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거물을 꺾다 (1)
드르륵, 턱-.
권다정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다가 앉은 뒤 들고 온 가방을 책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은 연근석 변호사가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하늘 같은 법조계 선배가 왔는데 어디 인사도 안 하고 앉아 있냐는 식이었다.
이렇게 기선 제압을 하려는 생각인가 본데, 인사 까짓거 해 주지 뭐.
“사건 담당 검사 백동준입니다.”
딱 연근석 변호사가 한 인사만큼만 했다. 내가 벌떡 일어나 허리라도 굽히길
바랐는지, 연근석 변호사의 표정이 점점 썩어갔다.
그 모습이 오히려 권다정한테는 안정감을 주었나 보다. 한껏 굳어져 있던 표
정이 슬그머니 풀어지더니 생각도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으니까.
쩝-.
연근석 변호사는 기선 제압에 실패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먹을 것도 없는데 입
맛을 한 번 다신 뒤에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보통은 검사가 추궁하고 변호사가 방어하는 구도로 진행되는데, 연근석 변호
사는 속전속결로 나를 때려 눕혀 권다정을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한 듯 선공
을 날렸다.
“체포 영장 있습니까?”
“없습니다. 긴급 체포였습니다. 조사 후 48시간 이내에 사후 영장 청구할 겁
니다.”
“긴급 체포 근거는요? 현행범이었습니까?”
오우야, 뭘 단문으로 쏘아 대나? 거의 사법연수원에서 교수가 학생 가르칠 때
하는 꼴이네. 그렇다고 내가 밀릴 이유는 전혀 없지.
연근석이 보기에 나는 이제 갓 법조계에 진출한 새내기겠지만, 실제로 내 머
릿속에 들어있는 경험은 웬만한 중견 법조인 못지않으니까.
“현행범일 때만 긴급 체포할 수 있는 건 아니죠. 형사소송법 200조의 3, 뭔지
아십니까?”
질문은 자기만 하는 줄 알고 있었는지, 내가 훅 치고 들어가자 연근석의 얼굴
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 네?”
그러면서 하고 있던 생각까지 움찔 흘러나왔다.
[하아, 새끼 검사인 줄 알았다니 웬 골때리는 새끼가 사건 물었네. 허창수 회
장한테 나 나갈 때 피의자도 같이 모시고 나가겠다고 장담을 괜히 했나?]
푸핫-.
내 추측이 맞았네. 진짜 그럴 생각이었어? 사실, 변호사가 의뢰인한테 하는
저런 호언장담은 금기에 해당한다.
자기가 아무리 법리에 자신이 있어도 의뢰인의 말만 듣고는 사건이 어떻게 흘
러갈지 알 수 없거니와, 판사가 그 법 적용에 100% 동의하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법이란 게, 주관이 개입할 영역이 엄연히 존재해서 아무리 날고 기는 법조인
이라도 자신의 해석이 무조건 맞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
이게 1심에서 했던 판결이 2심 가서 뒤집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우리나라에서
최고가는 법조인들만 모아 놨다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도 소수 의견이나
반대 의견이 나오는 까닭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조금 전의 연근석처럼 자기가 무조건 석방시켜 주겠다거나,
100% 돈을 받아내 주겠다거나 하는 변호사가 있으면 의심의 눈초리를 가져볼
필요가 있다.
그 변호사의 실력 여부를 떠나서 어떤 사정이든 간에 사건을 꼭 자기가 수임
해야 한다는 굉장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면, 연근석은 허창수 회장한테 잘 보이려고 저런
말을 했겠지. 그래야 앞으로 자기가 운영하는 법무법인 화정과 HL 그룹의 관
계가 탄탄해질 테니까.
나는 설마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다는 듯 눈을 꿈벅이고 있는 연근석에게 했
던 질문을 반복해 주었다.
“형소법 200조의 3 아시냐고 물었습니다.”
방금 내가 언급한 형사소송법 200조의 3은 긴급 체포 요건을 규정하고 있는
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피의자가 사형ㆍ무기 또는 장기 3년 이상의 징역이
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에 긴급을 요하여 지방 법원
판사의 체포 영장을 받을 수 없는 때에는 그 사유를 알리고 영장 없이 피의자
를 체포할 수 있다. (......)
세상에 저게 통째로 한 문장이라니. 법 만드는 사람들은 웹소설 작가들을 본
받아 문장을 짧게 쓰는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된 ‘다음 각호’ 중 2번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 2. 피의자가 도망하거나 도망할 우려가 있는 때
즉, 이 조문을 지금의 상황에 적용해 보면 연근석 변호사가 물은 것과는 달리
꼭 현행범만 긴급 체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제야 내 말을 바로 알아들었는지 눈 동작을 멈춘 그가 다시 반박을 시도했다.
“물론 압니다만.”
조금 전 연근석 변호사가 했던 기선 제압, 어디 나도 한번 해 볼까나? 나는
일부러 서두밖에 나오지 않은 그의 말을 툭 자르고 들어갔다.
“답변 감사합니다. 변호사님도 잘 알고 계시는 그 조항에 따라서 피의자가 도
망을 시도하였기에 긴급 체포했습니다. 권다정 씨?”
변호사만 믿고 있으면 되는 줄 알았던 권다정이 갑자기 자기 이름이 불리자
놀라서 얼른 되물었다.
“네?”
“변호인 오기 전까지만 묵비권 행사한다고 하셨죠? 오셨으니 이제 대답해 보
시죠. 오늘 아침에 어디 계셨습니까?”
질문은 내가 권다정한테 했는데, 눈빛은 권다정과 연근석 변호사 사이에 오갔
다. 그러다가 연근석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권다정이 입을 열였다.
“... 공항이요.”
“공항에는 왜 가셨습니까?”
이번에는 연근석 변호사가 고개를 저으며 권다정을 바라보았다.
“길게 대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대답이야 내가 대신해 줄 수도 있지. 나는 준비해 온 서류를 넘겨 권다정
앞에 내밀었다.
“체포 당시 소지하고 계셨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행 항공권 티켓입
니다. 티켓 구매 일자는 오늘 새벽으로 돼 있고요. 지으신 죄가 있는데 일정
에도 없던 출국을 이렇게 서두르셨으니 당연히 도망가시려고 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겠네요.”
큼큼-.
긴급 체포 요건을 꼬투리 잡아 얼른 권다정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던 연근석
변호사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자기 계획이 박살 난 건 아나 보다.
그러자 권다정의 시선이 다시 연근석 변호사를 향했고, 그녀의 마음 한 자락
이 읽혀져 들어왔다.
[이 할아버지 믿어도 되는 거 맞아?]
푸흡-.
저기서 말하는 할아버지는 당연히 연근석 변호사인데,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
에 불신이 싹트고 있다라.
보통 바람직한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둘을 상대해야 하는 검사
입장에서는 개꿀이 아닐 수 없다.
헛기침을 마치고 고개를 다시 내 쪽으로 돌린 연근석 변호사가 실점을 만회해
보겠다는 듯 질문을 이어갔다.
“제 의뢰인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겁니까?”
긴급 체포 요건 갖고는 더 못 다투겠으니 근본적인 유무죄 여부를 따져 보겠
다는 얘기다. 물론 나는 대답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HL 증권 임원으로 재직하면서 수백 개의 차명계좌를 관리하고 운용하신 혐의
입니다.”
한 번 망신을 당한 뒤라 그런지 연근서 변호사는 마치 복어가 강대한 적 앞에
서 몸을 부풀리듯 목소리를 높였다.
“증거 있습니까!”
우습게도 이 외침에 나보다 먼저 답한 건 권다정의 마음속 소리였다.
[할아버지, 그런 얘기는 저도 하겠어요. 나 오늘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거 맞나?]
물론 나갈 수 있는 거, 절대로 아니다. 방금 연근석 변호사가 요청한 증거,
아주 잘 준비돼 있으니까.
나는 서류를 다시 넘겨 연근석 변호사 앞에 내밀었다.
“HL 증권에 다수의 차명계좌가 개설돼 있다는 금감원 조사 자료입니다.”
“HL 증권에서 그런 사고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어떻게 제 의뢰인이 그
계좌를 관리하고 운용했다는 증거가 됩니까? 이 증거 저희는 받아들일 수 없
습니다!”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지. 실제로 내가 회귀 전에 이 사건을 수사했을 때
이 덫에 빠져서 최종적으로 실패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었다. 내가 허창수 회장의 마음을 읽
은 덕분에 권다정을 타게팅해야 한다는 걸 명확하게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HL 증권이 아닌 권다정 개인의 업무용 책상과 자택을 콕 집어서 압
수수색 영장을 청구할 수 있었다.
회귀 전 수사 과정에서 그랬듯 HL 증권이라는 거대 기업을 대상으로 한 영장
청구라면 법원이 부담을 느껴 기각했겠지.
하지만 권다정 개인은 이야기가 달랐고, 나는 영장을 발부받아 경찰을 통해
성공적으로 집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빼도 박도 못 할 물증 역시 확보해
두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증거가 없다는 뜻입니까? 그럼 제 의뢰인 지금 당
장 석방해 주십시오!”
허창수 회장한테 약속한 게 있어서 마음이 급해 저러는 건 알겠다만, 법무법
인 화정의 연근석 대표 변호사님 명성에 안 맞게 되게 우기기로 일관하시네.
나는 손을 들어 연근석 변호사를 제지한 뒤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네. 박 사무관님. 권다정 씨 압수수색 증거물 지금 검찰청으로 들어왔죠?”
- 네.
“그럼 거기서 증거물 4호랑 24호 챙겨서 조사실로 내려와 주실래요?”
- 알겠습니다.
내가 전화를 끊고 박진아 사무관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 상황이 안 좋게 돌아
간다는 걸 직감한 연근석 변호사와 권다정이 서로의 눈치를 무지하게 봤다.
이윽고 박진아 사무관이 증거물 봉투 두 개를 넘긴 뒤 돌아갔고, 그 내용물을
흘깃 본 권다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맙소사, 저걸 걸렸다고?]
권다정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도저히 못 빠져나갈 만한 핵심 증거물인가 보다.
나는 증거물 봉투를 연근석 변호사에게 내밀었다.
“이 4호는 권다정 씨 자택에서, 24호는 권다정 씨 업무용 책상에서 발견되었
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공인인증서 발급용 보안 카드 다발이고요, 개수는 저
희가 열심히 세어 봤는데 두 개 합쳐서 총 243개였습니다. 전자금융거래법 위
반 혐의 너무 확실하고요, 곧 구속영장 정식으로 발부될 테니 석방은 불가능
합니다.”
따악-.
내 결정적 한 방에 자기 이마를 소리 나게 짚은 연근석 변호사가 의자에서 일
어났다.
“저도 잠시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누구한테 전화하려는 건지는 너무 뻔하다. 허창수 회장한테 약속을 못 지키게
돼서 죄송하다고 사정하러 가는 길이겠지.
그 덕분에 나는 권다정과 둘만 조사실에 남을 기회를 얻었다.
“권다정 씨, 이거 본인이 다 덮어쓰고 가시면 큰일 납니다. 누가 시켜서 한
건지 말씀하시는 게 좋아요.”
그러자 권다정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저 잠시만, 변호사님도 나가셨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묵비권 좀 행사할게요.”
“그럼 묵비권 행사하시면서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만약에 권다정 씨가
끝까지 단독 범행이라고 나오시면 허제회 씨까지 다칠 수 있어요.”
조금 전 묵비권 행사 선언은 어디 갔는지 권다정이 놀라서 되물었다.
“네? 제회 씨는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