검이야말로 대악마 데이븐을 토벌할 수 있는 검이라고 전해진단다.”
빈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과거가 왜곡된 수준이 아니라 날조되었다.
“초대가주께서는 언젠가 대악마 데이븐이 재림할 것이라 예언하셨지. 네가 익힌 검은 대악마를 토벌할 수 있는 검과 비슷한 원리를 지닌 것 같구나.”
빈첸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역사가 날조된 건 어찌어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덴카는 아슬란이 나를 위해 만든 가문이고. 내가 재림할 것을 예언했다.’
그렇다는 말은,
아슬란은 빈첸의 환생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되었다.
베르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 검술은 어디서 익힌 것이니, 아들아?”
율리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거짓말은 안 돼요.
율리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많은 심계를 꾸미고 모략을 꿈꾸던 아이였으나, 어린아이인 것도 맞았다.
율리안은 베르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진실을 판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모략가인 율리안에게는 상성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대였다.
율리안이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빈첸이 가볍게 웃었다.
‘두려움은 막상 극복하고 나면 별거 아니다.’
한 번 넘어서기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넘어서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간 해왔던 걱정이나 두려움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그 한 번이 어려울 뿐.’
외팔이 데이븐은 그러한 경험을 많이 해왔다.
“계시를 받았습니다.”
“계시? 넌 아무런 가호도 없지 않느냐?”
빈첸은 잠시 침묵했다.
‘극복하거라.’
율리안이 스스로 극복해야 했다.
두려움은 스스로 극복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가호 없이 계시를 받는 방법이 물론 존재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방법은 대부분 사도이며, 때로는 흑마법이 동원된다. 물론, 너는 그런 사이한 방법을 익히지 않았을 것이라 믿지만.”
“…….”
빈첸이 입을 다물자 베르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왜 말을 잇지 않느냐?”
“…….”
“의심스럽게 구는구나. 신성재판에 회부라도 되고 싶은 것이냐? 그도 아니면 제라미엘의 심판관들 앞에 서고 싶은 것이냐?”
율리안은 이 망할 영감탱이!
라고 외치고서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들려요. 의심스러우시다면 신전을 통해 확인해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목소리가 들립니다. 의심스러우시다면 신전을 통해 확인해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빈첸이 품에서 기적석을 꺼내 들었다.
“만약 제게 대악마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느껴졌다면, 기적석을 든 3급 신관 정도면 읽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건 기적석 아니냐?”
“네. 둘란 신관이 제게 선물해 주었어요.”
기적석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베르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말 계시를 통해 검을 익혔다는 것이냐?”
“계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검술을 사사받지는 않았습니다.”
“하면?”
“저는 오래전부터 신비한 검로를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검로를 익혀야 하느냐를 여러 날 고민했습니다. 그사이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빈첸의 몸과 데이븐의 몸.
둘의 진실이 조금씩 교묘하게 섞였다.
“그리고 저는 마침내 판단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발전은 없다. 수많은 의심을 사더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비겁하다. 무엇인가를 보여야겠다. 그것이 무인으로서 옳다. 그래야 사미온을 넘어설 수 있으며. 아덴카의 오랜 사명에 동행할 수 있다.”
빈첸이 가볍게 웃었다.
‘거봐. 하면 되잖아.’
율리안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 검로를 수많은 혈족들과 무인들.
“저는 이 검로를 수많은 혈족들과 무인들.”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 선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 선보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라면 옳은 눈으로 판단해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면 옳은 눈으로 판단해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전은 이미 공증하였으니 남은 판단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이제는 가주 칸이 입을 열 차례였다.
* * *
베르사는 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턱을 쓰다듬고 계시는군요.’
베르사만 알고 있는 칸의 습관 중 하나였다.
흡족한 상황에서 턱을 두어 번 쓰다듬는 것.
베르사도 오랜만에 보았다.
그만큼 빈첸이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소리였다.
“둘란 신관이 어떠한 말을 해주었느냐?”
“그의 신상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해주었습니다.”
“그렇군.”
율리안이 둘란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것 이상으로, 칸은 둘란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아덴카와 가이아 신전은 밀접한 친분관계가 있으며, 차기 대신관의 유력후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이번 친선교류회에 둘란을 초빙한 것이기도 했고.
빈첸의 말대로, 신전의 공증은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판단을 내리마.”
이미 판단은 내려져 있었다.
친선교류회에 모인 무인들 앞에서 ‘훌륭한 무예’라고 표현했었다.
“네 무예를 갈고 닦아라.”
“감사합니다.”
베르사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영웅왕 카진의 검은.”
세상은 저 특이한 형태의 검이 영웅왕 카진의 검이라고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악마 데이븐의 검술이었던 사검과 닮아 있다는 걸 당신도 알고 계시겠지요.”
대중에게까지 전해진 정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선 이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영웅왕 카진이 대악마 데이븐을 토벌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검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까지 있을 정도였다.
“빈첸의 검이 영웅왕의 검이어도 문제이고.”
그 검은 사미온의 검이다.
빈첸의 검이 영웅왕의 검이라면, 아덴카가 사미온의 검을 도둑질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딱 좋았다.
“데이븐의 검이면 더욱 문제이지요. 그 검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수많은 아이들의 심장을 제물로 바쳐 만들어낸 사검(死劍)입니다.”
이러나저러나 아덴카 입장에서는 그리 좋지 않은 검술이었다.
“모두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칸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부인이 말한 것들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베르사는 아덴카의 2인자로서 할 일은 모두 했다.
모든 말을 듣고서 가주가 결정하였으니, 베르사도 가주의 말을 따라야 했다.
베르사가 빈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주께서 인정하셨으니 이제 모든 것은 가주께서 책임질 거란다. 그러니 빈첸, 너는 최선을 다해 정진하여 가주께 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베르사는 일부러 빈첸 앞에서 육성으로 모든 사실을 언급했다.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아덴카 가주의 보증을 받아내 주기 위함이었고, 실제로 칸이 직접 빈첸의 검을 보증해 주었다.
그 모든 것을 인정해 주는 최후의 발언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한편, 율리안은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지러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었고, 아버지께 인정을 받았다.
가문의 2인자인 어머니 역시 자신을 좋게 보고 있는 듯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나는 전혀 안 기쁘다. 전혀. 하나도. 안 기뻐.’
하나도 안 기쁜데.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체여서 다행이었다.
칸이 입을 열었다.
“너는 진검회동에서 매우 훌륭한 성취를 보여주었다, 빈첸.”
칸은 아들을 식당이 아니라 서재로 불렀다.
식당보다는 공적인 공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덴카 직계로서의 격을 증명하였다.”
칸도 보았다.
마지막 순간.
빈첸이 자신의 기적석을 내어주던 그때,
무가(武家)의 일원들이 보내는 빈첸에 대한 경의를.
자신의 기적석을 거리낌 없이 내어주던 빈첸의 모습은 많은 무인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그러므로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마. 무엇을 원하느냐?”
율리안은 크흠,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그럼 이제 원하는 것을 한 번 말…….
“강함을 원합니다.”
-영감님?
“강함을 원한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칸의 입가에는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강함을 원한다니.
아들의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루어줄 수 있는 것 중에 말해보아라.”
-서고! 서고에 입장하고 싶다고 해요.
“가문의 서고에 입장하고 싶습니다.”
가문에는 도합 4개 등급의 서고가 존재했다.
1급, 2급, 3급 서고.
그리고 비밀서고.
3급 서고가 최하위 등급의 서고였는데 아덴카의 소속이면서 3성 이상의 무인이면 출입이 가능했다.
다시 말해 3개의 심상을 맺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게 원칙이었다.
“심상을 맺었느냐?”
“맺지 못하였습니다.”
칸은 잠시 빈첸을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고서 입을 열었다.
“3급서고까지 출입을 허가하겠다.”
원리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칸이 원리원칙을 깼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말했다.
“베르사. 빈첸에게 홍련을 하사해 주시오.”
홍련(紅蓮).
가주 칸이 어린 시절 사용했었던 검이었다.
“그것이 나와의 약속을 지킨 대가이다.”
율리안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이었다.
-호, 홍련이라고요? 호오오옹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