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계좌 관리자의 정체 (3)
띠링, 휴우-.
약혼남의 말을 따라 추가 답장 없이 핸드폰을 끈 권다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섭섭하긴 했어도 약혼남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관리하던 허창수 회장의 수백 개 차명계좌가 검찰의 추적을 받고 있다
고 했다. 이건 분명 HL 그룹과 권다정 자신은 물론, 약혼남의 인생까지 걸린
일이다.
그때 택시 안 룸미러로 권다정이 우는 모습만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쭉 직진만
하고 있던 기사가 기회다 싶었는지 얼른 말을 걸었다.
“아가씨, 괜찮수?”
“네. 저 괜찮아요. 아니, 괜찮아야죠. 걱정하지 마시고 운전해 주세요.”
“거, 내가 운전은 잘할 자신이 있는데 말이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 그
렇수.”
권다정은 그제야 자신이 냅다 택시 문을 열고 들이닥쳐서는 기사한테 목적지
도 말해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랬나 생각해 보니, 공항에서 이 택시를 잡아탈 때만 하더라도 어디로 가
야 할지를 몰랐었다. 그저 공항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
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조금 전 약혼남과 나눈 문자 메시지를 통해 목적지는 분명해졌다.
“HL 타워로 가 주세요.”
“HL 타워면, HL 그룹 본사 사옥 말씀하시는 거 맞쥬?”
“네.”
휴우우-.
권다정이 다시 한번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 마음을 다잡았다. HL 타워에
만 도착하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것이다. 어쩌면 말레이시아 따위보다 훨씬
나은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말레이시아로 갔다가는 그녀 혼자 버텨내야 했겠지만, HL 타워에 가면 마음을
의지할 약혼남도, 엄청난 파워를 지닌 허창수 회장도 있을 테니까.
위이잉-.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는 HL 타워에 가서 정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때였
다.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열려 있는 택시 창문을 타 넘어 들어와 그녀의
고막을 때렸다.
너무 놀라 엉겁결에 창밖을 보니 방금 권다정이 어렵사리 해낸 굳은 다짐을
송두리째 흔드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경찰차가 한 대도 아니고 무려 네 대나, 그녀가 탄 택시를 사방에서 포위한
채 시내 고속도로를 같이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꿈과 희망의 공간이었던 HL 타워에는 도착도 못 한 채 체포되고 마는
건가 하는 권다정의 상상은 곧장 현실이 되었다.
“차량번호 2042 택시 차 세우세요. 경찰입니다.”
사이렌 소리가 넘어오던 창문을 통해 경찰의 확성기 소리가 들려오자 권다정
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빽 질렀다.
“기사님, 멈추지 말아 주세요! HL 타워까지만 가 주세요. 그다음부터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그 간절한 외침에도 기사의 반응은 싸늘했다.
“에잉,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게 무슨 일이람. 아가씨 사정 딱해 보인다더니
무슨 죄짓고 도망치시는 거였수?”
“제가 사정 설명을 다 드릴 수는 없는데, 제발 부탁드려요. 나중에 HL 그룹에
서 크게 사례할 거예요.”
세상에는 경찰이랑 스릴 넘치는 추격 레이스를 벌여 보고 싶어 하는 택시 기
사가 한 명쯤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권다정이 탄 택시 운전사는
그에 해당하지 않았다.
“거 참, HL 그룹이면 대단한 건 아는데 지금 경찰이 쫓아오고 있잖수? 나는
복잡하게 살기는 싫수다. 저 앞에 갓길에 세울 테니까 여기까지 온 택시비나
결제하슈.”
“기사님! HL 타워까지만 가 주시면 택시비 더블, 아니 열 배로 드릴게요.”
스윽-.
오늘 하루치 일당을 한 큐에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택시 기
사가 룸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권다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사의 마음이 흔들릴 뻔했던 그때, 권다정의 입장에서는 저주스럽게 열려 있
는 창문 틈으로 경찰의 확성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 *
나는 권다정의 핸드폰 위치 추적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뭔가 이상하더라. 인
천공항에서 나와 도로를 따라 쭉 직진만 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권다정이 타고 있는 저 차를 잡아야 했
다.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야 잡고 나서 물어도 되겠지.
이에 따라 나는 즉각 주변 경찰서에 연락해 지원을 요청하고 나도 곧 그 추적
에 합류했다. 권다정이 탄 차량이 직진을 멈추고 우회전을 했을 때였다.
위치 신호와 정확히 일치하는 택시 한 대가 포착되었고, 우리는 그 차를 포위
한 채 달렸다. 차를 멈추라는 경찰의 확성기 경고를 무시하는 듯 택시의 속도
는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이미 포위한 경찰을 따돌리고 권다정을 목적지까지 대려다 주려는 생각
일까?
혹시 조금 전 권다정 핸드폰이 꺼진 게 택시 기사랑 짜고서 아예 작정하고 경
찰을 따돌려 보겠다는 심산인 걸까? 둘 다 아니 될 일이었다.
내 지시를 받은 경찰이 이번에는 운전대를 쥐고 있는 택시 기사를 향해 정면
으로 경고를 날렸다.
“택시 기사님께 알립니다. 지금 범죄 용의자를 태운 채 경찰의 요청을 무시하
고 계십니다. 그 자체가 범법 행위입니다. 같이 체포돼서 기사님까지 범인 은
닉죄로 처벌받고 싶지 않으시면 당장 차 세우세요.”
끼이이익-.
그러자 택시 기사가 포기했는지 차선 두 개를 동시에 가로질러 갓길에 급히
차를 세웠다. 택시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범죄
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겠지.
우리 추적대 역시 곧장 갓길에 차를 주르륵 세우고 후다닥 내려 택시를 에워
쌌다. 그러자 안에서 택시 기사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내렸다.
“경찰관 나리들, 이게 무슨 일이래유? 저야 그저 택시 하는 사람으로서 손님
태운 거밖에 없는데 제가 무슨 범인 은닉죄라니까 황당해서 그러유.”
역시 내가 날린 경고가 주효하게 먹혔나 보다. 법률적인 질문이 나오자 경찰
관들의 시선이 우르르 나를 향했다. 이건 내가 답변해 줘야 할 의무가 있지.
“끝까지 안 세우셨으면 정말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협조해 주셨으니 이제 체
포되거나 처벌받으실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알겄슈. 그런데 제가 아직 택시비를 못 받았거든유?”
벌컥-.
그러자 택시 뒷좌석 문이 열리며 한 여자... 이긴 한데 마스카라가 잔뜩 번져
판다가 아닌가 싶은 사람이 내렸다.
“택시비 낼게요. 여기요.”
큽-.
그 모습에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기사님은 택시비 받으셨으니까 되셨고, 권다정 씨는 저희랑 같이 가시죠.”
그러자 권다정이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듯 판다 눈을 부리부리 뜨고서 덤벼들
었다.
“검사님이신가 봐요? 왜 이러시는지는 알고 같이 가야겠네요.”
아, 마린다 원칙 고지? 형사소송법에서 하라고 정해 놨으니까 해 줘야지.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금융실명제 위반 혐의입니다. 변호사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네. 좋아요. 어디 한번 해 보자고요. 저 지금부터 변호사 올 때까지 묵비권
행사할 거니까 저한테 뭐 한 마디도 묻지 마세요.”
그러든가 말든가. 그런다고 내가 권다정의 죄를 못 밝혀낼 리는 없으니까.
그대로 권다정을 체포해서 검찰청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자 메시지 하나가 왔
다. 인천공항으로 따로 출동했던 백경목 수사관이 보낸 것이었다.
- 방금 공항 CCTV 싹 뒤졌는데요, 제가 도착하기 전에 권다정 씨 이미 공항
떠난 거로 확인 되네요.
아차차, 내가 택시 쫓는 데에 집중하느라 백경목 수사관한테 따로 언질을 못
줬구나. 그러는 동안에도 자기 임무에 충실해서 CCTV를 돌려보고 있었나 보다.
- 권다정 씨 방금 체포해서 검찰청으로 연행 중입니다. 수사관님 수고하셨어
요. 헛걸음하게 해서 죄송하고요.
- 아닙니다. 무사히 체포하셨으면 된 거죠. 저는 원래 있던 현장으로 복귀하
겠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검찰청으로 돌아와 조사실에 들어오니 그새 화장을 지우고 판다 눈에서 벗어
난 권다정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쌩얼로 봐도 예쁜 얼굴인데 뭘 저렇게 무섭게 노려보고 그러나?
“묵비권 행사한다고 하셨죠?”
내 물음에 그녀의 눈이 더욱 표독스럽게 변했다.
“네. 방금 변호사랑 통화했고 곧 오시기로 했습니다. 묵비권 행사 의사 밝혔
으니 변호사 오기 전까지 제가 하는 말에는 증거 능력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
다. 저한테 대답을 강요하시면 위법 증거 수집 시도하시는 거라는 말씀도 들
었습니다.”
오우, 역시 30대 중반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을 단 여자라 그런가, 되게
똑똑하네.
법 공부를 따로 한 게 아닌 이상 한 번 듣고는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저 설명
을 완벽하게 해내다니.
“하신 말씀 맞습니다. 변호인 오실 때까지 기다리죠.”
물론 내가 이렇게 여유롭게 권다정을 대할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저렇게 당당한 척해도 속으로는 얼마나 떨고 있는지 하고 있는 생각이 모조리
읽혀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변호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이 시간에 나는 이미 아주 효율적인 조사를 해
내고 있는 셈이 된다. 오히려 권다정이 부른 변호사가 최대한 늦게 왔으면 하
는 생각까지 든다.
[하아, 그 택시 기사, 아무리 그래도 5천만 원을 당장 계좌 이체하라니, 그건
너무하잖아?]
푸흡-.
그러니까 그 택시 기사가 경찰을 따돌려 주는 대가로 요구한 금액이 4천만 원
이었나 보다. 권다정은 차마 거기까지는 못 받아들이는 바람에 이렇게 체포됐고.
뭐, 5천만 원을 준다고 해서 이미 포위망까지 형성한 경찰을 제낄 수 있으리
라는 보장은 없었을 테니 권다정이 그 딜을 못 받아들인 것도 이해는 된다.
그러고도 권다정의 생각은 쭉 이어졌다.
[아까 안 잡히고 HL 타워로만 들어갔어도!]
라든가,
[도대체 이 검사는 내가 차명계좌 관리자였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라든가.
그러던 중, 아주 뜻밖의 사진이 한 장 같이 읽혔다. 어젯밤 허창수 회장의 마
음에 침투했을 때도 보았던 얼굴이었다.
허창수 회장의 셋째 아들이자, 차기 미래 경영 설계실 실장 후보인 허제회였
다. 처음에는 권다정이 왜 허제회를 떠올리는지 아리송했다.
그런데 곧이어 읽힌 생각을 통해 권다정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좌르륵 해소되
었다.
[하아, 오빠 보고 싶다. 일이 이렇게 돼 버려서야 우리 결혼은 할 수 있는 건
가? 아니, 약혼 유지라도 가능한가?]
그러니까, 권다정이 허제회의 약혼녀이자 허창수 회장의 며느리 내정자였다는
이야기였다. 이러면 모든 게 설명되지.
허창수 회장이 왜 고작 하급 임원에 불과한 권다정에게 자기 차명계좌 관리를
맡겼는가? 며느리 될 사람이니까.
HL 증권 이종택 사장은 왜 권다정을 그렇게 높은 사람처럼 이야기했는가? 월
급쟁이 사장으로서는 넘볼 수도 없는 총수 일가의 일원이 될 사람이니까.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 지나가고, 권다정이 그토록 기다리던 변호
사가 조사실로 들어왔다.
“법무법인 화정의 연근석 변호사입니다.”
뭐야? 이렇게까지 거물이 나타났다고? 법무법인 화정은 우리나라에서 로펌 서
열 2, 3위를 다투는 곳이다.
화정이 HL 그룹 사건을 많이 맡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지금 등장한 연근석
은 무려 그 거대 로펌의 대표 변호사이다.
그 수임료가 억대이니 십억대이니 하는 소문이 도는 변호사이기도 하다. 허창
수 회장이 이번 건을 얼마나 절실하게 방어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이었달까?
물론 딱히 상관은 없다. 아무리 거물급 변호사가 붙었을지언정 이 사건은 내
승리로 끝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