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5화 (5/184)

환생의 정석 5화

율리안이 말했다.

-레반 아덴카. 아주아주 먼 방계에요. 이번 진검회동의 강력한 우승후보이기도 하고요. 저번에 저놈의 아버지는 봤죠?

빈첸은 가만히 서서 레반을 바라보았다.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를 가진 녀석의 오른손에는 빈첸의 검보다 훨씬 육중한 목검이 들려 있었다.

레반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왜? 이제 진검회동이 두려워지기라도 한 거냐?”

진검회동.

아덴카와 직/간접적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무가의 자제들이 모여 진검으로 무예를 나누는 장이었다.

공식적인 나이 제한은 없으나 보통은 열넷이 되는 해에 진검회동에 참여했다.

진검회동의 우승자는 열네 살의 아덴카 직계와 단독으로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에 진검회동 우승자와 싸우게 될 직계는 빈첸이었고, 역대 직계들 중 최약체였다.

다시 말해 다른 무가와 방계에게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빈첸이 말했다.

“무인이 검을 두려워하면 쓰나.”

“뭐? 푸하하핫! 꼴에 직계라고. 입은 살았구나.”

“너는 입이라도 살아야 할 텐데.”

“뭐라는 거냐?”

“도발에도 격과 품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율리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은 벌써 두 개의 심상을 완성했어요. 게다가 ‘철인(鐵人)’ 특성도 가지고 있어요. 형님보다 훨씬 강하니 조심해야 해요.

빈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싸우면 필패였다.

레반이 말했다.

“진검회동이 다가오니 미쳐가는구나, 네놈이.”

직계라는 것 외에는 잘난 게 아무것도 없는 놈이.

레반이 입술을 오므렸다.

-화가 나면 입이 작아지는 특징이 있어요.

“내 아버지께 아주 큰 무례를 저질렀을 때부터,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 때는 말이야.”

적어도 수련을 하러 온 다른 혈족을 비웃지는 않았다.

외팔이 데이븐도 수련장과 대련장에서만큼은 존중받았고, 심지어 카진조차도 이곳에서는 예의를 지켰다.

그것이 500년 전 무인들의 자세였다.

“나 때?”

“너 같은 놈은 가문의 어른들에게 맞아 죽었다.”

지금 시대에는 없는 일인 듯했다.

그때 보았던 ‘어른’도 어른이 아니었다.

‘어른은 애들 싸움에 끼지도 않았었지.’

그 ‘어른’은 자신의 아들을 치켜세우며 방계로서의 열등감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마나도 없는 빈첸의 오른 어깨에 마나를 주입해 고통과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참으로 치졸한 짓이었다.

어른은 어른답지 않았고, 그 어른의 자식은 무인의 예를 몰랐다.

‘어째 무(武)의 정신은 더 퇴보한 것 같군.’

레반은 얼굴이 붉어졌으나 이내 호탕한 척 웃으며 말했다.

“맞아 죽는 것은 네놈이겠지.”

“화났냐?”

“화 안 났는데?”

“에이, 화났는데?”

“안 났다니까?”

“그럼 그런가 보지.”

“이 새끼가……!”

“거봐. 화났네.”

빈첸은 목검을 휘둘러보았다.

후웅!

검 끝이 레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닿지 않았다.

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거리감은 살아 있군.’

“뭐야? 아직 거기 있었냐? 수련하러 왔으면 수련이나 해.”

“이, 이……!”

순간, 긴장했던 레반이 이를 바드득 갈며 빈첸을 노려보았다.

레반을 수행하던 무인이 그를 말렸다.

“공자님. 진검회동 때 본때를 보여주면 그만입니다. 그때까지만 화를 누그러뜨리시지요. 복수는 여물수록 청량한 법입니다.”

레반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진검회동에서 만나자. 겁쟁아.”

* * *

며칠이 지났다.

빈첸의 수련은 별채의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빈첸 공자가 춤을 춘대.”

“왼팔로 검을 쥐고 흔든다던데?”

“한 세 번 휘두르면 지쳐서 헥헥거린대.”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아덴카의 수치였다.

그러나 빈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외팔이 데이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카진을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는 외팔이 병신이 어떻게 카진을 이길 수 있겠느냐며 헛된 망상은 그만 좀 하라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겨냈었다.’

그때의 비웃음과 멸시는 검투장의 함성 소리가 되어 돌아왔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겠지.’

한편, 가문 내 백색검대의 부검대장 멀린은 오늘도 직접 순찰을 돌던 중 별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뭘 하는 거지?’

가서 보니 빈첸이 어설픈 모양새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것을 비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왼팔?’

자세도 엉성하고 몸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빈첸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곧 있을 진검회동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왼팔로 검을 휘두른다라.’

왼팔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이색적인 장면이었다.

아무도 저렇게 하지 않는다.

저러면 ‘심상’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특성도 지니지 못하고 태어난 아덴카의 못난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노력이겠지.

남들과 같은 길을 가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그만의 판단이리라.

‘아무도 가지 않는 길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만, 응원하겠습니다.’

멀린은 한참이나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영문 모를 진지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흘렀다.

이제 빈첸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의 몸통을 치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체력과 몸이 약해 긴 시간을 수련하지는 못했다.

멀린이 가까이 다가갔다.

“백색검대 소속 멀린입니다.”

빈첸은 그의 직위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멀린이 매우 높은 경지의 무인이라는 것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상급 체력 포션입니다. 이를 이용하시면 훨씬 수월하게 수련하실 수 있을 겁니다.”

빈첸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멀린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와서 처음 접하는 호의였다.

“백색검대 소속 멀린이라 했나?”

“예.”

“멀린, 네 이름을 기억하겠다.”

호감이 아니라 동정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의는 없었다.

적어도 수련을 할 때마다 이쪽을 훔쳐보며 비웃는 별채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빈첸은 멀린이 마음에 들었다.

멀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무언가 달라지셨군요.”

그가 알아왔던 빈첸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고, 그 음성에는 힘이 있었다.

이름을 기억하겠다는 저 말에서 미묘한 기백이 느껴졌다.

“부디 건승하십시오.”

멀린이 허리를 숙이고 떠나갔다.

빈첸은 이후로도 여러 번 허수아비들을 타격했다.

영혼 속에 각인된 검술을 끌어내어 몸에 이식했다.

‘횡으로 벤다.’

오른발로 지면을 받쳤다.

허리의 회전력을 더했다.

발검의 찰나를 눈에 담고 몸에 익혔다.

체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외팔이 검사 데이븐이 보던 검로와 타이밍이 이 육신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점(点)과 선(線)을 만들어 겹겹이 쌓고 이능을 발현시키는 검로.

외팔이 데이븐이 카진을 이길 수 있었던 길.

역사에는 기록되지 못한 특별한 검술이 그의 손에서 다시 부활했다.

가야 할 검로가 또렷하게 보였다.

‘발검.’

허수아비를 베었다.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됐다.’

마음이 후련해졌다.

모양새가 훨씬 좋아졌으나 위력은 별로 없는 듯 보였다.

별채의 사람들은 여전히 빈첸을 비웃었다.

그날 밤.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허수아비의 몸통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그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걸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새벽 순찰을 돌던 멀린이었다.

‘허수아비가 잘렸다.’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단면이 예리했다.

‘흑향목 목검으로는 불가능해. 빈첸 공자의 성취로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지.’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래에서 위로 베었다. 왼팔을 사용해서. 진검을 사용한 건가?’

진검은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가호와 특성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빈첸 공자에게는 가호가 없는데?’

신이 내리는 특별한 문양인 가호.

빈첸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힘이 전혀 없었다.

그에 따라 그 어떤 특성도 가지지 못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멀린은 입을 다물었다.

‘좀 더 지켜봐야겠어.’

그가 빈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덴카 12검에서 백색검대 부대장으로 좌천되는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아덴카에 남아 있던 이유를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옅은 희망을 보았다.

‘속단하지는 말자.’

멀리서, 빈첸을 관찰하기로 했다.

* * *

빈첸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였으며 똑같은 시간에 목검을 쥐고 땀을 흘렸다.

‘컨디션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해.’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몸이 무너질 것이다.

13년 동안 방치된 천골은 바스러지기 직전이었다.

몸 상태를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에 따라, 윌슨은 죽을 맛이었다.

‘왜 내가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냐!’

‘무슨 밥을 하루에 다섯 끼를 처먹어! 토끼새끼인 양 찔끔찔끔 나눠서 처먹으니 그렇지!’

‘내 낮잠은!’

윌슨의 불만은 쌓여갔다.

“윌슨. 네 일에 최선을 다해라.”

“아, 예.”

윌슨이 음식을 가져왔다.

빈첸이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육향은 남아 있는데 고기는 없구나.”

그릇에는 풀만 가득했다.

“예?”

“훔쳐 먹으려면 티 안 나게 먹었어야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에 고기 꼈다.”

“허, 헉! 진짜요?”

윌슨은 황급히 입을 가렸다.

“거짓말이다.”

“공자님!”

“네가 잘못을 해놓고 내게 성을 내는 것이냐?”

빈첸이 가볍게 웃고서 말했다.

“아직까지는 귀엽게 봐줄 수 있다만.”

“예?”

빈첸은 윌슨과 눈을 마주쳤다.

“부디 선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

흥, 그까짓 선!

하고 말하려고 했으나 윌슨은 침을 꼴깍 삼켰다.

왠지 빈첸의 시선이 두려웠다.

그가 말했다.

“그, 제가 시정잡배 출신인 건 아시죠?”

“모른다.”

윌슨은 최대한의 용기를 내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 무서운 협박카드를 내밀었다.

“제, 제, 제가 이래 봬도 수많은 사람을 죽여 봤거든요?”

“그러냐?”

“아, 안 무서우세요?”

“그것참 무섭군.”

“네. 그러니.”

빈첸이 말을 잘랐다.

마나를 담아 윌슨의 머릿속에 음성을 전달했다.

“공포로 지배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얻지는 못하지. 그래서 너를 힘으로 억누르지 않는 거야.”

순간 윌슨의 몸이 굳었다.

그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다.

“지, 지금 혹시 마나를 쓰셨어요?”

“그래.”

“마나 못 쓰는 몸이라던데요?”

“틀린 말이다.”

“그, 그럼 언제부터 마나 쓰셨어요?”

“중요한 건 내가 마나를 다루고 있다는 거겠지. 안 그런가?”

“그건 그렇네요.”

마나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었고, 불량한 태도가 사라지는 기적을 낳았다.

자세는 곧아지고 손이 가지런히 모아졌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별채에 배당된 예산에 비하여 식사의 질이 크게 떨어지던데.”

“네?”

“그리고 내 옷들. 레비딘 목화솜이 주 소재다.”

공손해진 윌슨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레비딘 목화솜은 명문가 사람들의 옷에는 쓰이지 않는 소재였다.

그것은 레비딘 목화의 특성 때문이었다.

레비딘 목화는 빨리 자라고 대량의 솜을 뽑아낼 수 있지만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주변 식물들을 말라죽게 만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명문가의 사람들은 그러한 특성을 꺼려 했다.

명문에 어울리지 않는 특성이었으니까.

“누군가 중간에서 예산을 착복하고 있다는 뜻이다.”

“저, 저는 아닌데요?”

“그래, 너는 아니겠지. 너는 그 정도 그릇이 못 돼.”

윌슨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욕하신 거죠?”

“그 정도는 알아들어 먹으니 다행이다.”

“공자님!”

“내 가장 가까이에서 내 시중을 드는 자가 누구냐?”

“저, 저죠.”

“그러니 알량한 자존심은 그만 부리고 내 곁에 서거라.”

“……예?”

“네 주인이 빈첸 아덴카인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할 것이니.”

“…….”

“내가 너를 귀엽게 봐주는 마지막 기회다.”

윌슨은 잠시 넋을 잃고 빈첸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빈첸에게는 명문가의 자제다운 기품이 있었다.

예전의 빈첸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마나의 유무와 관계없이,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느껴졌다.

“알아들었으면 네 일을 하도록.”

윌슨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과제를 던져주었다.

힌트와 기회는 주었으니, 그 기회를 살리는 건 윌슨의 역량이었다.

윌슨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하나도 안 멋있거든요.”

그래도 제법 공손해진 태도로 문을 닫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긴장이 좀 풀렸다.

문에 몸을 기대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후우. 멋이라는 것이…… 폭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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