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계좌 관리자의 정체 (2)
당연히 이종택에게 장단을 맞춰 줄 생각 따위는 없었기에 철저하게 용의자를
상대하는 검사로서 응대했다.
“허창수 회장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회장님이야 뭐 이런 자잘한 일에 신경 많이 쓰시겠습니까? 저희 내부적으로
도 검찰 못지않게 철저하게 조사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보고하라고만 하셨죠.
결과에 따라 책임은 제가 져야 할 거라고도요.”
역시 15년 전과 마찬가지의 전개이다. 허창수 회장은 진범이면서 아무것도 모
르는 포지션을 유지한 채 이종택에게 모든 걸 덮어씌울 생각이다.
그러고서 사건 자체를 축소하고 호화 변호인단을 꾸려 이종택만 집행 유예로
빼내면 아무도 실제 처벌은 받지 않고 끝난다는 계산을 하고 있겠지.
“내부 조사는 해 보니까 어떠신가요?”
“일단은 저희 HL 증권에 진짜 차명 계좌가 몇 개나 되는지 추려 보는 중입니
다. 검사님도 경제부에 계시니까 아시겠지만, 차명계좌랑 실명 계좌랑 무 자
르듯이 딱 갈라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충 알겠다. 가족이 하나의 계좌를 공유한다든지,
전문 투자자가 계좌랑 비밀번호 자체를 받아다가 운용한다든지 하는 회색 지
대가 있긴 하지.
그런데 지금 금융감독원에서 올라와 있는 보고서에는 그런 애매한 경우를 제
외하고 확실하게 차명계좌로 볼 수 있는 것만 5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사망자와 실종자 명의로 된 계좌는 차명계좌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있겠습
니다만?”
“그것도 저희 쪽에서는 파악이 쉽지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쓸 계좌를
만들고 죽었는지, 죽고 나서 차명으로 생성된 계좌인지 저희가 무슨 수로 일
일이 파악한단 말입니까?”
역시 이종택이 나한테 먼저 전화를 건 이유는 분명했다. 사건 자체를 불분명
하게 만들어 시간을 끌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말려들 생각이 없었기에 한참 뒤에 잡을 이종택과의 통화는 이만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필요하신 정보 있으면 저희 검찰이랑 금감원에서 합법적인 한도 내에서 적극
협력해 드릴 겁니다. 내부 조사 결과 나오면 저희랑도 공유해 주십시오.”
“네, 네. 물론이죠. 아참, 그런데 검사님, 그거 말고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뭔가요?”
이종택은 이게 중요한 이야기라는 듯 한 박자를 쉬었다가 대답을 이었다.
“회장님 지시도 있었고, 저도 도의적으로 당연히 져야 하는 책임이라고 생각
하는데 저 말고 저희 직원들한테 따로 소환장 보내신다거나 참고인 조사 받으
러 오라가라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거 봐라. 또 자기 선에서 자르려고 밑밥 깐다.
“그건 수사 상황 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직원들께 출석요구서 발송하겠습
니다. 범죄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면 체포도 가능하고요. 범죄 수사를 위해 부
여된 검찰의 권한이니 함부로 개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에헤이, 검사님도 참. 회사의 모든 업무 총괄하는 대표 이사로서 부르시면
언제든 제가 검찰청으로 달려갈 테니까 저희 직원들은 일하게 놔두십시오.”
“직원들께서 하셔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범죄 수사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 소환하는 게 제 일입니다. 그 부분은 협상의 여지가 없고요, 내부 조
사 결과 나오면 차후에 또 말씀 나누시죠.”
그러고서 간단한 인사말 뒤에 이종택과의 전화를 끊는데, 옆에서 박진아 사무
관이 같이 전화를 끊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검사님.”
“네. 방금 무슨 전화였어요?”
“인천공항 출입국 관리소에서 온 전화였는데요, 검사님이 출국금지 요청하셨
던 분 출국 심사 거절됐다고 알려주려고 전화했대요.”
검사 일 하면서 출국금지 걸어둔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닌데, 설마?
“이름이 뭐래요? 목적지는요?”
“권다정 씨라고 하던데요? 갖고 있던 비행기 티켓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공항행이었대요. 저는 서류에서 본 적 없는 이름이라 일단 검사님께 말씀드리
겠다고만 했어요.”
뜨악-.
권다정이 벌써 움직이고 있다고? 어젯밤에 허창수 회장을 만나고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도 검찰청으로 와서 출국금지 걸어 놓길 천만 잘했다.
“네. 권다정 씨 제가 출금시켜 놨어요. 지금 어디 있대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못 물어봤는데 다시 전화해 볼까요?”
“네. 빨리요.”
잠시 후, 급하게 통화를 마친 박진아 사무관의 대답은 영 내 마음에 들지 않
았다.
“소지품 검사 다 했고, 별다른 혐의점 없어서 방금 귀가 조치 했다고 하는데요?”
“얼마나 됐대요?”
“정확한 시간은 못 들었는데, 뉘앙스상 정말 방금 막 출입국 관리소에서 나간
것 같던데요?”
우씨, 진짜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검사가 출국금지 요청한 사람이 출국
을 시도했으면 이 사람을 풀어 줘도 되는지 아닌지 일단 검사한테 물어봐야
할 거 아닌가?
출입국 관리소에서 직권으로 체포했다가는 도리어 불법 감금 혐의를 쓰게 될
수 있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물어보면서 대답 올 때까지 시간은 끌어줄 수
있지 않나?
어쨌든 권다정이 지금 공항에 억류돼있는 게 아니라면 나도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이미 도주 의사가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이종택이 나한테 전화해서 괜히 시간을 질질 끌었던 게 다 권다정의
도주 시간을 벌려고 했던 건가 보다.
“감사해요.”
나는 박진아 사무관에게 인사한 뒤 재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백경목 수사관에
게 전화를 걸었다.
“네. 수사관님. 지금 가 계신 현장 경찰한테 인계하시고, 지금 빨리 인천공항
으로 출동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저야 검사님 하는 일 도와드리는 사람인데 급한 일 먼저 해야죠. 가
서 누구 잡으면 됩니까?”
“이름은 권다정이고요, 성별 여성, 나이는 34세, 사진 바로 보내드릴게요.”
이렇게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니, 어젯밤 권다정의 신원 조회를 마쳐 놓은 것
역시 신의 한 수로 작용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잡아서 바로 검찰청으로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희망 사항으로는 배경목 수사관이 인천공항에서 권다정을 딱 마주쳐서 그 자
리에서 체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이 꼭 그렇게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따라서 나는 전화를 끊는 즉시 어젯밤 확보해 둔 권다정의 핸드폰 번호 위치
추적을 시작했다. 절대 안 놓치리라.
* * *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권다정은 꽤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회사에
서는 거의 유니콘 급으로 분류되는 30대 여성 임원이었다.
그리고 몇 년째 만나다가 얼마 전 조촐하게나마 약혼식을 치른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늘 그랬듯 오늘도 그녀는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화장을 하
고 옷을 챙겨 입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출근 전부터 걸려온 회사 사람의 전화라 마뜩치는 않았어도, 발산인이 이종택
사장이었던지라 안 받을 수는 없었다.
“네. 사장님.”
- 어, 권 상무보, 지금 회사 오는 길이지?
쓰윽-.
권다정이 출근 패션의 마무리로 얼마전 약혼남이 선물해 준 명품 가방을 들어
어깨에 살포시 걸쳐 맸다.
“집에서 이제 출발해요. 안 늦게 도착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 아니, 늦고 안 늦고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회사 오지 말게나.
그녀가 자신의 여유로움과 이종택 사장의 다급함 사이에서 이질감을 느낀 건
그때였다.
“왜요? 저 짤렸어요?”
- 그럴 리가 있나? 내가 감히 누굴 짤라? 아무튼, 오늘 절대로 회사로는 오지
말고,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들었네.
“네? 사장님이 회사 오지 말라고 하셨으면 사정 설명도 사장님이 해 주셔야죠.”
당차게 되물었지만, 이종택 사장은 황급하게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 그래, 그래, 그래. 권 상무보 말이 맞지. 자네가 언제 틀린 말 한 적 있었
나? 그런데 지금 사정이 진짜 급해서 그래. 내가 또 전화해야 할 곳이 있어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몸 성히 만나자고.
“사장님!”
도저히 알 수 없는 말만 주르륵 내뱉은 뒤 권다정의 급한 부름에도 전화는 그
대로 끊어졌다.
털썩-.
정말 황당하게도 갑자기 갈 곳이 없어져 버린 권다정이 그대로 화장대 의자에
주저앉았을 때, 약혼남으로부터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 다정아, 지금 빨리 이메일 확인해 봐. 말레이시아행 비행기 티켓 있을 거
야. 그거 들고 지금 무조건 빨리 인천공항으로 가서 체크인부터 해.
너무나 황당했던 권다정이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러 약혼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 어, 다정아. 이메일 확인했어?
“나 지금 너무 황당한데, 조금 전에는 사장님이 전화와서 출근하지 말라고 하
더니 오빠까지 왜 이러는 건데? 사장님이 말했던 사정 설명해 줄 사람이 오빠
야?”
권다정의 다그침에도 약혼남은 계속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 이종택 사장이 그랬어? 어, 나 맞는 것 같은데 일단 이메일부터 보자. 응?
“나도 뭔지는 알고 움직여야 될 거 아니야? 얘기를 좀 해 봐. 무슨 일인데?”
- 짧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무슨 일이냐면 (......)
약혼남의 설명이 끝나자 권다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는 이종택 사
장과 약혼남의 다급함을 그녀도 공유하고 있었다.
“방금 이야기 들으면서 이메일 확인했고, 내 이름으로 된 비행기 표 잘 와 있
어. 그럼 나 지금 짐 싸서 바로 말레이시아로 가면 되는 거지?”
- 어, 맞아. 일단 잠깐만 가 있어.
“나 먼저 가 있으면 오빠도 올 거지?”
- 어, 어. 나도 빨리 갈게.
“오빠, 믿는다.”
전화를 끊자마자 권다정은 들고 있던 명품 백을 도로 내려놓고 장롱에서 커다
란 여행용 캐리어를 꺼내 짐을 쓸어 담았다.
그러고서 택시를 잡아타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약혼남이 시킨 대로 체크인하고
출국 심사를 받는데, 난생 처음 겪는 일이 일어났다.
그간 비행기를 수십 번 타 봤어도 막힌 적이 없었던 출국 심사대에서 경보음
이 울리며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이 그녀에게 달려왔던 것이다.
그때부터 권다정 인생 최악의 하루가 시작됐다. 마치 예비 범죄자라도 된 것
마냥 갖고 있던 소지품을 전부 까발려 검사받아야 했다.
그러고 나서도 온갖 예민한 질문을 받으며 1시간 가까이 출입국 관리소에 억
류돼있다가 방금 겨우 풀려났다.
꼴도 보기 싫은 공항에서 나와 바로 앞에 있는 택시를 잡아탄 권다정은 출근
준비를 하느라 공들여 바른 마스카라가 번지는 것도 모른 채 눈물을 닦으며
약혼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오빠, 나 출국금지래. 방금 내가 공항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
하지만 약혼남 역시 권다정을 심정적으로 감싸줄만한 여유가 없었던 건지, 돌
아온 답장은 차가웠다.
- 그게, 도대체, 왜?
자신이 당한 일에는 관심도 없는 약혼남의 태도에 더욱 빠르게 쏟아지는 눈물
을 닦으며 권다정이 문자 메시지를 이어 쳤다.
- 나 이제 어떡해? 일단 택시는 탔어.
얼굴 보고 대화하는 중이었어도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약혼남의 답장은 점점
차가워져만 갔다.
- 일단 HL 타워로 가. 그리고 이제 답장하지 마.
- 답장은 또 왜 하지 마?
- 위치 추적 당할 수도 있으니까 핸드폰 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