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2화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가문의 어른이 말씀을 하는데 듣고는 있는 거냐!”
누군가가 데이븐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데이븐은 순간 느껴진 통증에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어?’
데이븐에게 익숙하지 않은 통증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
‘이 통증은……?’
눈을 천천히 움직여보았다.
자신의 어깨가 보이고 팔꿈치가 보였다.
‘오른팔?’
데이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난데없이 오른팔이라니.
게다가 창살을 통해 따사로운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감옥과는 상이한 세상이었다.
‘꿈인가.’
꿈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꿈이 왜 이리 생생하지?’
신기하게도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가문 방계의 어른 중 하나?’
왜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몇몇 장면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이름이 빈첸이라고?’
그 이름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마치 여태껏 늘 그 이름으로 불려왔던 것처럼.
‘아덴카가(家)의 일곱 번째 아들. 이 기억들은 대체 뭐지?’
기분 나쁜 꿈은 아니었다.
‘공기가 맑아.’
호흡을 느껴보았다.
지하감옥의 끈끈하고 습한 느낌은 없었다.
햇빛은 생생했다.
‘꿈치고 지나치게 실감 나는데.’
오른 어깨에서 느껴지는 악력도 진짜였다.
꽤 아팠지만 이 아픔이 싫지 않았다.
‘오른팔을 가진 꿈이라. 내게 주어지는 마지막 선물인가.’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
이 이질적인 느낌이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이 지경이 되어서 이런 꿈이라니.’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어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웃어? 지금 웃은 게냐?”
그가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데이븐은 오른 어깨를 통해 미세한 양의 마나가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음?’
기초적인 마나의 운용이었으나 꽤 공격적인 흐름이었다.
몸과 몸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상대의 마나흐름을 뒤틀어 고통을 주는 방식이었다.
이것을 파훼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대표적으로는 두 가지 방법이 존재했다.
‘더 많은 양의 마나. 혹은 훨씬 높은 격의 마나로 제압하거나.’
그도 아니면 상대와의 접촉을 깨버리면 그만이었다.
후자가 더 효율적이었다.
데이븐이 어른의 몸을 살짝 밀어냈다.
남자의 중심이 흔들렸다.
데이븐의 오른팔이 남자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어어?”
남자의 발목에 다리를 걸었다.
쿵!
남자는 볼썽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데이븐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엥? 왜 이렇게 넘어져?’
신기할 정도였다.
‘마나를 이 정도로 다루는데, 움직임은 엉성하기 짝이 없구나.’
저렇게 넘어질 줄은 몰랐다.
데이븐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데이븐이 오른팔을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이 건방진 놈이!”
남자는 데이븐의 팔을 탁! 쳐냈다.
씩씩대며 일어나 데이븐을 노려보았다.
살기가 담긴 눈빛이었으나 데이븐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별로 신경 쓰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말했다.
“꼴에 직계라고.”
그는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어찌 보면 약간 겁먹고 도망치는 것 같기도 했다.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 아들이 네놈을 무참히 짓밟아줄 게야. 방계에게 짓밟힌 최초의 직계가 될 테지.”
그의 눈에는 어떠한 염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내 아버지와 똑같구나.’
아버지는 늘 형인 큰아버지를 이기고 싶어 했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아들에게 모든 꿈을 투영시켰다.
그 결과 데이븐은 태어나면서부터 불효자가 되었고.
“오늘의 오만과 무례를 잊지 않으마. 진검회동(眞劍會同)의 날을 기대하지.”
그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데이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본 뒤 의자에 앉았다.
‘꿈이 아닌가?’
이 정도면 깰 법도 한데.
눈을 감고 그 자신의 몸에 집중해 보았다.
몇몇 기억들이 더 떠올랐다.
‘나를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관심조차 주지 않는 아버지. 나를 경멸하는 형제들의 눈빛. 나를 제물 삼고 싶어 하는 많은 아이들.’
아덴카가(家)는 검의 명가였다.
총 8남매였는데 빈첸은 그중 일곱째였다.
‘막내인 로아에게 뺨을 맞고 방구석에서 숨어서 울었다?’
빈첸은 소심한 겁쟁이였고 아덴카의 낙오자였다.
아덴카의 직계들에게는 거의 버려졌다.
대신 직계를 뛰어넘고 싶은 방계들의 먹잇감이 된 상태였다.
‘이런 걸…… 환생이라고 하나?’
환생을 주장하던 단체가 있기는 했다.
신성재판에 회부되어 모조리 척살당하기는 했지만.
그 후로 환생이란 단어는 입에도 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환생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잖아.’
사미온가의 외팔이 데이븐이 아덴카가의 못난이 빈첸이 되었다.
환생 말고 달리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군.’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황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꿈은 깨지 않는 듯하였고,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무언가가 떠올랐다.
‘일기장이 있다.’
책상 서랍에 일기장이 있었다.
그는 서둘러 일기장을 살펴보았다.
[왜 나는 형과 누나들처럼 하지 못할까?]
일기장은 온통 자신을 비하하는 내용뿐이었다.
[방계의 혈족들은 호시탐탐 나를 짓밟을 기회만 노리고 있어.]
[시종과 시녀들도 나를 무시해.]
[나는 불량품이야.]
자존감은 더 이상 무너질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내렸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원래부터 소심했던 빈첸은 더욱 소심해졌고 모든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못난이가 되어 버렸다.
[차라리 죽고 싶어.]
빈첸은 죽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자결할 만큼의 용기도 없었다.
[신이시여. 제발 나를 아프지 않게 데려가 주세요.]
빈첸은 잠자코 일기장을 덮었다.
아프지 않게 나를 데려가 달라며 애원하는 열세 살 아이의 마음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신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준 모양이구나, 꼬마야.’
데이븐은 마지막 순간 살기를 바랐다.
빈첸은 마지막까지 죽기를 바랐다.
‘죽고 싶었던 누군가는 사라졌고, 살고 싶었던 누군가는 살아난 건가.’
……라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믿는단 말이에요?
빈첸은 순간 주변을 경계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 * *
빈첸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 괴이한 목소리가 잡귀의 현혹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명상에 집중하려 해도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머리를 울려댔다.
-반가워요. 저는 그 몸의 원래 주인이었어요. 원래 이름은 빈첸이었는데 몸을 당신한테 내어주면서 이름이 사라졌어요. 저를 율리안으로 불러주세요.
빈첸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이시지 그래요?
일단 차분히 물어보았다.
“어떻게 대화가 가능한 거지?”
-계시요.
계시.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다양한 형태의 표현을 뜻했다.
그것은 꿈이 될 수도 있었고 환상이 될 수도 있었고 직접 언질이 될 수도 있었다.
보통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가호’를 지닌 자들이 계시를 듣는다고 했지만 데이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니까, 네가 신이라고?”
-네.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잡신이지만요.
“잡신?”
-원래는 정령신을 불러들이려고 했는데, 당신이 들어왔어요.
율리안은 ‘아주 복잡한 이유’로 자신이 신이 되었다고 했다.
지금은 잡신이고 진짜 신이 되기 위해서는 업적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했다.
-그걸 소명이라고 해요. 제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면 저는 진짜 신이 될 수 있어요.
“사정은 알겠다만. 나는 네 업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데.”
삶을 얻었다.
내 삶을 살기에도 바쁜데 귀신같은 것의 소원을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율리안은 삶을 포기했고 데이븐은 삶을 기원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제 신기(神氣)는 엄청 약해요. 제 신기가 모두 사라지면 그 몸도 죽을 텐데 괜찮아요?
빈첸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냐?”
빈첸의 몸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건강했고 튼튼했다.
요절할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환생도 하고 계시도 듣는 판에 요절을 못 할 건 뭐람.
“요절하기에는 몸이 지나치게 건강한 듯하…….”
그리고 그때.
풀썩,
빈첸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거봐요. 속고만 살았어요?
쓰러진 빈첸은 환상을 보았다.
일정한 형체를 갖지 않은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율리안이다.’
율리안의 모습은 검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고 위험한 느낌이 났다.
그 기이한 그림자가 자신의 몸을 덮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한 개념이 떠올랐다.
‘기억전이(記憶轉移)?’
많은 정보들이 전해졌다.
이윽고, 빈첸은 번쩍 눈을 떴다.
등이 축축했다.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느낌이었다.
식은땀 몇 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일부지만 그게 제 진짜 과거예요. 일기장은 거짓으로 날조한 거고요.
빈첸의 환상 속에서 본 꼬마를 떠올렸다.
그 어린아이는 결코 소심한 겁쟁이가 아니었다.
목덜미가 욱신거렸다.
‘내가 뭘 본 거야, 도대체?’
‘기억전이’는 완벽하지 않았다.
‘율리안’의 신기가 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타고난 모략가?’
빈첸은 언젠가 아덴카 가문을 집어삼키겠다는 야망을 가진 계략가였다.
빈첸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미친.”
세상이 말세구나.
빈첸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형제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도.’
기억 속 빈첸은 늘 독사 같은 마음을 감추었다.
‘막내에게 뺨을 맞았을 때도.’
사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엉엉 우는 겁쟁이를 연기하는 한편, 복수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계획까지 세웠다.
‘힘줄을 자르고 마나를 봉인하여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처넣겠다고?’
이게 열세 살짜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인가.
나는 어떤 세상에 환생했단 말인가.
빈첸은 저도 모르게 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철저히 네 자신을 숨기고 겁쟁이를 연기했다? 어째서?”
-혈육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외톨이가 되어야 했어요. 제가 공부하려는 학문들은 사도(邪道) 취급을 받았거든요.
빈첸은 허- 하고 웃고 말았다.
“어찌 열세 살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단 말이냐?”
-열세 살에 맨손으로 집채만 한 바위를 쪼개고 마물 대가리를 박살 내는 세상인데 뭘 새삼스레.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빈첸은 어느 정도 상황을 받아들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환생에 원래의 빈첸이 깊이 관여했다.
정령신을 강림시키려던 그 순간 상서로운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어둠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당신에게도 결코 손해는 아닐 거예요.
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정보의 우위는 저쪽이 가지고 있었고, 이 상황을 보다 면밀히 파악해야 했다.
-대악마 데이븐과 영웅왕 카진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죠?
빈첸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데이븐과 카진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신의 얘기였다.
“대악마 데이븐? 영웅왕 카진?”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일이에요. 외팔이 검사 데이븐은 사미온의 감옥에서 탈출했어요. 그리고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힘을 키웠지요. 데이븐은 수천 명의 아이들을 잡아먹고 힘을 키웠죠. 그가 죽인 사람이 10만이 넘는다고 해요. 그래서 그는 대악마로 기록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