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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0화 (10/184)

환생의 정석 10화

율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2급 신관의 명패가 좋은 거냐니요!

율리안은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이었다.

-위급 상황에 2급 이하의 신관을 응급으로 호출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건 크게 감흥이 오지 않았다.

보니까 팔도 못 붙이던데.

-아무런 절차 없이 신전에 몸을 위탁할 수 있는 명패에요.

신전은 치외법권이었다.

범죄를 저질러도 군대를 포함한 모든 무인집단은 신전에 강제로 침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마탑을 제외한 그 어떤 영지를 가더라도 존중을 받아요. 특히 가이아처럼 거대한 교단을 가진 신전이면 모든 곳의 귀빈으로 대접받을 수 있어요. 신관의 치료도 무한정 요구할 수 있고요.

“내 스스로가 귀빈이 되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곧 나의 명패고, 내가 곧 나의 신분이다.

무인의 세계는 그러했다.

남의 위세를 빌려 귀빈이 되는 것은 빈첸의 가치관에 맞지 않았다.

-어련하시겠어요.

율리안은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건 프리패스 신분증이기도 해요. 2급 신관의 진정한 벗이라는 뜻이니까요.

신관은 수가 적고 희귀하다.

기적을 이행하는 자였고, 모든 사람들의 존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게다가 실력을 숨겨서 대외적으로는 3급 신관이잖아요. 대신관 후보들은 일부러 그러한 과정을 거쳐요. 이목을 끌지 않음과 동시에 다른 후보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대신관이 대단한 거야?”

500년 전에는 대신관이라는 직책이 없었다.

-당연하죠! 전 교단을 통합하여 다스리는 절대 권력자인데요!

그런가.

빈첸은 나무패를 살펴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이 명패에 꽤 큰 의미가 서려 있는 듯했다.

“어쨌든, 네 말이 맞구나.”

율리안이 말했었다.

자기를 믿어달라고.

그리고 결과가 보여주었다.

기적석 하나를 사용하였더니, 신관의 나무패와 기적석 하나가 다시 생겼다.

-거봐요, 제 말이 맞죠?

빈첸은 율리안의 얘기를 들으며 허- 하고 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율리안은 아주 오래전부터 훗날 함께 손을 잡아야 할 신관이 누구인지를 추리고 또 추렸다고 했다.

그 목록 중에 가이아의 둘란도 있었다고 했다.

둘란이 어떻게 행동할지, 율리안은 이미 알고 있었단다.

빈첸 입장에서는 율리안이 굉장히 신기했다.

칭찬 한 마디를 건넸다.

“꽤 훌륭했다.”

-예?

더 이상 똑같은 칭찬을 해주지 않았다.

율리안의 감정이 느껴졌다.

‘기뻐하고 있군.’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칭찬에 꽤 목이 말라 있는 것 같았다.

저런 걸 보면 귀여운 구석도 있는 녀석이었다.

-안 기뻐하는데요?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동조율이 높아진 모양이에요.

그만큼 율리안의 감정이 더욱 잘 느껴졌다.

‘기뻐하잖아.’

-안 기쁘다니까요? 영감님의 칭찬 같은 건 제 마음을 일절 기쁘게 할 수 없어요.

‘그럼 그런 걸로 하자.’

율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시간이 흘렀다.

빈첸이 잠에 빠져들기 직전, 율리안이 다시 말했다.

-진검회동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 사람은 역시 둘째 누님인 데이아 누님이에요. 그 날, 유일하게 아버지가 데이아 누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어요. 아버지의 저녁에 단독으로 초대된 유일한 혈육이고요.

칸은 늘 혼자서 저녁을 먹었다.

그래서 칸의 저녁 식사에 초대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저는 오늘 아버지의 초대장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확률은?”

-반반.

빈첸이 피식 웃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자기는 글렀군.”

자리에서 일어서서 옷장 쪽으로 향했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뭐하세요?

“네가 그리 말하였으니, 네가 말한 대로 될 것이 아니냐?”

빈첸 나름대로 율리안을 향한 신뢰를 보여주는 행위였다.

율리안은 괜스레 민망해졌는지 침묵하다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러다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려고.

“그럼 실컷 비웃어주마.”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윌슨이 허겁지겁 달려와 방문을 두드렸다.

“공자님, 공자님, 공자님!”

“들어와라.”

문이 벌컥 열렸다.

윌슨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 올라있었다.

거친 숨을 헥헥! 몰아쉬었다.

“왜 이리 호들갑이냐?”

“가, 가주께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하십니다.”

저녁 식사 초대가 아니었으나 어쨌든 빈첸을 불렀다.

빈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봐라.”

“예?”

“아무것도 아니다. 안내해.”

“아니, 공자님, 가주께서 부르셨다니까요? 직접?”

“그래서 가려 하지 않느냐?”

빈첸의 복장은 이미 단정했다.

마치 모든 것을 예상한 사람처럼.

“아니. 반응이 그게 끝인가요? 예상하고 계셨어요?”

“…….”

“진짜 예상이라도 하신 건가요?”

“그래.”

“어떻게요?”

“안내를 할 거냐, 질문을 할 거냐?”

“아, 맞다, 안내. 안내. 안내하겠습니다, 공자님. 헤헤.”

윌슨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리는 여우처럼, 그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복도를 걷다가 한 시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대답했다.

“그래. 맞아. 이분이 진검회동의 진정한 우승자시지. 나는 그분의 시종이고. 엣헴.”

시녀는 벽에 찰싹 달라붙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 시녀는 빈첸이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때 비웃었던 시녀였다.

-시선들이 엄청 바뀌었네요.

율리안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아직 멀었어.’

이제 겨우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었다.

못난이 빈첸은 별채를 벗어나 당당히 본관으로 향했다.

* * *

빈첸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밤공기가 굉장히 차가웠다.

‘소나무 향인가.’

나무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내음에 빈첸은 기분이 좋아졌다.

지하감옥의 꿉꿉한 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넓기는 정말 넓단 말이야.’

아덴카가는 거대가문이었다.

가문 안에 강과 산이 있고 광활한 영지가 있으니 가(家)보다는 성(城)이 훨씬 어울리는 표현이리라.

현대에 이르러서는 아덴카가의 영향력이 끼치는 영토 전부를 일컬어 ‘아덴카가’로 통칭하기도 했다.

“이동관문을 이용하실 건가요, 걸으실 건가요?”

이동관문은 현대 마도공학의 산물이었다.

‘놀라운 세상이야.’

500년 전에는 최소 5개 이상의 고리를 가진 마법사들만 구동할 수 있었던 ‘워프’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되다니.

충격적인 발전과 변화였으나, 빈첸은 걷고 싶었다.

“걸어가지.”

풀벌레 소리도 듣기 좋았다.

발에 밟히는 흙과 자갈의 느낌도 좋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입이 근질근질했던 윌슨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공자님. 뭐 하나만 물어보면 안 돼요?”

“안 된다면 안 물을 것이냐?”

“그럼 못 묻죠.”

윌슨은 풀이 죽고 말았고, 빈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생긴 건 소도적같이 생겼고 덩치도 컸는데 눈망울이 꽤 순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순해졌다.

“그럼 묻지 마.”

“네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입술을 옴짝달싹하는 것이 궁금해 죽겠는 표정이었다.

“물어봐라.”

“진짜요?”

축 처졌던 윌슨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속마음을 하나도 못 숨기는 녀석이었다.

“그래.”

“혹시 절단 특성을 갖고 계세요? 사람들이 그러던데.”

“아니.”

“예리하게 자르는 것에 유리한 특성은요?”

“없다.”

“진짜 없어요? 속이시는 거죠?”

윌슨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심의 눈초리였다.

“눈빛이 불손한데.”

“헤헤, 제가요?”

윌슨이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저는 공자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시종이잖아요, 헤헤.”

“전에는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그런 등신이 있었단 말입니까?”

“뻔뻔하구나.”

“앞으로 평생 공자님 수발들면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그럼 저한테만 사실을 알려주면 안 될까요?”

“그럴까?”

빈첸이 손짓했다.

윌슨은 눈을 크게 뜨고 잔뜩 긴장한 채 허리를 숙였다.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자, 빈첸이 작게 말했다.

“무예였다.”

윌슨은 크게 실망했다.

“왜? 실망했느냐?”

“그러니까, 가호나 특성은 없는 거죠?”

“그래.”

윌슨은 아쉬워했다.

빈첸에게 가호나 특성이 있기를 바란 모양이었다.

빈첸은 또 피식 웃고 말았다.

확실한 건, 적어도 이 녀석은 뒤통수를 칠 위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걱정 마라. 가호나 특성이 없어도 훌륭한 무인이 될 수 있으니.”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더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윌슨은 앞장서서 걸었다.

그의 발걸음이 또 가벼워졌다.

빈첸의 말을 곱씹었다.

생각해 보니 빈첸의 말이 맞았다.

가호나 특성 없이 훌륭하게 성장한 최초의 무인.

‘아, 개 멋있어. 졸라 멋있어!’

시종하길 잘한 것 같았다.

* * *

본관은 거대했다.

정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빈첸을 발견할 때마다 허리를 숙였고, 빈첸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그들의 인사를 자연스레 받아주었다.

윌슨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어깨를 가장 넓게 폈다.

복도 구석에 위치한 이동관문에 섰다.

이동관문을 조정하는 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가 마나석에 손을 대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도착지는 7층, 가주님의 개인 서재입니다.”

황금색 마법진에서 마나가 피어올라 빈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빈첸은 자신을 옭아매는 마나에 몸을 맡겼다.

‘신기하구나.’

기이한 감각이었다.

몸이 사라졌다가 재정립되는 느낌.

‘좀 어지럽기도 하고?’

500년 만에 접한 신문명은 그야말로 신문명이었다.

몸이 약간 간지럽기도 했다.

‘이게 워프라는 건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촌스럽게 왜 그렇게 신나 해요? 표정관리 좀 할 수 없어요?

팟!

주변이 밝아졌다.

7층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여성의 목소리였다.

여자의 얼굴을 보자 빈첸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머니.”

빈첸의 친어머니는 빈첸을 낳다가 돌아가셨다.

눈앞의 이 여자는 빈첸의 이복 어머니.

현 아덴카의 실질적 2인자라 할 수 있는 ‘베르사 헬라임’이었다.

“그래. 진검회동에서 굉장한 성취를 보여주었다지?”

“감사합니다.”

베르사의 검은색 눈동자가 빈첸을 향했다.

“겸양을 떨지 않는구나.”

“지나친 겸손은 가주의 인정을 부정하는 것이니까요.”

“옳은 생각이다.”

베르사의 붉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따라오너라. 네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니.”

베르사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체구는 굉장히 작았으나 느껴지는 존재감은 거대했다.

-거인(巨人) 베르사 헬라임. 현역 때는 어마어마했던 무인이었다고 해요. 지금은 아덴카의 대소사를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는 분이세요. 어머니께서 직접 나오셨다는 건 꽤 큰일이라는 의미에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이냐?’

-분명 이유가 숨겨져 있을 거예요.

베르사가 거대한 문 앞에 오른손을 대었다.

그녀의 마나와 감응한 문이 스르르- 열렸다.

거대한 문의 크기와 달리 가주의 서재는 비교적 단출했다.

“빈첸을 데려왔어요.”

벽면을 가득 채운 책.

저만치 앞에 보이는 커다란 창.

그 앞에 놓인 오래된 책상.

책상 앞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칸이 보였다.

머리카락은 모조리 하얗게 새어버렸으나 늙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눈빛이 생생했다.

강인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빈첸에게 향했다.

‘호흡하기가 힘들군.’

숨 막히는 압박감.

이 압박감은 칸이 일부러 연출한 것이리라.

원하는 것은 하나일 터.

낮에 보였던 모습이 진짜인지 아닌지.

연기였는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한 압박감일 터였다.

빈첸이 말했다.

“아들과의 사적인 만남에서 일부러 압박감을 형성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당돌함이었다.

서재에서 눈치를 살피던 시종들의 얼굴이 바짝 굳었고, 베르사의 얼굴에는 희미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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