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48화 (48/51)

48화. 계좌 관리자의 정체 (1)

이 사건의 시작은 검찰청에 날아든 한 익명의 투서였다. 지금 사건 파일의 첫

장을 장식하며 내 앞에도 놓여 있는 그 내용은 이러하다.

- (......) 저희 아버지는 HL 패션에서 올해 일하다가 지난해 명예퇴직하셨

고, 안타깝게도 올해 초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

하던 중 유서의 자산 목록에는 없는 HL 증권의 계좌가 발견되었습니다.

- 비밀번호도 몰라서 상속인 자격으로 정보 공개 청구까지 한 끝에야 그 계좌

를 열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도저히 자산 목록에서 누락할 수

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액수의 주식이 들어 있었습니다. 종목은 딱 두 가지.

HL 패션과 HL 화재였습니다. 그리고 현금도 약간 들어있었고요.

- 총액이 2억 원이 넘는 이 돈을 보고 탐내지 않았겠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

무래도 범죄와 관련된 소지가 다분하게 보여 검찰청에 먼저 알립니다. 다만,

제 신상은 끝까지 익명으로 보장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일반인인 투서 작성자가 보기에도, 검사인 내가 시선에서도 너무나 범죄의 냄

새가 풀풀 나는 차명계좌였다.

회귀 전 이 투서를 받아든 나는 수사의 정석을 지킨답시고, 이 익명의 투서를

쓴 사람을 가장 먼저 찾아 나섰다.

HL 패션에서 작년에 명예퇴직한 사람들 명단을 확보하고, 그중 올해 1월에 죽

은 사람까지 찾아내어 기어이 투서 작성자를 찾아냈는데.

결론적으로 말짱 허탕이었다. 그 작성자는 정말 자신이 아는 내용을 자기 이

름만 빼고 투서에 다 썼을 뿐 그 외에는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나마 건진 소득이라면 검찰청에 저 투서를 넣은 경위는 말하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 죽음 원인이 HL 패션에서의 권고사직 때문인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도 금전적으로 쪼들리면서 살지는 않으니 그 주식을 자기가 상속

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HL 그룹에 복수하겠다는 심정으로 저 편지를 썼다고.

HL 패션과 HL 화재가 HL 그룹 전체 순환 지배구조에서 중심 고리 역할을 한다

는 건 경제에 조금만 관심 있어도 아는 사실이었으니, 불법 경영권 상속의 냄

새가 났다고 진술했다.

훌륭한 준법정신이고 다 맞는 말인데, 내 입장에서는 허탈함이 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범죄 규명에 필요한 추가 정보를 단 1도 더 알지 못하고 있

을 줄이야.

생각 같아서는 이 투서 작성자의 아버지, 즉 계좌의 명의상 소유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죽은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지난 수사에서 내가 이 투서 작성자를 찾는답시고 시간을 날리는 바람에 본격

적인 수사에 들어가니 HL 증권 쪽에서는 이미 완벽한 방비를 마친 상태더라.

금감원을 통해 이미 사망했거나 실종된 사람이 사망 신고 또는 실종 신고 이

후 날짜에 개설한 것을 포함해 수상하다고 여겨지는 계좌 568개를 확보하고

회사로 압수수색을 들어갔다.

하지만 그 계좌는 이미 HL 증권에서 자체적으로 싹 동결시켰고, 이미 내부 감

사를 통해 어떤 경로로 그 차명계좌들이 개설되었는지는 파악 불가능한 것으

로 입을 맞춰 놓았다.

이후에 어떻게 더 조사를 해 보려고 해도 HL 증권의 사장 이종택이 최고 경영

자로서 모든 책임은 자신한테 있으니 벌을 달게 받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별

소득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종택 사장은 자기가 모든 걸 떠안는 대가로 HL 그룹 수뇌부에서

뭔가를 받기로 했다는 의심만 갈 뿐, 더 할 수 있는 게 안 보이더라.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차명계좌를 방치한 책임은 몽땅 다

짊어지고 감옥에 가겠다고 읍소만 해대니 도저히 수사에 진전이 없었다.

게다가 그 수사가 이루어질 무렵에 HL 증권 임원들이 출장이나 휴가니 하면서

해외 일정을 잔뜩 잡아 놓은 것도 큰 걸림돌이었다.

검찰청 와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 한국에 없다는 답변부터 돌아오니 당최

뭘 물어볼 수라도 있어야지.

당시 이 사건의 결재 라인에 있는 선배 검사들도 HL 증권 사장 기소할 수 있

을 정도면 큰 수사 성과이니 이만 접으라고 하더라.

그래서 이만 사건을 거기서 마무리 지었는데, 시간이 지나 호화 변호인단을

끼고 기어이 집행 유예 선고를 받아낸 이종택 사장을 다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이죽거리며 했던 말은 이번 생에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대

화가 이루어진 곳은 늦은 밤 한 일식집이었다.

집행 유예 판결이 나오던 날 불러서 나가 보니 잔뜩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종택 사장이 먼저 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자기가 이겼어도 상대한테 GG, 내지는 항복 선언을 받

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나 보더라.

아직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그가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턱을 추켜세운 채 말

했다.

“사업상 중요한 이야기 나눌 일 있을 때 가끔 오는 곳입니다. 들어오시면서

금속탐지기 검사는 받으셨을 거고, 아, 물론 저도 받고 들어왔으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럼 녹음될 일은 없다 치고, 말씀 나눠봅시다.”

“무슨 말씀이시길래 이 밤에 금속탐지기 검사까지 받아가면서 해야 됩니까?”

내 물음에 그가 대답에 앞서 술을 권했다.

“일단 축하주 한 잔 드시죠.”

“저는 축하할 일 없습니다만.”

“제 집행 유예 판결 축하주입니다. 같이 마셔 주시기 싫으면 저 혼자 마시죠.”

패배한 상대를 앞에 앉혀 놓고 승리 축하주를 마시겠다니, 변태도 이런 상변

태가 다 있나 싶더라.

“그러려고 부르신 거면 쭉 혼자 드시죠. 이제 겨우 1심 판결 나온 건데 게임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범죄 사실 완전히 소명됐고 형량 문제는 저희

검찰에서 2심 가서 다시 다툴 겁니다.”

꿀꺽-.

그새 자신의 잔을 비운 이종택 사장이 앉으라는 듯 손을 아래로 까닥거렸다.

“에헤이, 성격 급하시긴. 앉으십시오. 그 항소라는 거 정말 하실 생각이십니

까?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씀드리려고 불렀습니다만.”

“그 형량, 저는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항소는 피의자뿐만 아니라 저희 검찰

한테도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러지 마시래도. 검사님이 계속 캐고 싶어 하셨던 이 사건의 배후가 누군지

알고 그러시는 겁니까?”

약 올리려는 게 뻔한데도 그때는 참 어린 마음 때문이었을까, 배후를 알려주

겠다는데 도저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가 없더라.

“누굽니까?”

“저희 그룹 허창수 회장님이십니다. 검사님이 상대하실 레벨이 아니에요. 그

차명계좌에 들어있던 주식들 이용해서 아드님 중 한 분한테 경영권 넘겨드릴

생각이시라 검사님 한 분이 날뛴다고 어떻게 될 일 규모도 아니고요. 정신 차

리세요.”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그 많은 차명계좌에 있는 HL 패션과 HL 화재의 주식이

허창수가 지목한 후계자에게 넘어간다면?

순식간에 경영권 승계 및 방어에 필요한 지분 비율을 확보할 수 있는 데다가,

형식상 소액으로 여러 명한테서 증여받은 게 되니 상속세 문제도 피할 수 있

었다.

“수사 다시 해야겠군요.”

“일사부재리,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한 번 수사해서 재판에 넘긴 사건은

다시 안 파헤치는 게 검찰 룰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일사부재리 원칙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이종택 사장님이 피고인

이었던 수사였고, 이제는 허창수 회장님을 피고인으로 하는 새로운 수사가 될

테니까요.”

쯧쯧-.

내 반박에 이종택이 혀까지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순진하시긴. 그 재수사를 검찰 상부에서 하락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검사

님이 저만 기소하셨을 때 윗분들이 말씀해 주신 거 없어요?”

“잘했다고 칭찬을 듣긴 했는데, 설마 그것도 HL 그룹에서 손 쓴 겁니까?”

“회장님이 하신 일이라 제가 깊이는 모르지만서도, 생각이란 걸 해 보시란 거

예요. 칭찬하셨던 그분들한테 재수사할 테니까 결재해 달라고 하면 뭐라고 하

시겠습니까? 그리고 어찌어찌 재수사 한다 쳐도 그 차명계좌 관리하시던 분이

요, 검사님이 건드실 수 있는 급이 아니에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어요?”

상대를 한껏 무시해대는 이 말투에도 그때 내 신경은 온통 새로운 인물의 등

장에 쏠려 있었다. 수사를 끝냈는데도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그 차명계

좌 관리자.

“누굽니까?”

“재수사하겠다는 분한테 제가 어떻게 말씀을 드립니까? 궁금하시면 500원, 은

주실 필요 없고 약속하시죠. 재수사도 항소도 안 하시겠다고요.”

“재수사, 항소 둘 다 할 겁니다.”

그 말에 이종택이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검사님이실세. 그럼 이만 일어나시죠. 술은 저 혼자

마셨어도 표정 보니 쓴맛은 검사님이 더 느끼시는 것 같으니 축하주 잘 나눈

거로 하겠습니다.”

“방금 드신 술 축하주가 아니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날 밤 일식집에서 했던 내 다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검찰청

에 돌아와 재수사하겠다는 의견을 말했다가 차장 검사실까지 불려가서 된통

혼만 났으니까.

그때야 미래 지식도 마음 침투 능력도, 무엇보다 배짱도 없는 그저 평범한 3

년 차 아기 검사였으니 그 사건은 그대로 묻혔다.

* * *

그렇게 회상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와 보니 그때 이종택이 했던 말 중에 정말

이상한 게 있었다.

내가 어제 허창수 회장이랑 맞다이를 떠서 알아낸 차명계좌 관리자의 이름은

권다정, 직급은 고작 상무보였다.

상무보면 회사의 임원 중에서는 가장 낮은 급이다. 그런데 그때 이종택은 마

치 권다정이 닿을 수 없는 위 세계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했단 말이지.

권다정이 그냥 상무보라면 같은 회사의 대표 이사인 이종택이 그런 식으로 표

현할 수가 없지 않나?

게다가 본사도 아니고 고작 계열사 하급 임원한테 허창수 회장이 자기 차명계

좌를 맡겼다는 것도 수상했다. 권다정, 이 여자 정체가 뭘까?

지이잉, 징징징-.

생각을 쭉 이어가던 중, 내 핸드폰이 울리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저장되

지 않은 번호였지만, 그 숫자만으로도 꽤 익숙했다.

“네. 백동준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핸드폰 너머에서는 방금 내 상상 속에서 한참을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백동준, 검사님 맞으시죠? 저는 HL 증권 사장 이종택

이라고 합니다. 방금 저희 그룹 허창수 회장님한테 잔뜩 혼나고서 전화 드립

니다. 잠깐 통화 가능하신지요?”

“네. 말씀하시죠.”

“저희도 금감원 쪽에서 연락받고 내부적으로 조사는 하던 중이었는데, 저희

증권사에 차명계좌 많다는 걸 어제 회장님한테 이르셨다면서요? 덕분에 제가

아주 애먹었습니다.”

저 이죽거리는 말투를 다시 듣는 게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이번에는 절대로

집행 유예 따위로 풀려날 일 없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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