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9화 (9/184)
  • 환생의 정석 9화

    대외적으로 둘란은 아덴카의 진검회동을 위하여 초빙된 3급 신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가이아의 2급 신관이었으며, 다음 세대 유력한 대신관 후보 중 하나였다.

    전략적 선택으로 지금은 잠시 몸을 웅크리고 실력을 숨기고 있는 젊은 신관.

    가이아 신전에서 비밀리에 육성하고 있는 비공식적 신성.

    그런 그가 레반의 팔을 붙이는 것에 실패했다.

    ‘안 되잖아?’

    레반의 팔이 회복되질 않았다.

    목검에 당한 상처에는 기이한 권능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자신의 신성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힘이었다.

    “제 능력으로는 회복이 어렵습니다.”

    강제로 무릎 꿇린 상태의 찰스가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 신성력이 통하지 않습니다.”

    혈족들은 웅성거렸다.

    3급 신관이면 신관 내에서도 굉장히 높은 신관이었다.

    그런 그가 어째서 단순한 절단을 치료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보다 상급 신관을 호출할 수도 없다.

    시간이 지체되면 2급 신관이 아니라 1급 신관이 와도 절단된 팔을 붙이지 못한다.

    이대로면 레반은 오른팔을 영영 잃게 될 것이었다.

    빈첸으로서도 이건 생각하지 못했다.

    ‘왜?’

    500년 전의 3급 신관은 이 정도 상처는 쉽게 회복시켰었다.

    ‘이상한 일이군.’

    빈첸의 감상은 거기서 끝났다.

    빈첸의 입장에서 레반은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나마 시대가 많이 좋아져서 이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그런데 율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형님한테 주어질 기적석 있잖아요. 그걸 쟤한테 하사해 주세요. 아덴카의 기적석은 가이아 신관의 신성력과도 아주 큰 반응을 보여요.

    빈첸은 율리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혼자였다면 내가 성취한 보상을 넘기는 미련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율리안의 확신이 느껴졌다.

    지금의 작은 손해가 더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한 번은 믿어보마.’

    빈첸이 둘란 앞에 서서 물었다.

    “기적석을 사용해도 회복이 불가능한가요?”

    “그건…….”

    둘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번 의뢰를 완수하고 나면 기적석을 받기로 했다.

    차세대 대신관 후보라 할 수 있는 가이아의 신성이 이번 의뢰에 파견된 이유이기도 했다.

    ‘내게 주어질 기적석을 사용하라는 건가?’

    왠지 그 기적석을 빼앗길 것만 같은 기분에 흔쾌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걸로 대답은 충분하군요.”

    빈첸은 웅성거리고 있는 혈족들을 한 번 둘러보고, 아버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레반의 오른팔을 잘라낸 것은 저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매듭을 지어보겠습니다.”

    칸의 시선이 빈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빈첸이 보여주는 모습은 계속해서 기대 이상이었다.

    과연 못난이 빈첸이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증이 일었다.

    칸이 고개를 끄덕이자 빈첸이 찰스 앞으로 걸어갔다.

    “레반 아덴카는 무인의 장소에서 저를 모욕하고 비웃었습니다.”

    찰스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자신이 굴욕적인 상황에 처한 것보다, 아들이 영영 오른팔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

    가주 칸이 상황을 빈첸에게 맡겼으니 지금 찰스가 의지할 사람은 빈첸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내가 교육을 잘못했다. 진심으로 반성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 테니 부디 용서해다오.”

    “모든 것은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빈첸은 땅에 떨어져 있던 장검을 찰스에게 쥐어주었다.

    “무인다운 반성을 보이십시오. 그러면 제게 주어질 기적석을 사용하여 레반을 치료하겠습니다.”

    “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우리는 무인입니다.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방법은 없습니다.”

    “…….”

    “누군가의 오른팔을 위하여 또 다른 오른팔이 필요하겠지요.”

    빈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레반은 침묵하고 있었다.

    ‘한심한 놈.’

    자신이 레반이었다면 저러지 않았을 거다.

    내 잘못은 내가 감당한다.

    내가 져야 할 책임은 내가 진다.

    비겁하게 나이 뒤에 숨지 않는다.

    내 팔을 위하여 아버지의 팔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빈첸이 생각하는 무인이었다.

    ‘제 아버지의 오른팔을 희생시켜서라도 회복을 원하는 것이냐. 그렇게 오른팔을 지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땅에 진정 무와 예와 효는 사라졌단 말인가.

    지난 500년간 도대체 세상이 얼마나 변한 것인가.

    그러나 500년간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조, 좋다. 내, 내 팔을 바치겠다.”

    그건 부정(父情)이었다.

    찰스가 왼팔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는 굳게 결심했다.

    아들의 팔을 위해서 내 팔 정도는 희생해도 된다고.

    빈첸은 무표정한 얼굴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방향은 틀렸으나 마음은 진심인가.’

    부모는 제 아이를 사랑한다.

    빈첸은 경험해 본 적 없긴 했지만, 레반처럼 한심한 놈도 사랑을 받는 걸 보면 아주 틀린 전제는 아닌 것 같았다.

    “으으……!”

    찰스는 눈에 힘을 주었다.

    그 자신의 오른팔이 눈에 들어왔다.

    몸에 힘을 주었다.

    마나를 끌어 올렸다.

    ‘해야 해.’

    오른팔을 잘라내기로 했다.

    ‘젠장!’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빈첸이 말했다.

    “불상사를 막으라고 했다.”

    그 말과 동시에,

    백색검대 소속 무인 제론이 장검을 튕겨냈다.

    제론의 팔과 부딪친 장검이 반토막 났다.

    빈첸은 반토막 난 장검과 하얗게 질린 찰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 용기를 부디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길 바랍니다.”

    찰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헉헉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로서도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빈첸은 몸을 돌려 상석 쪽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제가 이겼습니다.”

    기적석을 하사하여 달라는 이야기였다.

    많은 이들이 침묵하며 빈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빈첸은 진검회동의 진실된 우승자였다.

    * * *

    아덴카의 직계는 대대로 진검회동의 우승자를 꺾어왔고, 기적석을 획득해 왔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서 빈첸도 기적석을 수여받았다.

    빈첸은 곧바로 하사받은 ‘기적석’을 둘란에게 양보했다.

    “매듭을 지어주십시오.”

    꽈득.

    둘란은 기적석을 깨물었다.

    그의 몸에 새로운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그의 등에 새겨진 ‘치유의 여신’ 가이아의 가호에서 성스러운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치료할 수 있다.’

    신실한 믿음.

    병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자비를 베푸소서.”

    그의 오른손에서 3급 신관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흰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진검회동이 이루어진 대 대련장 전체에 번쩍! 빛이 일었다.

    “그리하여 기적을 내리소서.”

    그의 ‘신언(神言)’대로 기적이 벌어졌다.

    레반의 팔이 스르르 움직이더니 접합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찰스는 체면도 잊고 엉엉 울었고, 레반은 그러한 아버지를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진검회동의 내용은 하나의 폭풍과도 같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으나 가장 커다란 주제는 하나였다.

    -빈첸 공자가 변했다.

    단순히 변한 수준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빈첸의 직속 시종인 윌슨은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멋이 폭발하셨다, 진짜로.”

    윌슨은 빈첸의 흉내를 내었다.

    “그 용기를 부디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과 감탄! 크으. 그때, 사람들 표정을 너희가 봤었어야 했는데.”

    심지어 가주 칸이 칭찬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 나이에 가주님께 칭찬받은 직계가 없었대.”

    “근데 왜 윌슨 네가 으스대냐?”

    “내가? 아닌데? 난 으스댄 적 없는데?”

    윌슨은 금세 정색하며 자신은 그런 적 없다 부정했으나 그는 이내 빈첸의 모습을 또 떠올리고 말았다.

    ‘도대체 공자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람.’

    며칠 전부터 이상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 정도 사고를 쳐버릴 줄은 몰랐다.

    ‘멋있잖아, 젠장.’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도 티는 내지 말아야지.’

    한편, 진검회동이 끝난 그날 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빈첸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

    “정식으로 소개하죠. 가이아 신전 소속 3급 신관 둘란입니다.”

    “여긴 어쩐 일이신지?”

    둘란은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는지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이곳에는 저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안심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빈첸은 둘란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큰 결심을 한 것 같았다.

    빈첸은 저런 눈빛을 좋아했다.

    “앉으시지요.”

    “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둘란이 작게 말했다.

    “저는 사실 3급 신관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가이아 신전회를 통하여 2급의 자격을 부여받은 신관입니다.”

    “그래요?”

    별 감흥은 없었다.

    3급이든 2급이든, 어차피 잘린 팔 하나 못 붙이지 않는가.

    이 시대의 사람들이 붙여놓은 ‘급’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한편 둘란은 빈첸의 담담함을 오해했다.

    ‘다른 이들과 완전히 다르다.’

    보통 2급 신관쯤 되면 기적을 행사하는 신관으로 알려져 있다.

    2급 신관과 어떻게든 연을 만들려는 자제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빈첸은 달랐다.

    그가 3급이든, 2급이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오늘 낮에 보여준 진검회동의 주인공다운 태도였다.

    “대외적으로 비밀인 사항입니다.”

    “저한테 그것을 말씀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 어리석음을 깨우쳐준 사람이 공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먼저 저를 내보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가요?”

    빈첸이 의도한 건 아니었다.

    율리안의 말을 믿어주었을 뿐.

    “예. 제 스스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둘란은 오늘 빈첸의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둘란에게도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에게는 신관이 된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었다.

    “처음에는 아픈 사람이 일어나고, 그래서 웃고, 가족들이 행복해하고, 그 모습이 제게 보상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변질되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제게 주어질 기적석이 아까워서, 저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어요.”

    기적석을 획득하고, 그것으로 신성력 수련을 하려고 했다.

    이후 공식적으로 가이아 신전을 뒷배로 삼는 대신관이 되려는 욕망을 품었었다.

    ‘무엇이 중요한가.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왜 신관이 되려 하였는가.’

    그는 오늘 잊고 있던 것을 깨우쳤다.

    “기적석은 빈첸 공자에게도 무척이나 필요한 것이었겠지요.”

    운이 좋은 경우에는 새로운 가호와 특성을 발현시키기도 한다고 했다.

    그게 무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둘란은 알고 있었다.

    “그걸 스스럼없이 내어준 공자의 모습에 저는 초라해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품속에서 자그마한 돌 하나를 꺼냈다.

    오색찬란한 빛을 내고 있는 그 돌은 빈첸이 낮에 받았던 기적석과 똑같은 것이었다.

    “초심을 잊고 있었습니다. 시간에 삭아버린 소중한 것을 돌려주어 고맙습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둘란이었다.

    “그러나 제가 그것을 받는 것이 오히려 신관님을 존중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기쁘게 받겠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갑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빈첸 공자.”

    빈첸에게 기적석을 건네준 뒤, 빈첸의 손을 맞잡았다.

    “기억해 주십시오, 제 이름은 둘란입니다.”

    악수를 끝낸 둘란이 품속에서 나무패 하나를 꺼냈다.

    둘란의 이름이 박힌 나무패였다.

    “훗날, 언젠가 가이아 신전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이 패를 보이세요.”

    “그럴게요.”

    무려 2급 신관의 패를 받았는데도, 빈첸은 담담해 보였다.

    그 모습조차 둘란에게는 충격을 주었다.

    빈첸은 다른 것이 아닌 오로지 무학에만 관심이 있는 아이처럼 보였으니까.

    빈첸을 보며 초심을 되찾았다.

    “많이 배우고 돌아갑니다.”

    “살펴 가세요.”

    둘란이 돌아가고 난 뒤, 빈첸이 물었다.

    “율리안 근데 이거, 좋은 거냐?”

    500년 전에는 이런 게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