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6화
며칠이 흘렀다.
수많은 무가의 무인들과 아덴카의 방계 혈족들이 아덴카의 본가를 찾았다.
7일 뒤 열릴 진검회동 때문이었다.
그를 대비하여 율리안이 알려줄 것이 있다고 했다.
-저기, 환상도서란에 ‘피의 정령왕’ 책 보이죠?
율리안은 자기가 공부하는 책들을 숨기기 위해 책장에 ‘환상도서’들을 배치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환상도서가 틀림없었다.
-저기 121페이지를 펼쳐보세요. 방계의 혈족들에 대하여 정리해놓은 내용이 있어요.
빈첸은 ‘피의 정령왕’을 뽑아 121페이지를 살펴보려 했다.
그때, 책 사이에서 작은 초상화가 하나 떨어졌다.
‘이건 뭐냐?’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본론에 집중 좀 해줘요.
빈첸은 초상화를 다시 책 사이에 끼워놓은 후, 121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마나를 흘려보내 보세요.
빈첸은 율리안이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그랬더니 그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신문물의 세상이 펼쳐졌다.
‘헉!’
마나가 절로 움직였다.
그것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여 새로운 글자들을 배열시켰다.
[마도공학의 기본이해]
새로운 책이 되어 있었다.
-보안을 지키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에요. 제 피와 마나가 있으면 보안 문서가 열람돼요.
‘마도공학의 기본이해’조차도 눈속임이었다.
그 글자가 흐릿해지고, 빈첸의 핏방울과 반응하여 또 다른 글자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진검회동 대비서]
사실 이 책은 율리안이 진검회동에 대비하여 준비한 기록물이었다.
“마나도 못 다루는데 이런 걸 잘도 했구나.”
-마나를 못 쌓는 거지 못 다루는 건 아니거든요.
빈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마나를 못 쌓는데 마나를 못 다루는 건 아니라니.
현대 마도공학을 이용하면 마나를 쌓지 못한 사람들도 마나를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뭐? 마나석에 마나를 저장한다고? 거기에 마나를 저장하여 그걸 끌어다 쓸 수 있다고? 무인이 아니어도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단 말이냐?”
허.
세상이 정말 많이 변했구나.
-네. 쉬운 개념이에요. 거기에 저는 혈식(血式)을 추가하여 보안성을 획득한 것이고요.
빈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문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뭐라고? 마나뿐만 아니라 가호까지 저장해서 빌려 쓴다고?”
-뭘 그렇게 놀라요? 500년도 전에 만들어진 기술인데요.
“신의 힘을 농락하는 것 아니냐? 그러다 천벌 받으면?”
-500년 동안 그런 건 없었는데요.
가호는 본래 타고난다.
신이 내린다고 알려진 그 문양에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를테면 ‘검신 케샤크’의 가호를 받은 자는 검에 대한 재능을 타고난다.
500년 전에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뭐? 가호 안에 포함된 특성이란 걸 인위적이고 체계적으로 발현시킨다고?”
빈첸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신문명을 마주한 그는 큰 충격에 빠졌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군.’
‘특성’이란 개념이 없었다.
그때는 그냥 ‘가호’만 있었다.
검신 케샤크의 가호를 가진 자들은 검에 대한 재능을 타고났다 정도로 인식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니었다.
가호 내에는 수많은 특성들이 잠재되어 있었는데, 무인들은 그러한 특성을 자신의 신체능력과 선호도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발전시킨다고 했다.
-레반 아덴카에게 철인(鐵人)의 특성이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랬지.”
-그 녀석은 소인왕(小人王)의 가호를 가지고 태어난 거예요. 소인왕 가호는 크게 세 가지 특성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그중 육체 강화 특성을 발현시켰어요. 그래서 현재 철인 특성을 가진 거고요. 그걸 특별한 수련법을 통해 수련하면 금강철인 특성이 발현돼요.
빈첸에게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500년 동안 무학은 희한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인류는 원하는 방향으로 특성들을 발현시키고 신체를 강화시킬 수 있게 되었어요. 이러한 걸 테크트리라고 불러요.
‘테크트리’가 공식처럼 체계화되었다고 했다.
50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럼 무학이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될 텐데?”
-바야흐로 선택과 집중의 시대가 된 것이지요. 심상이론도 그렇게 발전했고요.
“그럼 이 시대의 무인들은 남들이 닦아 놓은 길을 테크트리라 부르며, 그 길을 따라 성장한다는 말이냐?”
-쉽고 빠르고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지요.
“허.”
-왜 그래요?
“무의 본질은 스스로를 성찰하며 끊임없이 강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강함에는 자아의 단단함과 무력의 성취가 모두 포함된다. 그 과정에서 견뎌내야 할 위험과 무게는 스스로 감당해야 하며, 무인은 그를 통해 성장한다. 내가 스스로 찾아낸 길과 남이 만들어낸 공식이 어떻게 같단 말이냐? 응당 있어야 할 성찰과 수련이 배제된, 빠르고 안전한 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지?”
이것은 ‘기술’을 익히는 것이지 ‘무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본질에서 지나치게 멀어졌다.”
-강하면 장땡인 세상이에요 영감님아.
“본질에서 멀어진 무학은 극의에 이를 수 없어.”
원래 정도(正道)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큰 깨달음과 깊이가 있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중상 수준의 무인까지는 대량으로 양산할 수 있으나 극의에 이른 무인은 탄생하기 어렵겠는데.’
지난 500년간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졌단 말인가.
과거는 날조되었고 무예의 정신은 도태되었다.
무학의 깊이는 얕아졌고 인류는 안전함과 편리함만 추구하게 되었다.
-아이 진짜,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둘은 한참이나 설전을 벌였으나 의견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율리안이 먼저 한발 물러섰다.
-됐고. 알겠으니까 그 ‘진검회동 대비서’나 좀 봐보세요.
27페이지에 진검회동에 나오는 아이들의 목록과 특성 등이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이 지나치리만큼 상세했다.
평생토록 카진을 분석해 온 빈첸은 내용에 담긴 분석에 놀라고 말았다.
-도움이 되겠죠?
빈첸은 대답하지 않고 한참이나 내용을 읽어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래 계획은 정령신의 힘을 빌려 진검회동에서 화려한 데뷔를 하는 것이었겠지? 최후의 검투. 직계검합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기적석(奇跡石)을 획득하고 싶었을 테고.”
기적석.
아덴카의 보물들 중 하나로써 깨물어 먹는 것만으로도 마나의 양을 증폭시켜주고 신체를 단단히 만들어준다는 영석이었다.
운이 좋은 경우 신체에 새로운 ‘가호’가 새겨진다고도 했다.
진검회동의 우승자와 아덴카 직계의 검투에서 승리한 자가 기적석을 수여받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태까지 아덴카 직계는 단 한 번도 기적석을 내준 적이 없었다.
-맞아요.
“나는 비록 네가 바라던 정령신은 아니지만.”
기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얼마나 절실하게 준비하고 공부했는지.
얼마나 치밀하게 상대를 분석하고 관찰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세세한 기록을 보고서도 저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무인이라 할 수 없겠지.”
-어쩌려고요?
“본래 진검회동은 본래 아덴카 직계의 힘을 과시하고자 만든 회동 아니겠느냐?”
그래서 각 무가의 자제들끼리 결투를 치르게 하여 그들끼리의 우승자를 뽑는다.
이후 그 우승자는 아덴카의 직계에게 무너진다.
무가의 자제들은 아덴카의 직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좋았고, 아덴카의 자제는 자신의 격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여서 좋았다.
“그렇다면 격을 증명하면 되겠지.”
-……가능한 소리를 좀 하세요.
“내 몸. 아니, 네 몸은 결코 못나지 않았어.”
빈첸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네가 못나지 않았다는 것을 무인들이 보는 앞에서 증명하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율리안이 말했다.
-급하지 않아도 돼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저는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서, 신중하고 완벽하게 올라가는 쪽이 더 좋아요.
“가끔은 완벽하지 않아도 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 * *
윌슨은 쭈뼛쭈뼛 걸어갔다.
“저, 시종장님?”
아덴카에는 도합 3명의 시종장이 있었다.
그중 아덴카의 후계자들과 별채 등을 담당하는 시종장인 레일사는 무려 7개의 심상을 가진 7성의 무인이었다.
세 명의 시종장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으며 윌슨이 가장 어려워하는 상관이기도 했다.
윌슨은 제가 아는 제일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여 안부를 물었다.
“그간 강녕하셨죠?”
“본론만 말하도록.”
“공자님이 가주님께 말씀을 전해달라고…….”
“뭐?”
“아니, 저, 그게…….”
윌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 진검회동과 관련한 내용이랍니다!”
“빈첸 공자님이 말이더냐?”
“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빈첸은 늘 가주를 피해 다녔다.
구석에 숨어 직계들과의 만남을 극도로 꺼려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을 전해달라니.
그 방법조차 구차하기 그지없었다.
‘제 아버지를 직접 찾아뵐 용기도 없으신 건가?’
윌슨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쇼. 저는 진짜 딱 공자님이 말씀하신 대로만 전하는 겁니다?”
겁이 나서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라. 그것이 예산착복을 눈감아주는 대가이다.”
그렇게 말하고서 슬쩍 눈치를 살폈다.
겁쟁이 윌슨은 레일사가 혹여 화내기라도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레일사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공자께서 예산착복을 지적하셨다고?”
“예? 예. 뭐, 뭐라더라. 레비딘 목화솜인가? 그거랑 식사 질이랑…….”
“그렇군.”
레일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냐?”
“가주께서 진검회동에 직접 참관 하여달라 요청하셨고…… 음, 또 그리고…….”
윌슨이 전한 내용은, 레일사에게 다소 충격적이었다.
진정 빈첸 공자가 전하라고 한 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이만 나가보도록.”
“아,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레일사는 윌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윌슨의 모습을 통해, 숨겨진 이면의 것들을 많이 읽어낼 수 있었다.
‘공자께서 직접 오시지 않았다.’
사실 직접 와서 말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윌슨을 움직여 윌슨이 직접 말하도록 했다.
윌슨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직속 시종에 대한 지배력을 보여주신 거겠지.’
저렇게 겁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와 말을 했다는 건,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지배력을 증명한 것이었다.
‘내 의도를 온전히 파악하신 것인가.’
윌슨 같은 성정의 시종을 배치한 것은 시종장의 의도였다.
윌슨 정도는 우습게 극복해야 하니까.
그조차도 극복하지 못하면 아덴카의 직계로서의 자질이 아예 없다고 판단했었다.
게다가 시종장을 움직여 가주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공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방식의 증명이군.’
레일사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서렸다.
곧장 가주 칸의 서재를 찾았다.
레일사는 칸의 서재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칸은 서재에 앉아 가벼운 명상을 하던 중이었다.
“빈첸 공자가 가주님을 진검회동에 초대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칸은 그동안 진검회동에 참관한 적이 없었다.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 같은 진검회동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칸은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레일사. 그대도 이제 많이 늙은 모양이군.”
가주의 서재를 찾아와 실없는 소리나 늘어놓았다는 일침이었다.
“아덴카 직계 혈통의 격을 증명하겠다고 합니다.”
“격을 증명한다?”
칸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으나 주변의 공기는 무거워졌다.
단련된 무인인 레일사마저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과연 ‘명왕(冥王)’이라 불리는 칸의 기백이었다.
“레일사. 그대가 보기에 빈첸이 과연 혈통의 격을 운운할 정도의 그릇이 되는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번에 증명하겠다. 아버지께 약속드린다 하였습니다.”
레일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진검회동에 참관하여 주십시오. 레일사. 아덴카 시종장의 명예를 걸고, 그 약속의 공증인이 되겠습니다.”
“공증인이 되겠다라.”
“빈첸 공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목을 내놓겠습니다.”
“왜 시종장이 구태여 그런 제안을 하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라는 거역할 수 없는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산착복은 중죄다.
레일사는 의도적으로 그러한 중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착복한 예산은 한 푼도 남김없이 모아두었다.
언젠가 빈첸이 이 문제를 지적해 줄 날을 기다리면서.
일부러 약점을 보여주었고, 빈첸은 훌륭히 그 약점을 낚아챘다.
칸의 입가에 미비한 미소가 서렸다.
‘빈첸이, 레일사를 저렇게 움직였단 말이지?’
슬쩍 호기심이 동했다.
“들어보지.”
진검회동 날이 다가왔다.
그동안 진검회동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가주 칸이 진검회동에 직접 참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