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4화
13년 동안 마나를 흡수하지 못한 천골.
천골은 축복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저주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골은 마나를 ‘흡수할 수 있는 뼈’가 아니라 ‘흡수해야만 하는 뼈’이기 때문이었다.
‘명상을 통해 악화는 막을 수 있겠지만 한계는 있을 터.’
한번 죽음을 경험했던 빈첸은 몸 상태를 누구보다 정확히 진단했다.
‘남은 시간은 10년쯤 되려나?’
10년.
‘충분히 긴 시간이다.’
폭풍검이 검제가 되고, 외팔이 데이븐이 세상에서 잊혀지기에 충분한 시간.
심지가 굳건했던 데이븐이 배가 고파 말라비틀어지고 삶을 간절히 염원하며 죽어갔던 시간.
그 시간은 끔찍이 두렵고,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었다.
‘그 안에 방법을 찾는다.’
그때, 쾅쾅!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도대체 안에서 뭐합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시종인 것 같았다.
시종치고는 노크가 과하게 거친 느낌이었다.
“대답 좀 해보시라고요!”
“…….”
“문 따고 들어갑니다?”
시종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빈첸이 대답하기 전에, 시종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코를 감싸고 소리쳤다.
“어, 어억! 이게 무슨 냄새야! 공자님! 방 안에 똥을 싸질러놓으면 어째요! 누가 치우라고!”
“네가 나의 시종이냐?”
“무슨 헛소리를 하고 계신 겁니까?”
시종을 바라보자 그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이름은 윌슨. 율리안이 3년 뒤 목을 잘라 죽이겠……!’
그만 떠올리기로 했다.
빈첸은 노폐물에 절어 냄새가 나는 웃옷을 벗어 내려놓았다.
“새 옷을 가져다다오.”
빈첸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그에게는 명가의 자제다운 기품이 있었고, 윌슨은 찔끔 놀랐다.
‘뭐야?’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왜 세 보이지?’
윌슨은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가 일부러 빈첸을 내려다보았다.
윌슨의 나이는 19세였고 빈첸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공자님. 똥은 어디다 싼 겁니까?”
“싸지 않았다.”
“이게 똥 냄새가 아니면 뭡니까? 거짓말 치지 마십쇼.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거짓말이라고 말 안 했습니까?”
“꼬박꼬박 존대를 하면서도 싸가지가 이토록 없는 건 또 아주 진귀한 경우구나.”
“뭐, 뭐라고요?”
“네가 모시는 자가 똥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였는데도 똥이라고 우기는 것도 신기하고. 네가 거짓말을 싫어하는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지?”
“그, 그건…….”
윌슨은 순간 당황했다.
‘뭐야, 얘 왜 이래?’
“평소보다 더 많은 일을 쥐어준 것은 맞으나 이 또한 너의 할 일이 아닌가?”
“이게 왜 제 할 일입니까? 제가 똥 치우는 사람입니까?”
“나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지.”
“제가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그럼 시종을 하질 말았어야지.”
“이익……!”
빈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새 옷을 가져다주는 것을 꺼리는 모양이니 내 직접 새 옷을 받도록 하겠다.”
“어디 가십니까?”
“시종장에게 옷을 내어달라 할 참이다.”
윌슨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누가 안 간댔나.”
윌슨은 신경질적인 모양새로 문 쪽으로 걸어가 쾅! 문을 닫았다.
* * *
꼴을 보아하니 척 보면 척이었다.
아무리 빈첸이 겁쟁이 소심이어도, 시종이 저렇게 오만방자하게 굴 수는 없다.
“일부러 저런 성격의 잡배를 배치한 것 같군.”
-저도 그렇게 생각 중이에요.
“반골 기질의 못되고 버릇없는 시종을 극복하고 아덴카의 7공자다운 모습을 보여라, 뭐 이런 건가.”
-뒷골목 깡패 출신이고 사람도 많이 죽였다고 해요.
빈첸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을 많이 죽여 본 자는 그 특유의 기세가 있어.”
-그런데요?
“그놈에게서는 그런 기운이 일절 느껴지지 않던데.”
-무슨 뜻이에요?
“허세다. 놈의 눈빛이 지나치게 맑아. 게다가 겁도 많을 것 같군.”
-뭘 기준으로 윌슨을 판단하는 거예요?
“감.”
율리안은 빈첸이 여러 가지 요소들을 종합하여 총체적인 판단을 내린 거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놀라운 상황 판단력을 기대하기도 했었다.
“나 때는 이러한 감을 일컬어 여섯 번째 감각인 ‘육감(六感)’이라 했다.”
-맙소사.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육감이라니.
공부만 해왔던 율리안에게는 다소 충격적이고 비문명적인 대답이었다.
그때, 윌슨이 씩씩대며 돌아와 새 옷을 갖다 주었다.
“됐습니까?”
“수고했다.”
“방 안에 똥은 싸지 마십시오.”
“그러도록 하지.”
빈첸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윌슨은 자존심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느꼈다.
제깟 놈이 그럼 그렇지.
그런데 빈첸이 말을 이었다.
“길이가 1미터쯤 되는 목검을 가져와. 무게는 500그램쯤 되면 좋겠고, 재질은 흑향목으로. 가문의 창고에 널려 있을 것이다.”
“싫다면요?”
“싫으면 내가 직접 가는 수밖에. 창고지기가 왜 직접 왔냐고 물으면 무어라 답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창고지기들은 대부분 무인이다.
가문의 물건들을 지키는 자들이니 실력도 꽤 뛰어난 자들로 구성되었다.
“시종이 귀찮아해서 직접 왔다고 대답하면 퍽 재미있겠군.”
윌슨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빈첸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그냥 이상한 것도 아니고 더없이 이상했다.
‘내가 알던 겁쟁이 빈첸 공자가 아닌데. 왜 이러지?’
표정과 말투에서 그동안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여유가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그 여유가 윌슨을 긴장시켰다.
“내 직접 가져오도록 하지.”
빈첸이 문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디 가요!”
윌슨이 빈첸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그 순간, 윌슨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어어억!’
쿵!
육중한 소리가 났다.
그의 몸이 땅에 떨어져 내렸다.
콜록, 콜록, 기침했다.
“뒤에서 공격하는 것에 좀 예민하다고 말 안 했던가?”
“쿠, 쿨럭. 그런 적 없는데요!”
“그럼 이제부터 알아라.”
‘고작 이거 했다고 몸이 비명을 지르는군.’
윌슨이 다가오는 힘을 역이용하여 던졌는데도 그랬다.
윌슨은 씩씩대며 일어나 빈첸을 노려보았다.
“왜? 할 말이라도?”
눈에는 반항기가 가득했으나 빈첸과 눈이 마주친 그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 저, 뭐라고 했었죠? 흑향목?”
“싫다고 안 했나?”
“싫다고까지는 안 했는데요.”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신경질적으로 걸어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랬는데 문이 살짝 열렸다.
“왜?”
“바람 때문에 쾅 닫힌 겁니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요…….”
* * *
시간이 조금 흘렀다.
윌슨이 흑향목 재질의 목검을 가져왔다.
꽤 멀리 갔다 온 건지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흥, 순순히는 못 주지.’
아무리 빈첸이 변했어도 윌슨에게는 자존심이 있었다.
윌슨은 목검을 땅에 내던지려다가,
“여기요.”
한 손으로 목검을 건넸다.
두 손으로 주지 않는 것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빈첸이 목검을 받아들었다.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 중에 오른팔이 없는 자가 있었는데 말이다.”
“……예?”
“삶이 기구하고 힘들었다더군. 아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어.”
빈첸의 눈이 윌슨의 오른팔을 향했다.
윌슨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두 손으로 공손하게 목검을 바쳤다.
팔을 뻗는 속도가 가히 전광석화였다.
“여기 있습니다, 공자님.”
절로 겸손해졌다.
“고맙다.”
윌슨의 얼굴이 붉어졌다.
“시, 심부름했으니, 전 이만.”
윌슨은 빠른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번에는 문이 살살 닫혔다.
‘수련이 필요하겠어.’
빈첸은 수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의 가문 아덴카 내에는 검술을 연마하기 위한 장소들과 장비들이 충분히 구비되어 있었다.
그건 별채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련장에 도착했다.
수련장은 굉장히 넓은 공터였고 한편에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들이 세워져 있었다.
오른손으로 목검을 쥐고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영 느낌이 안 사는데.’
빈첸은 목검을 왼팔로 옮겨 들었다.
그러자 이질적인 느낌이 사라지고 목검이 가볍게 느껴졌다.
‘이 감각.’
호흡을 깊게 마셨다.
‘좋구나.’
검을 쥐는 이 감각이 빈첸의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오랜 벗이 인사를 건네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이제야 왔느냐고.
그 감각에 빈첸은 저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말았다.
‘나도 천생 무인인가 보다.’
검을 쥐는 이 순간이 즐거웠다.
-왼팔로 뭘 하시려고요?
왼팔로 검을 다루는 무인은 없다.
현대의 ‘심상이론’은 오른손잡이에게 맞게 발전해 왔다.
-왼팔 무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인데요.
왼손잡이는 저주받은 체질이라고도 불린다.
빈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냐?’
검을 쥐고 집중했다.
우웅-!
목검의 검신이 가볍게 진동했다.
‘공명(共鳴).’
전생에서는 이 단계까지 오는 데만 1년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검을 쥐자마자 그 단계에 이를 수 있었다.
‘공명’만으로 검술이 일취월장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검과 함께 호흡하는 이 작업이야말로 검술을 익히기 위한 기본 작업이었다.
‘이미 갔었던 길이다.’
몸만 버텨준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빈첸이 목검을 휘둘러보았다.
‘좋군.’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난이 새끼가 이제 와서 수련이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겠어.”
빈첸은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내 아들이 네놈을 무참히 짓밟아줄 게야. 방계에게 짓밟힌 최초의 직계가 될 테지.
그 ‘어른’의 아들이었다.
이번 진검회동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방계의 신성.
현 아덴카의 열세 살 중 가장 뛰어난 무위를 가진 소년.
레반 아덴카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