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7화
찰스 아덴카.
그는 촌수를 따지기조차 어려울 만큼 먼 아덴카의 방계였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들아. 네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
그의 집안은 가난했으며 아들에게 모든 기대와 희망을 건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들아. 네가 우리 집안의 희망이다.”
다행히 그의 아들은 ‘소인왕(小人王)’의 가호를 타고났으며, 무인에게 적합한 육체 강화계열의 ‘철인’ 특성을 발현시켰다.
그는 단단한 몸을 바탕으로 고된 수련을 이어갔고 꽤 높은 성취를 보여주었다.
“이번 진검회동의 직계는 빈첸 아덴카.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다. 500년 유구한 역사 속에서, 직계를 무너뜨린 유일한 방계가 될 것이다. 알겠느냐? 반드시 기적석을 차지하거라.”
“물론입니다.”
레반 아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제 아버지를 욕보였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직계라는 것만 믿고 제 앞에서 함부로 설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줄 것입니다.”
진검회동은 본관의 ‘대(大) 대련장’에서 펼쳐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가주 칸이 직접 참여했다.
레반 아덴카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주께서 직접?’
이 진검회동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자신이었다.
‘나를 보러 오신 거다! 인생 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거야.’
진검회동은 토너먼트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토너먼트의 우승자는 아덴카의 직계와 진검회동을 치르게 된다.
마지막 순간.
빈첸의 끝만 화려하게 장식하면 진검회동의 진정한 주인공은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체력을 안배할 필요도 없겠군.’
빈첸을 무너뜨리는 것.
그건 아주 쉬운 일이이었다.
* * *
이번 진검회동에는 24개의 무가가 참여했다.
빈첸은 무인들의 진검회동을 구경했다.
‘대부분 1성의 무인. 그리고 저놈이 2성.’
저들 대부분이 열넷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뛰어난 성취인 것은 맞았다.
500년 전 열네 살들은 초반 성장이 매우 느렸으니까.
‘성장 속도’ 자체만 놓고 보면 모두가 타고난 천재들이었다.
‘그러나 무학에 깊이가 전혀 없다.’
빈첸은 저 나이에 목검을 수십만 번 휘둘렀다.
그러나 지금의 열네 살들은 그러한 기본적인 수련을 게을리 했다.
특성을 더욱 발전시키고 강화하는 것이 대부분의 수련 방식이었다.
‘그야말로 기술의 시대가 되었구나.’
저들의 움직임에는 인고의 과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이 계산해놓은 정답지 위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저토록 말도 안 되는 전략을 들고 나왔지.’
빈첸의 눈이 레반 아덴카를 향했다.
레반 아덴카는 방어는 생각하지 않은 공격 일변도의 검으로 방계 일족 중 한 명을 쓰러뜨렸다.
여러 번 상대의 공격을 허용했으나 ‘철인’ 특성 때문에 입은 부상은 미비했고 압도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는 검을 갈무리하고서 가주 칸이 앉은 상석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지금은 모든 것이 통제된 환경이니 저런 식의 대련이 가능하겠다만.’
그가 생각하는 대련은 실전의 연장선이었다.
모든 것이 안전하게 통제된 지금의 대련은, 대련이 아니라 소꿉놀이였다.
‘실전에서 저러면 목 잘리기 딱 좋지.’
검을 든 무인은 어린아이를 상대할 때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검에 대한 예의이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었다.
방어를 무시한 채 ‘특성’을 믿고 치르는 저 대련방식은, 빈첸에게는 문화충격이었다.
상대의 실력이 조금만 높았어도 ‘철인’ 특성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무학의 대결이 아니라 특성의 대결로 변질된 것인가.’
500년이 흐른 지금, 이 땅에 무학은 사라졌는가.
‘그러나 아버지를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상석에 앉은 가주 칸의 모습은 가히 절대자에 어울리는 기도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 빈첸의 능력으로는 능력을 감히 측량하기 어려웠다.
어느 시대에나 천재는 존재하는 법이고, 방법이 달라졌어도 극의에 이른 무인들은 분명 존재하는 듯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 좋게도 저는 모든 경쟁자들을 이겨냈습니다.”
레반 아덴카.
그가 빈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문의 여러 어른들께서 정하신 법도대로, 저는 제 친우인 빈첸 아덴카와 진검회동의 마지막 관문. 직계검합을 치르려고 합니다.”
아덴카 직계와 검으로 합을 나눈다.
그것이 직계검합이다.
때를 기다리던 빈첸이 일어섰다.
“도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겁을 먹고 벌벌 떨고 있을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빈첸에게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빈첸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내면서도 그다지 위축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그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저는 가주께 약속하였습니다. 아덴카 직계 혈통의 격을 증명하겠다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빈첸 아덴카의 행동은 분명 돌발행동이었다.
빈첸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행동으로 증명하겠습니다. 아들이 부끄럽지 않도록.”
빈첸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윌슨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오른팔로 검을 받아들었다.
흑향목 목검이었다.
“저는 연습용 대련검을 사용할 것이며.”
순간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진검을 든 상대를 목검으로 제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상대가 ‘철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최소 2성 이상 경지의 차이가 있어야만 가능할까 말까였다.
“왼팔을 사용하여 제 먼 혈족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빈첸이 검을 왼팔로 옮겨 쥐었다.
칸은 빈첸의 모습을 큰 감흥 없이 지켜보았다.
빈첸의 태도와 기개는 마음에 들었으나 아직까지는 행동 없는 말뿐이었다.
“또한 세 번의 선공을 양보하겠습니다.”
빈첸이 레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속하지. 나는 그동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목검.
좌수.
후공.
부동.
이 모든 요소를 충족시키며 상대를 꺾으려면 최소 몇 수는 강한 무인이어야 했다.
칸에게 시선이 쏠렸다.
과연 가주가 어떻게 반응할지, 혈족들은 무척 궁금한 듯했다.
찰스 아덴카가 반론을 얘기하려 했다.
이러한 처사는 빈첸에게 패배의 구실을 만들어줄 뿐입니다!
그러나 찰스는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아덴카의 절대자 칸이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 * *
레반의 가슴 속에 천불이 들끓어 올랐다.
‘비겁한 놈. 잘도 핑곗거리를 찾았구나!’
빈첸과 아덴카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그런 핑계 따윈 통하지도 않을 만큼 압도해 주마.’
둘 사이에 젊은 무인 하나가 서 있었다.
가슴에는 하얀 날개를 형상화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백색검대 소속 제론입니다.”
그가 이번 진검회동의 중재자였다.
“두 공자님께서는 준비가 되셨습니까?”
레반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은빛검날의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빈첸이 입을 열었다.
“제론. 그대는 최선을 다하라.”
“예?”
최선을 다하라니.
상대인 레반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중재자인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영 이상했다.
“불상사를 막도록.”
레반이 입술 한쪽을 말아 올리고 웃었다.
작게 말했다.
“왜? 이제 겁이 나냐?”
그러니 중재무인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언질을 주고 있지 않은가.
불상사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아덴카의 겁쟁이다운 태도였다.
“검을 들어, 겁쟁이.”
“아니. 세 번의 공격을 양보한다고 했다.”
빈첸은 왼팔에 쥔 목검을 자연스레 내려 쥐었다.
분노와 모멸감에 휩싸인 레반은 빈첸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 검이 잘난 허세만큼이나 대단한지 보겠다.”
빈첸과 레반의 진검회동이 시작되었다.
* * *
율리안이 기록해놓았다.
[첫 공격은 짧은 찌르기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
레반의 자세를 보아하니 찌르기가 맞았다.
하체에 힘이 집중되는 것이 보였다.
그 나름대로 검격을 조절하며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디뎠다.
‘어설퍼.’
율리안의 기록이 아니어도 수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특성의 폐해인가.’
‘철인’이라는 특성을 갈고닦느라 기본에는 충실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상대에게 수가 읽히는 것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찌르기는 대부분 허초이며.]
검의 간격이 보였다.
무학은 곧 거리의 전쟁이기도 했다.
빈첸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이것은 직관(直觀)의 영역이었다.
혹은 육감이라 부르는 그것.
‘내게 닿지 않아.’
그의 직관이 레반의 움직임을 모조리 읽어냈다.
‘두 번째가 진짜다.’
[두 번째 찌르기가 진짜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
빈첸의 직관과 율리안의 이론분석이 일치했다.
레반은 찌르기를 회수한 뒤, 재차 검을 뻗어냈다.
검의 궤도가 조금 달랐다.
아까는 이마를 노렸다면 이번에는 배를 노렸다.
“대검으로 찌르기라니.”
이 또한 특성의 폐해이리라.
이를테면 ‘가속척력(加速刺力)’처럼 찌르기 능력을 비약적으로 보완해 주는 특성, 혹은 ‘예검면(銳劍面)’처럼 검면조차 날카로운 날로 바꾸어주는 특성 때문에 저런 근본없는 찌르기도 통용되는 것이었다.
빈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오른손만 가볍게 움직였다.
중재무인 제론은 눈을 크게 떴다.
‘어?’
빈첸은 오른 손등으로 레반의 검날을 무심하게 쳐냈다.
간단한 동작이었으나 레반은 무게 중심을 잃고 잠시 휘청거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찔러오는 대검을 쳐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기술은 아니었다.
상대의 무기를 쳐내는 특성이나 기술도 상당수 존재했으니까.
‘빈첸 공자에게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빈첸에게는 가호가 없었다.
가호가 없으니 당연히 세부 특성도 존재하지 않을 터.
‘마치 레반의 움직임을 모조리 미리 읽어내고 있는 것 같다.’
빈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 양보했다.”
레반은 크게 흥분했다.
덕분에 움직임이 더욱 잘 보였다.
‘좌에서 우.’
레반이 하체로 땅을 딛고 검을 휘둘렀다.
언뜻 강맹해 보이는 공격이었으나, 동작이 큰 만큼 허점도 많았다.
빈첸은 대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위험천만해 보이는 상황.
빈첸의 손과 대검이 맞부딪치기 직전.
그의 손은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여 레반의 손목을 낚아챘다.
-방금, 뭐예요?
500년 전 무인들은 기본적으로 연습하고 배웠던 ‘손 싸움’의 기예였다.
특성의 싸움이 된 지금은 사장된 무학이기도 했다.
빈첸은 레반의 검로를 따라 살짝 힘을 가하며 다리를 걸었다.
레반은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세 번의 선공은 양보했군.”
집중력이 많이 필요했을 뿐, 육체적인 체력소모는 크지 않았다.
“그러니 나도 이제 검을 들겠다.”
그제야 빈첸이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을 들어 올려 레반을 겨누었다.
그의 기세는 고요했다.
‘보아라, 율리안.’
이제는 약속을 지킬 때였다.
율리안과의 약속.
그리고 아버지와의 약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