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허창수를 직접 만나야 했던 이유
제안을 마친 허창수 회장이 설마 거절할 거냐고 묻는 것처럼 턱을 두꺼운 턱
을 불쑥 내밀었다. 이 정도 금액이면 임정환 실장이 내가 기뻐할 거라고 미리
확신했던 게 이해는 되네.
사실, 나는 지금 (일부) 검사들이 공직생활 내내 한 번쯤은 꼭 받길 희망하는
제안을 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자기가 수사하던 거물이 뒤로 몰래 접촉해서 사건을 덮어주는 대가로 거액의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상상, 솔직히 한 번도 안 해 본 검사가 몇이나 될까?
물론 회귀 후의 나한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조금 전 허창수 회장이 부
른 연봉 10억이 내 인생의 목표일 리 없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누보 사태에서 거액을 당겼을 때 바로 검사고 뭐고 때려치웠겠
지. 돈이라면 나도 곧 허창수 회장 못지않게 갖게 된다.
“별로 구미가 당기는 금액은 아니네요.”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허창수 회장이 내밀었던 턱을 뚝 떨어뜨렸다.
“뭐야?”
“방금 말씀하신 대로 연봉 10억 받고 3년 근무해 봤자 고작 30억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이거 세간에도 꽤 많이 알려졌는데, 그 정도 돈은 지금 저한테도
있습니다.”
내 말이 금액의 문제라는 뜻으로 들렸던 걸까? 허창수 회장이 거듭 제안을 이
어왔다.
“그럼 연봉을 얼마까지 올려주면 되겠나?”
“돈보다는 자리를 원합니다.”
허창수 회장은 또 한 번 내 말을 오해하며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떨어진
턱을 수습해 만면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하긴, 몇십억 정도 한 번 만져 봤으면 눈이 그쪽으로 돌아갈 수도 있
지. 어느 자리까지 가고 싶은가? 검찰총장? 민정수석? 아니면 국회의원? 검찰
청이고 정치판이고 우리 HL 그룹 사람들로 꽉 차 있어. 우리 회사에 더는 손
대지 않는 조건으로 내가 밀어줌세.”
“셋 다 아닙니다.”
끄으응-.
이쯤 되니 허창수 회장이 불쾌함을 가득 담은 신음을 내뱉었다. 감히 회장님
을 이렇게 갖고 노는 사람은 몇십 년 만에 내가 처음이었겠지?
그렇다고 내가 말장난이나 하려고 허창수 회장만큼이나 귀한 내 시간을 들여
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다. 그가 감정적으로 동요할수록 내 목적을 달성하기
가 더욱 쉬워지기 때문이다.
오우, 벌써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 새끼가 나랑 농담 따먹기 (...) 거야, 뭐야?]
마음 침투 능력이 발휘되며 허창수 회장의 마음이 읽혀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이다. 이게 내가 임정환 실장이 아닌 허창수 회장을 직접 만나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아직 작동 원리가 파악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마
음 침투 능력은 직접 대면해야만 발동된다.
내가 임정환 실장의 마음을 읽어서 뭐 하겠는가? 그저 노예근성에 젖어 허창
수 회장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일 뿐인 것을.
자기 생각이 읽히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허창수 회장이 목소리에 화를 잔뜩
담아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떤 자리를 원한다는 건가?”
“회장님이 주시기에 아주 쉬운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뭐냐고!”
후훗-.
내가 HL 타워에 들고 온 첫 번째 의문점을 해소할 기회가 찾아왔다.
“HL 그룹 본사 미래경영설계실 실장 자리 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예상대로 허창수 회장의 분노에 당황이 더해졌고, 그의 생각이 잡음 없이
훨씬 더 또렷하게 읽혀 들어왔다.
[이게 미쳤나? 거기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그걸 내놓으래? 그 자리의 주인은
따로 있어.]
어떤 자리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HL 그룹의 후계자가 앉을 자리지. 그래서
그 후계자로 허창수 회장이 누굴 낙점하고 있는지 알아보려 일부러 이렇게 떠
본 것이다.
내 미래 지식에 따르면 그 자리에는 허민회가 앉게 되지만, 내 개입으로 이제
그럴 수 없게 됐으니 허창수 회장은 나머지 두 아들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허창수 회장이 대답을 미루며 나를 노려보는 동안 그의 생각이 계속 이어졌
다. 이번에 떠오른 건 한 인물의 사진이었다.
필시 차기 미래 경영 설계실의 주인일 그 얼굴은 내 기대와는 다르게 허규회
가 아니라, HL 그룹의 셋째 아들 허제회였다.
끄응-.
나는 내심 첫째 허규회이길 바랐다. 이미 몇 번 만나 본 결과 어떻게 상대해
야 할지 각이 대략 나와 있었으니까.
내 판단으로 허규회는 자기 눈 바로 앞에 놓인 작은 이익만 보고 전체 판세를
못 보는 타입이었다. 되게 다루기 쉬운 사람이랄까?
일례로, 허규회가 그렇게 대놓고 허민회의 재구속을 추진하는 걸 허창수 회장
이 좋게 봤을 리가 없다.
나랑 허규회가 따로 만난 것까지야 허창수 회장이 알 수는 없겠지만, 휴림유
업의 대표 이사를 넘긴 게 결국 허민회의 재구속 시발점이 됐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테다.
지금 허창수 회장의 마음속에서 차기 미래 경영 설계실 실장으로 허규회가 아
니라 허민회가 낙점된 데에는 이게 크게 작용했을 공산이 컸다.
마음 침투 능력이 더 개발돼서 지금 하고 있는 생각만 읽는 게 아니라, 깊은
속마음까지 알 수 있으면 여기에 확신을 가질 수도 있겠는데, 혹시 나중에는
가능해지려나?
처음 이 능력을 얻었을 때랑 비교해서 잡음이 섞여 들리는 경우가 대단히 적
어졌고, 소리도 영상도 훨씬 선명해졌다는 걸 보면 곧 질적인 업그레이드가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말이지.
허규회와 반대로, 셋째 허제회는 나로서도 아는 게 많지 않은 인물이었다. 회
귀 전 기억을 더듬어 보더라도 정보가 거의 없었으니까.
두 형과는 달리 허제회는 경영권에 딱히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따라
서 밖으로 드러나는 활동도 거의 없었다.
정말 회사 경영 따위에는 관심 없는 야인으로 살고 싶어 하거나, 야망을 감춘
채 조용히 기회를 노리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나보다는 허제회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 허창수 회장이 그를 후계자
로 낙점했다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 정도는 기억해 둬야겠다.
내가 그런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된 허창수 회장이 처
음에 덤덤하던 모습을 잃어버린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감히 어딜 넘봐! 그러니까 백 검사, 자네 지금 나랑 제대로 이야기 나눌
생각이 없는 게로구먼?”
“회장님께서 저한테 원하는 걸 말씀하셨으니, 저도 그에 상응해서 제가 원하
는 걸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너무 발끈하지 마십시오.”
“발끈? 이게 누구 앞에서? 썩 꺼져!”
어휴, 저러니까 진짜 허민회 아버지 같네.
어차피 협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오지도 않았고 아주 긴 날을 이틀 연속으
로 보낸 덕분에 피로도 누적도 꽤 심했지만, 여기 온 두 번째 목적은 달성하
고 가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미래 경영 설계실 실장이 아니라 검사로서 일을
계속하기로 하죠. 지금은 허민회 씨만 감옥에 들어가 있지만, 제 다음 타겟은
허창수 회장님이라는 건 알고 계십시오.”
“뭐? 네깟놈이 무슨 수로?”
“지금 저희 중앙지검이 제 담당으로 내사에 들어가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HL
증권에서 다수의 차명계좌가 발견됐다는 제보가 있어서요. 죽은 사람, 실종된
사람 이름으로 된 계좌가 많더라고요? 이게 누구 계좌인지 제가 모를 것 같습
니까?”
검사로 변한 내 모습에 허창수 회장이 입을 쩍 벌렸다.
[그게 왜 하필이면 네놈 담당이야?]
아, 그거야 뭐 기가 막힌 우연 따위는 아니고 간단한 이유에서이다. 지금 기
준으로 중앙지검에 경제부는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법대 출신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몇 안 되는 경제학과 출신이라는
이유로 너무 당연하게 이곳에 배정되어 있다.
HL 증권 관련된 투서가 들어온 걸 본 다른 선배 검사들이 다들 영 피하는 눈
치길래 HL 그룹 전문가인 내가 얼른 주워왔지.
허창수 회장이 그런 속마음을 감추려는 듯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가 나를 노려
보며 뇌까렸다.
“글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만, 우리 HL 증권에 차명계좌가 많으면 바
로잡아야겠지. 검찰에서 수사 중이라니, 우리도 자체적으로 알아보라고 지시
해 두겠네.”
“그렇다면 그 차명계좌를 몽땅 묶어서 관리하고 있는 한 사람이 누구신지도
모르시겠습니다?”
“모른다니까!”
거짓말을 하는 입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솔직했다.
[... 권다정 상무보.]
오호, 내가 그토록 찾아해메던 사람 이름이 권다정이었구나. 직급은 상무보.
차기 미래 경영 설계실 실장에 이어 이 이름까지 알아냈으니 오늘 HL 타워로
찾아온 보람 아주 확실하네.
“발끈하지 마시래도요. 이미 축객령까지 들었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
다. 곧 다시 뵙게 될 것 같지만요.”
“... 백동준 검사?”
“네. 회장님.”
오늘 나와의 대화가 70이 넘은 노인한테는 너무 부담됐던 걸까? 잔뜩 지친 모
습의 허창수 회장은 어느새 한쪽 입꼬리를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오늘은 그냥 보내 주겠네만, 밤길 조심하게나. 오늘 나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군 거 후회하게 될 날이 곧 올 테니까.”
어휴, 또 허민회 아빠다운 소리 하고 있네.
“그 날보다 회장님께서 제 제안 거절하신 걸 후회하게 될 날이 먼저 올 겁니다.”
와장창, 쨍그랑-.
그 말을 끝으로 회장실에서 나오는데 문이 닫히고 나서 뭔가 박살 나는 소리
가 들려왔고 나를 배웅하려던 임정환 실장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회장님께서 아주 많이 화가 나셨나 보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정상적으로 출근해서 검사실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중
이다. 먼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 건 배경목 수사관이었다.
“어제 잘 귀가하셨다는 말씀 듣고 안심은 했습니다만, 위험하셨던 거 아니죠?”
“정말 위험한 일 있었으면 수사관님이 출동해 주실 거였잖아요. 믿고 있었어요.”
배경목 수사관의 표정을 보니 정말 걱정이 많이 되는 눈치였다.
“검사님 예전에 성해지청에 계실 때도 큰일날 뻔한 적 있으시다면서요. 몸 잘
챙겨 가면서 수사하세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사무관님?”
배경목 수사관과 나란히 서 있다가 급히 부름을 받은 박진아 사무관이 얼른
대답했다.
“네! 검사님.”
“HL 증권 차명계좌 사건 내사 파일 찾아 주실래요?”
“잠깐만요.”
곧이어 배경목 수사관은 다른 사건 현장으로 출동했고, 내 책상에는 방금 박
진아 사무관에게 지시한 사건 파일이 놓였다.
후훗-.
이제 본격적으로 허창수 회장을 직접 겨냥해서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이
수사를 개시할 때가 왔다.
HL 증권에 개설된 수백 개의 차명계좌의 주인은, 어제 HL 타워에서의 대화를
통해서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듯, 허창수 회장이다.
내가 이 흑막을 이토록 확실히 알고 있는 까닭은, 이 사건을 두 번째로 수사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을 어겨서 이미 끝난 사건을 다시 수사하
는 건 아니고, 이 사건을 처음으로 수사했을 때는 회귀하기 전이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때와 같이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머릿속에 저장
된 이 사건의 기억을 끄집어내 보았다.